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01.04.10(화) 21:28
성폭력 실명공개 사회적 의미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30000/2001/04/0010300002001041021287...
1990년 미국의 동부에 있는 브라운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기초 도서관 화장실 벽에 “나는 A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이 쓰여져 있었다. 물론 화장실 관리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 낙서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곧 화장실 벽은 또 다른 낙서로 메워졌다. “나는 B에게” 또는 “C에게” 강간당했다는 낙서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떨 때는 30명 이상의 그 학교 남학생 이름으로 화장실 벽이 가득 채워지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실명공개 폭발의 현장이었던 셈이다(뉴욕타임스, 1990.11.18). 시작부터 논란거리였다. 이름이 오른 남학생들은 자기를 방어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죄인취급 당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당시 이 학교 여학생들도 학교의 성폭력 관계 정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지만 많은 혼란과 갈등을 낳았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또한 화장실 벽에다 자기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가해자 남학생의 이름을 쓰고 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상상으로도 처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 원초적인 느낌의 실명공개가 왜 발생했고, 관련 남학생들의 강력한 반발과 누가 딱히 옳다는 논쟁을 생산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참여자를 낳으면서 오래 지속되었냐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말이다.
성범죄에 관한 투쟁이 우리보다 오래된 미국에서도 강간 등의 성폭력은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범죄에 속한다. 둘만이 단 둘이 있을 때 대부분 일어나고, 가해자는 늘 적극적으로 부인한다. 게다가 타인이 아니라 아는 사람(한국이나 미국이나 성폭력은 대부분 아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에 의한 성폭력, 특히 데이트 강간의 경우 법정에서 화간이었음을 반박하며 이길 확률은 아주 적다. 모든 것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 법의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재판은 결국 가해자의 심판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심판장이 돼버린다. 이곳에서 심리치료를 하는 친구의 경험에 의하면, 피해자가 재판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과 자기 혐오감이 증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는 고소를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피해자들의 풀길 없는 상처에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대부분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행한다. 성폭력은 그 가해자의 여성관의 표현이고 그 사람의 습관화된 일상적 문화코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형을 살고 나온 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다시 범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현실에 입각해서 만든 법이 있다. `매건 법'이라고 해서 그 고장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성폭력 가해자의 명단을 공개하여 주변 여성들이나 아이들을 조심시키는 법이 있다. 이미 죗값을 치른 가해자에 대한 인권침해라는 논란이 많지만 반복성이 짙은 범죄라는 특수성을 인정받아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통과되었다. 성폭력 특히 강간죄로 확정되어 높은 형을 산 뒤에도 재범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무죄로 처리되거나 아예 거론도 되지 않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반복적으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현실의 답답함을 절박하게 대변하는 것이 가해자 실명공개이다. 어떤 제도적 보호책도 감당하지 못했던 그 간극을 피해여성들이 스스로 메꾸었던 것이다. 어쨌든 브라운 대학은 그 뒤로 가장 선진적인 성폭력 정책을 이끌어 나갔다.
최근 한국방송공사(KBS) 노조 부위원장은 성폭행 사실을 밝힌 피해자 두명과 그를 실명보도한 동아닷컴 기자, 그의 행위사실을 실명과 함께 공개한 여성백인위 관계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들었다. 실정법상으로도 피해자나 백인위가 당당하게 다투어볼만한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다툼과 함께 과연 우리 사회에서 상처투성이로만 보여지고 있는 실명공개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기회도 같이 가졌으면 한다.
권인숙/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 교수·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