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때, 여성운동계 일각에서 박근혜 지지론을 주장했다. 남성 대통령으로는 여권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여성으로서는 우리 헌정 사상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박근혜를 지지하자는 것.
그 주장은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으며, 여성운동계 내부에서도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박근혜는 치마만 둘렀을 뿐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나 역시 박근혜 지지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5년이 지난 지금, 난 내가 틀렸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여전히 유력한
대선 후보 중 하나인 박근혜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중이다. 그가 나름대로 괜찮은 후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몇 개만 말해본다.
첫째, 박근혜는 여자다. 설령 그가 ‘치마만 두른 남성’이라 할지라도 그의 염색체는 엑스와이(XY)가 아닌 엑스엑스(XX)다. 이게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여성 대통령이 한 명도 없었다. 권력기구에 여성들이 참여한 비율인 여성권한 척도는 70개국 중 63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그간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가 이 시대의 과제라면 대통령 자리에 여성을 당선시키는 것만큼 시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둘째, 박근혜는 여자다. 현 대통령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개혁성’만큼 믿지 못할 건 세상에 없다는 거다. 난 더는 개혁적이라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보수 정치인끼리 정권을 주고받는 한 우리 사회는 바뀌지 않으며, 우리네 삶은 계속 비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진보세력이 아직 집권할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래서 이번에도 보수 정치인 중에서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면, 여성에게 표를 던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개혁성은 얼마든 변할 수 있지만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건 불변의 사실이니 말이다.
셋째, 박근혜는 여자다. 오랜 세월 여성들은 남자보다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지금 국회로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을 보건대,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능력이 아닌 기회였다. 소꿉놀이를 할 때 의사가 늘 남성들 차지였던 관례가 깨진 게 여성 의사의 비율이 늘어난 덕분이듯,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여성에 대한 온갖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이리라. 그래도 여성 하면 불안한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분들께 말씀드린다. 지금까지 대통령을 해먹은 남성들이 특별히 잘한 게 없다는 걸 인정하신다면, 이젠 여성에게 기회를 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의 저자 조선희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운동도 결국 권력을 나누자는 운동이다. 우리도 권력 좀 가져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여성운동은 여자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11년이나 집권한 대처 총리가 보수당 출신 매파고, 여성 같은 소외집단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해도, 그가 총리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국인들에게 여성 해방에 관한 교과서 10권씩을 읽는 효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이번주 월요일,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 박근혜가 특강을 왔다. 여러 가지를 고려 중인 후보를 눈앞에서 볼 기회였지만 가진 않았다. 솔직히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게는 그저, 박근혜가 여자란 사실이 중요하니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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