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다가온다.
오랜만에 집 유선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의 대부분이 태양열설치 권유전화거나 건강검진 안내같은 광고안내지만 그래도 혹 몰라 걸려 오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가느다란 목소리는 시어머님의 목소리다. 올해 아흔이 되셨다.
'나다.'
시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신분을 밝힌다.
'예, 어머니, 잘계시지요? 건강은 어떠세요?'
숨차게 어머님의 안부를 되물으며 나는 죄스러운 마음을 감춘다.
'많이 춥지?'
'네, 엄청 추워요.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겠어요.'
나는 수다스러워진다. 며느리 노릇을 하지 못함을 수다로 경감시켜보겠다는 속내이다.
'어디 아픈데는 없지?'
시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며느리인 나의 건강을 확인한다. 아들인 남편보다 며느리인 내 건강을 염려하는 시어머님의 관심이 가끔은 부담스러울때도 있다.
시어머님은 당신의 친구인 우리 옆집 할머니께 전화를 걸면 당신 며느리 좀 잘 보살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고 옆집 할머니가 내게 하소연을 한다.
'낼 모레 저승갈 내가 걔들을 돌봐야겠냐, 젊은 걔들이 늙은 나를 돌봐야겠냐?' 고 옆집 할머니는 시어머니께 되물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은 우리집에서 1시간거리의 큰 아들네에서 살고 계신다.
여기 이 집에서 우리와 살다 큰 아들네로 거처를 옮긴지 3년이 되어간다.
시어머니가 형님네로 가시고 나는 많이 편해졌다. 자유로와졌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다.
시어머니는 만날때마다 며느리인 나를 얼싸안고 눈물바람을 하신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하거나 한 건 아니다.
형님이나 시숙님의 부모 공경을 나를 따라갈 수가 없다. 솔직히 나는 시어머니와 같은 건물에서 살았을 뿐 모시고 산건 아니다. 그저 동거인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님이 떠나고 나서 많이 반성하고 잘 못해드린것에 대한 회한도 많았었다.
좀 살갑게 대해 드릴걸, 조금만 더 신경 써 드릴걸, 걸, 걸, 하는 후회가 많이 남기도 했다.
나는 형님네가 시어머님을 공경하는 것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자주 찾아가봐야 하는데 살다보니 그게 또 쉽지 않다.전화 통화도 요즘은 거의 하지 못하고 지냈다. 점점 시어머님의 존재가 내 기억속에서 지워지고 있는것 같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 듯 시어머님이 먼저 전화를 하신것이다.
할 말은 없다. 옆집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신 것, 또 이웃의 누구네 어머님이 요양원으로 가신 것, 등등
그런 수다로 통화를 마친다.
'명절에 봬요.'
그것으로 시어머니의 셀프 며느리 도리와 시어머니의 도리가 충족되었다.
명절이 다가오니 문득 일상이 감사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