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절 행사는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는 자리였다. 중국은 동·남중국해의 긴장을 키워 주변국의 반발을 사고 있던 참이었다. 미국·일본을 비롯한 서방 정상들은 불참하거나 주중대사를 보냈다. 시진핑은 민주주의 국가 정상으로선 유일하게 참석한 박근혜와 별도 오찬까지 할 정도로 극진히 챙겼다. 박근혜의 행사참석은 이미 공개된 일정이어서 예상은 됐지만 박근혜와 시진핑, 푸틴이 한 앵글에 담긴 장면이 지나치게 인상적이었던 것이 파장을 더 키웠다. 미국·일본에선 ‘청팀인 줄 알았더니 홍팀이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의구심이 부풀었다.
거기까지였다. 코스의 꼭짓점에 올라선 롤러코스터는 이내 급경사의 역코스를 질주했다. 한 달 뒤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 파트너”라고 했다.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동참하겠다는 이 선언으로 ‘박근혜판 균형외교’는 막을 내렸다. “천년이 가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바뀌지 않는다”며 강경일변도였던 대일태도는 힘이 빠져 그해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합의해 버린다. 이듬해 초 북한이 네번째 핵실험에 나서자 시진핑이 3차례나 공개 반대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전격 결정한다. 이만저만 널을 뛴 게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가 헝클어놓은 대외관계 위에서 출발했다. 널뛰기 값은 애꿎은 한국 기업들과 명동 상인들이 갚아야 했다.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국은 대국답지 않은 뒤끝을 부렸다. 대통령은 ‘혼밥’을 해야 했고, 기자들은 폭행당했다. 그럼에도 결국 사드는 배치된 상태를 물리지 않은 채 ‘봉인’됐고, 경제보복 조치는 풀렸다.
보수세력들은 뺄셈외교에 외교참사라고 비판하지만 이번 방중으로 대중 관계가 톈안먼 망루에 오르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디딤돌이 놓인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보다 못한 공항영접을 받았다고 개탄하는 이들은 중국이 최고권력의 체면을 구긴 사드문제를 뜻대로 풀지 못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에게 자금성이라도 내주길 기대했던 건가. 중국의 몽니는 앙금을 소진하는 프로세스였다.
문 대통령의 방중을 두고 ‘중국 경사론’이라고 비판하는 보수세력들 중 상당수는 박근혜가 망루에 올랐을 때 ‘한국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찬사를 보낸 이들이다. 이 모든 일이 망루에서 비롯됐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는 걸까, 모른 체하는 걸까. 망루외교가 남긴 숙제는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다. 졸속으로 이뤄진 일본군 위안부 합의다. 이 역시 사드만큼 어려운 문제다.
남북분단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한국에서 외교하기란 쉽지 않다. 전통적 동맹국인 미국과 세계 패권으로 부상하는 중국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지 않으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한·중관계와 한·미·일을 대립항으로 만들면 실패한다. 박근혜의 망루외교가 남긴 값비싼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