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할머니의 가난하지만 사랑충만했던 일생을 보며

익명1 조회수 : 4,080
작성일 : 2018-05-16 10:12:46

할머니가 95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셨어요.

저도 장례식장에 갔었죠.


할머니는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이었고

한국에서는 성수동 골목의 작은 집(화장실도 밖에 있는)에 혼자 사셨는데

늘 웃고 계시고

손주들 가면 뭐 하나라도  더 해먹이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분이었어요

음식도 잘하시고

공원 나가서 친구들과 운동하시며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던 모습이 기억나요

기독교 신자셨는데 365일 새벽기도를 다니셔서

볼이 찬바람에 홍조가 있을 정도였고

자다 깨서 할머니 보면 늘 엎드려서 기도하고 계셨어요

작은 일에 기뻐하고 웃으시고

없는 돈 모아서 아들이랑 손주들 주시고

광고지 하나, 볼펜심 하나 허투르 쓰시지 않으셨죠.

그러면서도 얼마나 멋장이신지..곱게 하고 다니셨어요.


할머니랑 놀 때 할머니가 보자기를 솜씨 좋게 접어서 쥐도 만들어서 슝~ 날려주시고

(아직도 신기함 손바닥위에서 슉 하고 움직임)

우리가 티비를 보든 하루종일 만화방에서 살든

늘 아무 잔소리 없이 먹을 것만 챙겨주시고 그러셨어요

덕분에 할머니 댁 며칠 가 있으면 힐링 되는 기분이었어요

우리 첫애가 말도 못하게 낯을 가리는 아이였는데

1-2살 무렵 할머니(제 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죠)와 처음 만났을 때 한번에 안다가가시고

옆에 툭 앉아서 딴데 보며

장난감 하나씩 아이쪽으로 쓰윽 밀어넣으시다가

서서히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니

어느새 아이도 할머니랑 놀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거든요.전무후무해요.


미국에서 한 30년 가까이 노년 보내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거기서도 늘 운동하시고 이웃들과 즐겁게 지내셨어요

끝에 10년 정도에는 노환으로 치매가 오셨는데

얼마나 얌전하신지...아들도 못알아보면서

제가 우리 아이들 데리고 갔더니

그 와중에도 애들보고 '누구지..아이 예쁘다 예쁘다' 하시고

치매인데도 해코지 한 번 없이 조용히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는 영상을 보았는데

심지어 유언이 '예뻐,, 졸려' 이더라고요.


저의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미울텐데도

저한테 전화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나는 (우리 아들 피눈물 나게 한 ) 너희 엄마 용서했다..하시더군요.


할머니가 남기신 낡은 성경 찬송가 두 권

싸구려 옥가락지 한 개.

유물은 그게 전부인데

할머니는 저에게 사랑을 남겨주셨어요.


미국에서 있었던 장례식장에서 작은 아빠가 하신 말씀

'어머니는 사랑이셨습니다'

아빠도 할머니에 대해 말씀하실 때

'천사같은 분'...


할머니는 성공한 인생을 사셨어요.



오늘 할머니 냄새가 그립네요...



IP : 180.69.xxx.24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8.5.16 10:18 AM (121.131.xxx.34)

    할머니 정말 성공한 인생을 사신분이시네요..

    이런 할머니를 두었다니..부럽네요
    그리운 분의 기억만으로도 읽는 사람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나도 그래야지..하고 있네요.

  • 2. ..
    '18.5.16 10:24 AM (112.222.xxx.94) - 삭제된댓글

    지혜로우신 분이셨네요
    삶과 사랑을 사랑하시고 충만하게 살다 가셨네요
    본받고 싶은 삶입니다

  • 3. ㅇㅇ
    '18.5.16 10:24 AM (59.30.xxx.248)

    천사셨네요.

  • 4. 오늘
    '18.5.16 10:28 AM (211.177.xxx.138)

    저의 친정엄마도 이북 분이신데 생활력 강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셨지요. 모든 손자 손녀를 다 진심으로 사랑하셔서 돌아가셨을 때 후손들이 애통해했어요.
    반면에 시어머니는 손자만 좋아하시고 이상하게 차별하셔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손녀들이 안봐요.윗글을 읽다보니 저희 친정엄마를 뵌듯합니다.

  • 5. 따뜻한
    '18.5.16 10:39 AM (122.32.xxx.131)

    영화 같네요
    저는 이런 글 읽으면 저도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을 주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프네요
    원글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좋은 할머니 두셔서요

  • 6. ㆍㆍ
    '18.5.16 10:39 AM (122.35.xxx.170)

    저도 그런 사랑 넘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ㅎ

  • 7. ..
    '18.5.16 10:44 AM (182.211.xxx.149)

    자손들에게 사랑이 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몸소 보여주고 떠나신 할머니
    이 아침 저에게도 울림을 주시네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런분이세요.
    한없이 맑고 착하신 분
    그 좋은 품성으로
    기도로
    본인보다 연로하신 성당분들 챙기시고..
    자식들한테도 언제나 좋은 말..
    맛있는 거 본인 형편껏 챙기시고

    가난하지만 맑고 정갈한 인생을 꾸리시는 시어머니.
    저에게도 그 분은 사랑입니다.

    원글님 덕에 저녁에 전화 드려야 겠어요.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그것도 부담 스러워 하시는 분이라..

  • 8. 준아
    '18.5.16 11:57 AM (203.145.xxx.46)

    그런 어른을 보고 자란 님도 전 부럽습니다

  • 9. 익명1
    '18.5.16 12:33 PM (180.69.xxx.24)

    네..맞아요
    저도 제 인생 중에 사랑을 베푸신 분이 있어서 감사해요
    할머니도 완벽한 분은 아니셨죠
    그러나, 그 분의 한 조각이 참 푸근하게 남아요
    저도 우리 아이들이 나를 기억할 때
    '조건없이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래요

  • 10. 쓸개코
    '18.5.16 12:53 PM (119.193.xxx.159)

    참 고운 글이에요. 원글님의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할머니에 대한 그런 추억들도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돌아가신 제 친할머니도 생각납니다.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항상 은비녀 하고 한복입고 계셨죠.
    같이 모시고 살았는데
    집에 젊은사람들 인사하러 찾아오면 인사만 받고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노친내 냄새 난다고.
    저희 엄마는 할머니 속옷을 빨아본 적이 없으시다네요.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맏기기 싫어 항상 새벽에 일어나 처리하셨대요.
    항상 말씀도 조용조용 곱게 하시던 할머니.. 보고 싶어요.

  • 11. 익명1
    '18.5.16 1:56 PM (180.69.xxx.24) - 삭제된댓글

    나이 들어갈수록 꼰대 되지 않도록 안테나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류에 젖어 가지는 않되 소통은 되도록..
    제일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느껴져요
    애정없는 지혜는 자꾸 증오를 부추기더라고요
    내가 옳고 남은 그른게 되니까..

  • 12. 오늘
    '18.5.16 2:09 PM (123.212.xxx.200)

    참 좋은 글이 많네요.
    원글님 할머니처럼 늙고 싶어요.노력할게요.

  • 13. lavenda
    '18.5.16 2:24 PM (175.197.xxx.124)

    힐링되는 좋은 글이네요.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 14. ^^
    '18.5.16 4:38 PM (211.36.xxx.194)

    후손들이 다 잘 될듯 합니다.
    할머니덕분에

  • 15. ㅇㅇㅇㅇ
    '18.5.16 9:48 PM (161.142.xxx.145)

    한편의 에세이 같아요
    진정한 양반가의 기품을 가지셨던 분인것 같아요

    그리고...
    글 중에 유물이 아니고 유품이 맞는 표현일듯해요
    원글님 외국에서 자라신듯해서 알려드리면 좋을것 같아서...

  • 16. 익명1
    '18.5.16 10:33 PM (180.69.xxx.24)

    zㅋㅋㅋ 유물 발굴할 뻔 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으니 남겨둘게요

    유물-->유품

  • 17. 참..
    '18.5.17 2:20 AM (121.191.xxx.194)

    할머니께서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네요.
    저도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811752 북한회담취소 74 2018/05/16 18,953
811751 돈 아끼라는 엄머말에 화가 확 올라와서... 25 .... 2018/05/16 7,403
811750 딸아이와 남편과의 갈등 고민입니다. 6 노다웃 2018/05/16 2,560
811749 읍읍이 채팅창 1초만에 강퇴된 사연(폭소) 33 런재명 2018/05/16 4,453
811748 옷이 넘없어요, 요즘 롱셔츠 오픈해서 입기도하고 소개소개소개제발.. 10 ar 2018/05/16 3,205
811747 중고생들 하교후 잠깐씩 자는 애들 있나요. 11 . 2018/05/16 2,946
811746 요즘 무슨 과자가 젤 맛있으세요? 21 과자 2018/05/16 4,260
811745 1학년 수학(뺄셈) 어떻게 설명할지 팁좀 부탁드려요 4 2018/05/16 1,020
811744 작년 대학진학률이 68.9%밖에 안되네요. 4 .. 2018/05/16 2,799
811743 경복궁은 뭔죄... 4 아이고배야 2018/05/16 1,940
811742 채팅창 보고픈 분만... 8 혐짤포함 2018/05/16 2,366
811741 요즘 4도어 냉장고 쓰기 편한가요 13 ... 2018/05/16 4,097
811740 30대후반) 저한테도 맞는 패션 조언 좀 해주세요 7 패션고자 2018/05/16 2,291
811739 갑상선수술 흉터 완화하는 방법없을까요? 8 모모 2018/05/16 1,865
811738 문무일 권성동 뉴스에 나왔나요? 4 ㅇㅇ 2018/05/16 899
811737 바이오주 주식 가격 널뛰는데 다른 주식은 그렇지 않죠? 8 주식 2018/05/16 2,631
811736 집에서 꼬랑내가 나는것같아요. 8 냄새빼는법 2018/05/16 5,752
811735 근데 문대림은 원희룡에 비해 너무 쳐지네요 12 제주도 2018/05/16 2,195
811734 조지아 여행 다녀오신분 7 행복 2018/05/16 2,523
811733 인생이 욕심에 눈이어두워서 3 고통 2018/05/16 1,778
811732 예쁘다고 의사가 잘해주는건 아니죠? 33 2018/05/16 11,500
811731 홍합이 좀 생겼어요? 3 홍합 2018/05/16 823
811730 엄마한테 돈효도한거 후회되요 28 후회 2018/05/16 16,420
811729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재밌게 보신 분들, 17 영화 2018/05/16 3,361
811728 온라인에서 저렴한가격으로 구매하고싶은 상품 꼬꼬댁 2018/05/16 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