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할머니의 가난하지만 사랑충만했던 일생을 보며

익명1 조회수 : 4,221
작성일 : 2018-05-16 10:12:46

할머니가 95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셨어요.

저도 장례식장에 갔었죠.


할머니는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이었고

한국에서는 성수동 골목의 작은 집(화장실도 밖에 있는)에 혼자 사셨는데

늘 웃고 계시고

손주들 가면 뭐 하나라도  더 해먹이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분이었어요

음식도 잘하시고

공원 나가서 친구들과 운동하시며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던 모습이 기억나요

기독교 신자셨는데 365일 새벽기도를 다니셔서

볼이 찬바람에 홍조가 있을 정도였고

자다 깨서 할머니 보면 늘 엎드려서 기도하고 계셨어요

작은 일에 기뻐하고 웃으시고

없는 돈 모아서 아들이랑 손주들 주시고

광고지 하나, 볼펜심 하나 허투르 쓰시지 않으셨죠.

그러면서도 얼마나 멋장이신지..곱게 하고 다니셨어요.


할머니랑 놀 때 할머니가 보자기를 솜씨 좋게 접어서 쥐도 만들어서 슝~ 날려주시고

(아직도 신기함 손바닥위에서 슉 하고 움직임)

우리가 티비를 보든 하루종일 만화방에서 살든

늘 아무 잔소리 없이 먹을 것만 챙겨주시고 그러셨어요

덕분에 할머니 댁 며칠 가 있으면 힐링 되는 기분이었어요

우리 첫애가 말도 못하게 낯을 가리는 아이였는데

1-2살 무렵 할머니(제 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죠)와 처음 만났을 때 한번에 안다가가시고

옆에 툭 앉아서 딴데 보며

장난감 하나씩 아이쪽으로 쓰윽 밀어넣으시다가

서서히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니

어느새 아이도 할머니랑 놀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거든요.전무후무해요.


미국에서 한 30년 가까이 노년 보내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거기서도 늘 운동하시고 이웃들과 즐겁게 지내셨어요

끝에 10년 정도에는 노환으로 치매가 오셨는데

얼마나 얌전하신지...아들도 못알아보면서

제가 우리 아이들 데리고 갔더니

그 와중에도 애들보고 '누구지..아이 예쁘다 예쁘다' 하시고

치매인데도 해코지 한 번 없이 조용히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는 영상을 보았는데

심지어 유언이 '예뻐,, 졸려' 이더라고요.


저의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미울텐데도

저한테 전화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나는 (우리 아들 피눈물 나게 한 ) 너희 엄마 용서했다..하시더군요.


할머니가 남기신 낡은 성경 찬송가 두 권

싸구려 옥가락지 한 개.

유물은 그게 전부인데

할머니는 저에게 사랑을 남겨주셨어요.


미국에서 있었던 장례식장에서 작은 아빠가 하신 말씀

'어머니는 사랑이셨습니다'

아빠도 할머니에 대해 말씀하실 때

'천사같은 분'...


할머니는 성공한 인생을 사셨어요.



오늘 할머니 냄새가 그립네요...



IP : 180.69.xxx.24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8.5.16 10:18 AM (121.131.xxx.34)

    할머니 정말 성공한 인생을 사신분이시네요..

    이런 할머니를 두었다니..부럽네요
    그리운 분의 기억만으로도 읽는 사람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나도 그래야지..하고 있네요.

  • 2. ..
    '18.5.16 10:24 AM (112.222.xxx.94) - 삭제된댓글

    지혜로우신 분이셨네요
    삶과 사랑을 사랑하시고 충만하게 살다 가셨네요
    본받고 싶은 삶입니다

  • 3. ㅇㅇ
    '18.5.16 10:24 AM (59.30.xxx.248)

    천사셨네요.

  • 4. 오늘
    '18.5.16 10:28 AM (211.177.xxx.138)

    저의 친정엄마도 이북 분이신데 생활력 강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셨지요. 모든 손자 손녀를 다 진심으로 사랑하셔서 돌아가셨을 때 후손들이 애통해했어요.
    반면에 시어머니는 손자만 좋아하시고 이상하게 차별하셔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손녀들이 안봐요.윗글을 읽다보니 저희 친정엄마를 뵌듯합니다.

  • 5. 따뜻한
    '18.5.16 10:39 AM (122.32.xxx.131)

    영화 같네요
    저는 이런 글 읽으면 저도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을 주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프네요
    원글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좋은 할머니 두셔서요

  • 6. ㆍㆍ
    '18.5.16 10:39 AM (122.35.xxx.170)

    저도 그런 사랑 넘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ㅎ

  • 7. ..
    '18.5.16 10:44 AM (182.211.xxx.149)

    자손들에게 사랑이 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몸소 보여주고 떠나신 할머니
    이 아침 저에게도 울림을 주시네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런분이세요.
    한없이 맑고 착하신 분
    그 좋은 품성으로
    기도로
    본인보다 연로하신 성당분들 챙기시고..
    자식들한테도 언제나 좋은 말..
    맛있는 거 본인 형편껏 챙기시고

    가난하지만 맑고 정갈한 인생을 꾸리시는 시어머니.
    저에게도 그 분은 사랑입니다.

    원글님 덕에 저녁에 전화 드려야 겠어요.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그것도 부담 스러워 하시는 분이라..

  • 8. 준아
    '18.5.16 11:57 AM (203.145.xxx.46)

    그런 어른을 보고 자란 님도 전 부럽습니다

  • 9. 익명1
    '18.5.16 12:33 PM (180.69.xxx.24)

    네..맞아요
    저도 제 인생 중에 사랑을 베푸신 분이 있어서 감사해요
    할머니도 완벽한 분은 아니셨죠
    그러나, 그 분의 한 조각이 참 푸근하게 남아요
    저도 우리 아이들이 나를 기억할 때
    '조건없이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래요

  • 10. 쓸개코
    '18.5.16 12:53 PM (119.193.xxx.159)

    참 고운 글이에요. 원글님의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할머니에 대한 그런 추억들도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돌아가신 제 친할머니도 생각납니다.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항상 은비녀 하고 한복입고 계셨죠.
    같이 모시고 살았는데
    집에 젊은사람들 인사하러 찾아오면 인사만 받고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노친내 냄새 난다고.
    저희 엄마는 할머니 속옷을 빨아본 적이 없으시다네요.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맏기기 싫어 항상 새벽에 일어나 처리하셨대요.
    항상 말씀도 조용조용 곱게 하시던 할머니.. 보고 싶어요.

  • 11. 익명1
    '18.5.16 1:56 PM (180.69.xxx.24) - 삭제된댓글

    나이 들어갈수록 꼰대 되지 않도록 안테나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류에 젖어 가지는 않되 소통은 되도록..
    제일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느껴져요
    애정없는 지혜는 자꾸 증오를 부추기더라고요
    내가 옳고 남은 그른게 되니까..

  • 12. 오늘
    '18.5.16 2:09 PM (123.212.xxx.200)

    참 좋은 글이 많네요.
    원글님 할머니처럼 늙고 싶어요.노력할게요.

  • 13. lavenda
    '18.5.16 2:24 PM (175.197.xxx.124)

    힐링되는 좋은 글이네요.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 14. ^^
    '18.5.16 4:38 PM (211.36.xxx.194)

    후손들이 다 잘 될듯 합니다.
    할머니덕분에

  • 15. ㅇㅇㅇㅇ
    '18.5.16 9:48 PM (161.142.xxx.145)

    한편의 에세이 같아요
    진정한 양반가의 기품을 가지셨던 분인것 같아요

    그리고...
    글 중에 유물이 아니고 유품이 맞는 표현일듯해요
    원글님 외국에서 자라신듯해서 알려드리면 좋을것 같아서...

  • 16. 익명1
    '18.5.16 10:33 PM (180.69.xxx.24)

    zㅋㅋㅋ 유물 발굴할 뻔 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으니 남겨둘게요

    유물-->유품

  • 17. 참..
    '18.5.17 2:20 AM (121.191.xxx.194)

    할머니께서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네요.
    저도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853163 인터넷면세점 본인 여권, 비행기 티켓으로만 구입가능한가요? 2 ... 2018/09/10 1,465
853162 tvn 백일의 낭군님 꿀잼이네요. 15 ... 2018/09/10 5,617
853161 운전하다 막말 들으면 그냥 참으시나요? 9 .. 2018/09/10 2,081
853160 당근 거래하다가 제 명에 못 살겠습니다 18 ... 2018/09/10 6,915
853159 옷이 작아졌어요. ㅠㅠ 3 이게 웬일 2018/09/10 2,211
853158 다시 시작된 재미난 놀이 7 그땐 2018/09/10 1,288
853157 한양대 에리카요 27 투정 2018/09/10 18,382
853156 몸에 자꾸 쥐가 나요 5 순환 2018/09/10 3,137
853155 변호사비 얼마나 드나요? 6 ,,, 2018/09/10 2,680
853154 인터넷 쇼핑몰 구경하다가요 2 인터넷 2018/09/10 1,393
853153 1가구2주택 매도하는 텀을 1년 둬야 되는건가요? 4 궁금 2018/09/10 1,653
853152 핸드폰 감염? 2 바이러스 2018/09/10 921
853151 생수배달시켰는데 배송장이 안붙어있어요 3 바다 2018/09/10 1,467
853150 이건 꼭 봐야돼요 행복밭 2018/09/10 713
853149 강용석 2년 7 2년 2018/09/10 4,071
853148 4-5년전에 유행하던 팔찌 도움좀 부탁드립니다 2 옥사나 2018/09/10 2,647
853147 냉장고를 부탁해도 부부동반 나오나요? 3 양동근 2018/09/10 1,756
853146 치아교정 전에 사랑니 뽑아야 한다고 하는데요. 8 사랑니질문 2018/09/10 1,942
853145 퇴근후 청소정리 하는법 좀 9 싱글여자 2018/09/10 3,369
853144 시가에서 7시넘어 일어나는게 잘못인가요? 28 ㅡㅡ 2018/09/10 7,099
853143 항상 가난했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음을 뒤늦게 알고 오열한 88.. 9 대한민국 2018/09/10 4,392
853142 에버랜드 처음가요 팁좀부탁드려요 8 에버랜드 2018/09/10 1,555
853141 안찾는가? 못찾는가? 혜경궁 14 08혜경궁 2018/09/10 886
853140 조금전에 중2딸 이야기 삭제 하셨네요 5 아파트10억.. 2018/09/10 2,391
853139 직장에서 전임자가 부지런했다는 것도 꽤 피곤함 2 이런 젠장할.. 2018/09/10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