하룻밤 사이에 가을은 겨드랑이와 종아리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아- 지긋지긋한 더위!
엊저녁 까지만 해도 자연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은 한증막더위는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매일 아침 4시 반 쯤 더위에 잠이 깨어 일어나 안양천 둔치에 마련된 운동시설에 가서 운동이 아닌 팔다리를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유희를 하고 천변 야트막한 잠수인도교 중간에서 어린애만한 잉어들이 떼 지어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해가 솟아오를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게 매일아침 일과입니다.
오갈 때 손수건을 반드시 손에 쥐고 얼굴과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닦느라 양 손이 쉴 새가 없습니다.
더울 땐 바람을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바람이 더위를 더 독하게 부채질 했습니다.
매일 바람은 불었지만 끈적끈적한 밀가루 풀에 뜨거운 물을 타서 분무기로 뿌려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더위를 더 못된 더위로 만들곤 했습니다.
헌데 오늘아침!
바람도 많이 불었고 바람속의 습기가 온데 간 데가 없이 바싹 말라 있어서 더 없이 상큼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몸뚱이를 어루만지고 지나갈 때 마다 겨드랑이가 시원하고 종아리가 조금은 서늘하기 까지 했습니다.
매일아침 어두운 시간임에도 매미들의 합창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매미라는 매미는 몽땅 모여들어 소프라노, 테너, 알토, 바리톤, 베이스 등 온갖 매미가 각자의 고운 목소리를 자랑하며 목청껏 뽑아대니 이건 자연이 공짜로 인간에게 선사하는 교향악단의 연주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교향악은 자취를 감추고 어쩌다 뒤늦게 우화한 매미의 쓸쓸하고 애절한 독창이 가끔 있을 뿐이었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어느 틈에 겨드랑이와 종아리까지 타고 올라온 것을 오늘아침에서야 알았습니다.
올 여름이 이렇게 혹독하게 더웠으니, 올 겨울은 고춧가루와도 같은 지독한 추위가 사람을 얼마나 들볶으려나?
반바지에 반소매였지만 벌써 겨드랑이가 시원하고 종아리가 서늘했는데, 조금 있으면 두 다리사이에 계란 노른자 두 개를 담고 축 늘어져 있던 가죽주머니는 바싹 마른 호두알이 될 것이고, 배따지는 가죽냉장고가 되고 뜨거운 물이 줄줄 흐르던 등때기는 물이 얼어붙어 미끄럼판이 될 것이다.
아- 겨울을 어찌 또 견딘단 말이냐?
혹자는 이런 사상초유의 더위를 자연의 보복이라고 까지 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사람같이 옹졸하지 않고 대범하셔서 보복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십니다.
자연은 오직 베풀기 만하십니다.
헌데 인간의 탐욕이 땅이 베푸는 오곡백과로는 만족 칠 못해하고 석탄 캐고, 기름 뽑아내고, 가스 뽑아내고, 온갖 쇳덩어리를 캐 내느라 자연의 대표인 지구라는 땅 덩어리를 벌집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자연은 보복하지 않고 베풀기 만하십니다.
그런데 자연도 인간으로부터 끊임없이 몹쓸 짓을 당하시니 몸이 허약해지셔서 열병이 나신 것입니다.
자연이 꿍꿍 앓으시며 가쁜 숨을 내 품는 열기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견디기가 힘든 것입니다.
겨울 추위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허약해진 자연도 감기와 고뿔에 걸리시고, 그러다 보니 자연이 내뿜는 기침과 가래가 겨울추위를 더욱 춥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탐욕이 언제까지 계속 되려는지?
인간이 탐욕을 자제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앞으로는 봄과 가을은 없는 여름과 겨울이 반복되는 시생대 → 원생대 → 고생대 → 중생대 → 신생대→ 그 다음은 <말생대>인 지구 종말로 다가갈 것입니다.
말생대가 다가오기 전에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