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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이 엄마에 대해 쓴 글

펌글 조회수 : 6,266
작성일 : 2017-08-20 16:34:31
월간 샘터 2003년 2월호에 실린 글.







엄마 - 김어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총수)



고등학생이 되서야 알았다. 다른 집에선 계란 프라이를 그렇게 해서 먹는다는 것을.



어느날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다.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 수만큼 계란도 딱 세 개만 프라이되어 나온 것이다. 순간 '장난하나?' 생각했다. 속으로 어이없어 하며 옆 친구에게 따지려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놀리는 친구의 옆모습을 보고 깨닫고 말았다. 남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난 다른 집들도 계란 프라이를 했다 하면, 4인가족 기준으로 한 판씩은 해서 먹는 줄 알았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손이 컸다. 과자는 봉지가 아니라 박스째로 사왔고, 콜라는 병콜라가 아니라 PET병 박스였으며, 삼계탕을 했다 하면 노란 찜통 - 그렇다, 냄비가 아니라 찜통이다. - 에 한번에 닭을 열댓 마리는 삶아 식구들이 먹고, 친구들까지 불러 먹이고, 저녁에 동네 순찰도는 방범들까지 불러 먹이곤 했다.



엄마는 또 힘이 장사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온 집안의 가구들이 완전 재배치 되어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구 배치가 지겹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그 즉시 결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으니 작은 책상이나 액자 따위를 옮겼나보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사할 때나 옮기는 장롱이나 침대 같은 가구가 이방에서 저방으로 끌려 다녔으니까. 오줌이 마려워 부스스 일어났다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목장갑을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가구를 혼자 옮기고 있는 '잠옷바람의 아줌마가 연출하는 어스름한 새벽녘 퍼포먼스'의 기괴함은 목격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새벽 세 시 느닷없이 깨워진 후, 팬티만 입은 채 장롱 한 면을 보듬어 안고 한 달 전 떠나왔던 바로 그 자리로 장롱을 네번째 원상복귀 시킬 때 겪는 반수면 상태에서의 황당함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재수를 하고도 대학에 떨어진 후 난생 처음 화장실에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짝을 아예 뜯어내고 들어온 것도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낼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낙방하고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좌절하여 화장실로 도피한 아들, 그 아들에게 할 말이 있자 엄마는 문짝을 부순 것이다. 문짝 부수는 아버지는 봤어도 엄마가 그랬다는 말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듣지 못했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친척어른들을 항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벌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고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고 당차고 강철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삼십 중반을 넘어섰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못한다. 단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 뜯고 들어와 다음 번에 잘 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치던 엄마, 사실은 바로 그런 엄마 덕분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던 그 어떤 종류의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오늘의 내가 있음을 문득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말을 못한다.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엄마의 휠체어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사신거냐'고 물어보고 싶은게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IP : 116.44.xxx.84
2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ㅇㅇ
    '17.8.20 4:39 PM (175.223.xxx.233)

    감동이 있는 글이네요.
    김어준씨 어머님은 지금도 투병중이신가요?

  • 2. 그 엄마에
    '17.8.20 4:40 PM (1.225.xxx.199)

    그 아들이네요.
    기슴 넓은 어머니가 우리 주니를 저렇게 키워 주셨군요. 멋진 엄마!

  • 3. cc
    '17.8.20 4:43 PM (211.36.xxx.71)

    어머니 그릇이 아들 그릇을 만들죠

  • 4. 채식하자 털보야~!
    '17.8.20 4:50 PM (118.218.xxx.190)

    허 허 웃으면 예리하게 집어 내는 털보
    끝까지 건강하길...

  • 5. 총수는
    '17.8.20 4:58 PM (118.42.xxx.65) - 삭제된댓글

    훌륭한 엄마가 계싲는구나

  • 6. 평전
    '17.8.20 4:59 PM (175.223.xxx.112) - 삭제된댓글

    김어준 평전에서 들었던 내용을 글로 보니 또 새롭네요

  • 7.
    '17.8.20 4:59 PM (119.69.xxx.101)

    이런글 볼때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인가, 반성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문짝 뜯어내고 들어와 그깟 대학이 뭐냐고, 난 널 이렇게 키우지않았다고 말하는 엄마.
    시험 망쳐 우는 아이에게 속으로 화를 삭이며 괜찮아, 담에 잘 보면 되지 라고 말하는게 최선인, 화를 내는 대신 이렇게 위로해주면 담엔 더 잘 보겠지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엄마.. 우리 아이들은 어떤 엄마로 저를 기억해줄지, 또 어떤 성인으로 자라게될지를 상상해보니 끔찍하네요

  • 8. ㄹㄹ
    '17.8.20 4:59 PM (175.223.xxx.131)

    저는 읽는데 왜 왜 눈물이 나죠ㅠㅠㅠㅠ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털보가 될 수는 없겠군요
    노력이 아니고 거의 갖고 태어난거였어

    역시 그릇이 큰 엄마가 자식 큰 사람을 만드네요

    예전에는 훌륭한 사람 뒤에 꼭 부모님을 소개하는걸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갑니다.

    백퍼센트는 아니겠지만
    자식그릇은 인성은 .. 부모그릇 따라간다는 것을..

    정말 부럽고 부럽네요
    부모복이 최고였여

  • 9. O1O
    '17.8.20 5:00 PM (14.43.xxx.177)

    어머님이 대장부 이시네요.
    아들 잘 키우셨네요.

  • 10. ***
    '17.8.20 5:02 PM (175.223.xxx.79)

    지금 부모님 두분다 많이 편찮으셔서
    주말에 간병하고 온다는 김용민pd의
    트위터 글이 있었어요.
    두분 쾌차하시길 빕니다

  • 11. 여동생이
    '17.8.20 5:04 PM (79.213.xxx.62)

    몇년 전에 죽었다고 총수가 말하던데, 저 소란이란 분인가요? ㅠㅠ
    총수 힘내!

  • 12. ...
    '17.8.20 5:21 PM (218.236.xxx.162)

    김어준 총수 어머님도 멋진 분이시네요
    총수도 부모님도 힘내세요 !

  • 13. 눈물나네요
    '17.8.20 5:29 PM (125.178.xxx.85)

    멋진 어머님이 역시 아들을 멋지게 키우셨군요

  • 14. 양이
    '17.8.20 5:40 PM (59.6.xxx.219) - 삭제된댓글

    어준총수 어쩐지 진짜 특별한 사람이다 했더니 그런 엄마가 계셨군요..기적처럼 쾌차하시면 좋겠네요..

  • 15. 역시
    '17.8.20 6:06 PM (118.42.xxx.167) - 삭제된댓글

    김어준 뒤에 큰 나무가 있었군요.
    갑자기 제가 너무 부끄러워지네요.

  • 16. 어준총수
    '17.8.20 6:37 PM (59.5.xxx.186)

    힘내요!!
    부모님께서도 차도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17. 김어준평전
    '17.8.20 6:45 PM (124.50.xxx.91)

    김어준이 결혼한다고 말씀드렸을때 부모님 반응이 누구냐가 아니라 언제냐..였고
    이혼한 후 몇년이나 지난 후에나 안부물어서 이혼한 사실을 아셨다고..

    김어준 평전중에 젤 기억남는건

    아마도 아주 가까운분의 장례식때
    목사님이 슬퍼하지말라고 왜 좋은데 갔을텐데 우냐며 기뻐하라고 가족들에게 나름의 위로라고 하니깐
    총수가 목사 귀에 대고 "사람이 죽었는데 기뻐하라고?이 씨발놈아"라고 했다네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보면 역시 범상치않은 인물이예요

  • 18. 행복하다지금
    '17.8.20 11:20 PM (99.246.xxx.140)

    김어준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어쩌면 저렇게 컴플랙스가 없을까 싶었는데
    (한국은 제 경험으론 서울대 의대 나와도 심한 콤플랙스 가지고 사는 극심한 비교, 경쟁사회예요)
    저런 어머니가 키우셔서 그렇군요.
    그 어머님 그렇게 키운 아들이 이렇게 당당히 사는걸 보시며 말은 못하셔도 얼마나 뿌듯하실가요..

  • 19. 와우!
    '17.8.21 7:26 AM (82.41.xxx.153)

    저런 분을 어머니로 두셨기에 저런 큰 인물이 나왔군요. 부모님의 살아오신 모습이 그대로 자식에게 투영되는 것 같아요. 특히 몸으로 보여주는 어머니의 교육이...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자존감 강하고 당당한 자유의 영혼을 지닌 사람 결국 그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었네요.

  • 20. phua
    '17.8.21 11:04 AM (175.117.xxx.62)

    몇 번 읽었는데도 또 감동 먹는 울 총수 어머니 이야기..

    총수 어머님..
    얼렁 일어 나세요, 총수가 진행하는 라디오가
    청취율 2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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