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늘어지게 게으름 피우다가 점심먹고 집옆 천변에 산책이나 살짝 다녀올까 하고 이불속에서 미적미적 하고 있었어요.
하필 알쓸신잡 재방송까지 하고 있으니 일요일 아침 모든 박자가 다 갖춰져서 배고픈 것도 참고 오랫만에 한껏 게으르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톡이 띵똥...
선배언니가 안산에 가잡니다.
최근에 안산 기슭으로 이사하신 분이거든요.
전 하필 전날 운동 같이 하는 분이랑 의도하지않게 수다떨다 새벽 두시나 되어서 들어온지라 멀리 안산까지 가는게 살짝 귀찮아져서 그냥 점심이나 같이 하시자고 했어요.
뭘 먹을까 하다가 촌스럽게 토속촌 삼계탕이나 드시죠 낙찰...
한여름 삼복 중에도 안 먹은 삼계탕 먹으러 부시럭거리며 일어나 준비했어요.
빨래 한판 돌려놓고, 대충 치우고 샤워하고 시간이 모자라 화장은 생략...
남자만나러 가는게 아니고, 오랜 친분을 가진 선배언니니까 이해해 주시리라...
아시다시피 토속촌이 외국인 관광객 때문에 점심시간에 가면 한시간은 줄서야 해서 일찌감치 11시 반쯤 브런치로 먹기로 해서 게으름 피우다 후다닥 뛰쳐나왔습니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해서 줄서지 않고 삼계탕 먹고 차나 한잔 마시러 서촌을 어슬렁거렸어요.
제가 서촌에 처음 오고 가던 시절에는 정말 소박한 주택가였거든요.
한옥이라고는 해도 전통 한옥이라기 보담은 소위 집장사 집이라던 뭐 그런 서민주택들이 골목마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래도 나름 배화여전이라는 여학교가 있어서 소문나지 않은 쬐깐한 맛있는 식당들, 분위기있는 까페가 숨어있던 동네였는데, 이제 삼청동, 북촌을 넘어 경복궁까지 넘어서 서촌까지 그 묘한 퓨전의 분위기가 점령한 동네가 되어버렸더군요.
이런 변화가 별로 좋게 느껴지지가 않는 걸로 봐선 나도 이제 나이먹은 꼰대가 되어가나 싶기도 했구요.
그래도 나름 신세대 핫한 언니처럼 보이려고 디저트만큼은 최고 힙한 곳으로 찾아갔죠.
부암동 영국식 케익가게 스코프가 서촌에 2층짜리 카페를 차렸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로 갔어요.
진한 브라우니에 커피 한잔, 한옥집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수다를 즐기는 재미가 남달랐어요.
모시고 간 선배님도 흡족해하셨구요.
한참을 떠들다가 나와보니 구름처럼 사람들이 줄을 섰더라는...
골목 안에 찾기 힘든 곳에 위치했는데도 어쩜 그렇게 많이들 잘도 찾아오는지...
최근에 수요미식회에 등장해서인지 사람도 많고 사진찍는 젊은 친구들도 많고...
또 어슬렁 어슬렁 광화문 뒷골목으로 산책하며 떠들면서 교보문고까지 내려와서 책도 한권 사고 또 떠들다가 종로까지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어요.
요즘 핫하다는 디타워에 들어가서 커피나 한잔 마실까 했더니 마음에 들지 않아 종로까지 내려간 거거든요.
언니가 반쥴 가볼까 하더라구요.
반쥴?
저 대학교때 한번 가본 곳인데 그게 아직도 있다구요?
없어졌다 다시 최근에 생겼다더군요.
거참.... 언제적 반쥴이냐....
물론 새로 단장해서 옛날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앉아있는 객들의 평균 연령이... ㅎㅎㅎ
그 와중에도 우리 둘이 최고령인 것 같다며 쓴 웃음...
날씨가 추워서 언니는 뱅쇼 한잔, 저는 로즈힙 차 한잔 마시고 다시 수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목적없이 떠들고 배회하고 먹고 마시고 이런 적이 대학 초년생 이후에 처음이지 않았나 싶었어요.
대화의 내용은 가까운 선배의 항암 투병기, 혹은 갑자기 자다가 급사한 선배 이야기같이 나이에 걸맞는(?) 우울하고 슬프고 짠한 것들도 있었지만, 오랫만에 서울 관광객처럼, 대학 1학년 어린이처럼 광화문, 종로를 그때 그시절 다녔던 곳들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나이도 한 30년쯤 젊어진 느낌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제대로 멍때리는 게 필요하다는 것과 비슷하게, 목적도 없이 이렇게 배회하며 옛날 어린시절처럼 아무말 대잔치 수다를 떨어보니 꼭 해야하는 일로 꽉찬 일상에 잠깐 숨통을 트여주는 일 같네요.
대개 이런 때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오곤 했는데 어제의 추억산책은 그 시간의 몇배나 휴식을 선사한 느낌...
다 좋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갈아타다 반대방향으로 가서 다섯 정거장이나 가다가 허겁지겁 다시 거꾸로 바꿔타고 온 건 안 비밀... ㅠㅠ
아무리 마음이 젊어진 느낌이라도 뇌와 몸은 내 나이 그대로라는 걸 잊지 말라는 경고였던 듯...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