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36.5] 따뜻한 개천으로 내려오든가

그 입 다물라 조회수 : 868
작성일 : 2017-08-02 21:59:46
내가 사는 서울 동작구의 작은 보습학원 앞에는 몇 년째 똑같은 현수막 하나가 내걸려 있다. ‘축! ○○고 ○○○양 서울대 ○○과 합격.’ 굳이 분류하자면 하위권 학과에 해당하지만, 최초의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한 동네학원 원장님의 벅찬 보람과 긍지가 자간마다 흘러 넘친다. 출퇴근길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삐져나오며 혼잣말을 다 중얼거릴 정도. ‘○○아, 공부는 잘하고 있니?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 한국사회의 역군이 되어다오. 강남 금수저들한테 기죽지 말고.’ 남들은 저런 플래카드가 눈꼴사납다지만, 나는 볼 때마다 대치동에 가지 않은 ○○양과 그 부모님, 학원 원장님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다. 학군 안 좋은 평준화 지역 일반고에서 동네학원에 다니며 이룬 저 성취가 더 없이 대견하다.

어떤 반론들이 나올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울대 입학이 성취의 잣대가 되는 구시대적 학벌 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 교육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보는 저렴한 사고방식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개천에서 용 나기보다는 살 만한 개천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등등. 말인즉슨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발화(發話)라는 행위는 그 내용보다 형식, 주체, 시점, 상황이 더 많은 정보를 발신한다. 누가 저 말을 하는가. 왜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학교수들이며, 거개가 서울대를 나왔고, 자기 자식을 특목고와 로스쿨, 의전원에 보낸 사람들인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사람들 중 개천 출신을 본 일이 없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 뒤엔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용이 되고 말았네. 미안~’이 생략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악의적 생각마저 든다.

교육은 역사상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그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하면 옳지 않으나, 그리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왜 교육만이 성공의 사다리인가, 교육 말고도 개천에서 강으로 거슬러 오를 더 많은 사다리들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지, 교육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며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과 그 자식은 이미 올라온 사다리. 개천용 반대론자들에겐 개천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는 논리적 전망만 승할 뿐 현재를 지배하는 가난의 울분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내가 하는 사교육은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주려는 고상한 욕망이고, 네가 하는 사교육은 신분상승에 목을 건 저렴한 욕망이 된다.

내 주제에 이만하면 용이지 생각하는 나로서는 개천에서 아등바등 기어올라 여기라도 와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곳은 살기가 이토록 좋구나. 내 가족, 친구, 친척, 이웃들도 다 건너오면 좋겠다, 나만 건너와 슬프고 미안하고 외롭다, 교육 말고 다른 방편으로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개천용들은 쉽게 개천을 저버린다고 ‘내추럴 본 드래곤’들은 함부로 말하지만, 떠나 돌아오지 않을지언정 한 명이라도 더 위로 올려 보내고 싶은 게 개천의 애틋한 마음이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 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 데 힘을 쏟자!” 몇 해 전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던 어느 유명인사의 문장들이다.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올라오지 말라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니라면, 개천용을 더 이상 꿈꾸지 말라는 말을 아직은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히 그 말을 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먼저 아이들 손 꼭 잡고 개천으로 내려오라. 아직은 개천이 따뜻하지 않아 올 수 없다면, 그 입 다물라.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469&aid=0000223174

박선영 차장대우 aurevoir@hankookilbo.com

IP : 223.62.xxx.184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개천피래미
    '17.8.2 10:12 PM (219.251.xxx.5)

    쓸쓸한 기사..
    잘읽었습니다, 행복님 ㅠ

  • 2. ...
    '17.8.2 11:05 PM (39.120.xxx.165)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지만
    미안 나랑 내 자식은 이미 용이야

    너희들은 개천에서 아웅다웅 고만고만하게 만족해라

  • 3.
    '17.8.2 11:42 PM (61.74.xxx.196) - 삭제된댓글

    개천이야기는 ㅈㄱ이 한 말인가요?
    특목고. 로스쿨. 의전.....
    영재학교.....
    개돼지들은 범접해서 안되는곳들인가 봅니다.

  • 4.
    '17.8.2 11:45 PM (61.74.xxx.196)

    개천이야기는 ㅈㄱ이 한 말인가요?
    특목고. 로스쿨. 의전...
    영재학교...
    개돼지의 자식들은 범접할 수 없는곳인가 봅니다.

  • 5. .....
    '17.8.2 11:51 PM (220.71.xxx.152)

    조국도 하고 서천석도 했죠
    추천이 있다면 누르고 싶은 글이예요

    그들은 선민의식이 있나봐요

  • 6. ...
    '17.8.3 4:52 AM (50.67.xxx.52) - 삭제된댓글

    선민의식이 아니죠.. 한국을 바꾸고 싶은 거죠..
    기존 사고 방식에 맞춰 살던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아 반대하는 거구요..

  • 7. 퇴화?
    '17.8.3 12:56 PM (223.62.xxx.246) - 삭제된댓글

    음서제를 개선한게 과거제 아닌가요?
    한국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요.

    머 딱히 진보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진보인척~~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749625 상심실성 빈백으로 시술 받으신 분 계신가요? 1 조언 2017/11/19 1,098
749624 세월호 미수습자 장례식장에 보이지 않는 ‘안철수 조화’… 왜? 11 .... 2017/11/19 3,739
749623 다큐프라임 행복의 조건. 교육 소나무 2017/11/19 1,450
749622 나쓰메 쇼세키 마음 읽으신 분들만, 안 읽으신 분은 이 글 읽지.. 3 아랑 2017/11/19 2,036
749621 궁금해서요 7 123 2017/11/19 1,478
749620 예산 쌍송국수? 인가 대를 이어 하는 국수집 국수 맛이 어때요?.. 4 국수집 2017/11/19 2,651
749619 한샘 피해 여성은 왜 성폭행 이후 'ㅎㅎ' 카톡을 보냈나 1 .. 2017/11/19 2,654
749618 알로보7번가도미노 어디걸 먹을까요? 4 결정장애 2017/11/19 1,022
749617 인천공항공사에 무슨 일이?..친·인척 못 넣으면 바보 17 샬랄라 2017/11/19 4,849
749616 핸디 청소기 사려는데요 1 모모 2017/11/19 1,114
749615 가장 쓸데없는 가전이 스타일러인거 같아요 121 왕비추 2017/11/19 38,306
749614 전자렌지안에서 접시가 깨졌어요 5 왜? 2017/11/19 2,066
749613 화장실에 최대 몇m 두루마리화장지를 쓸 수 있을까요? 3 화장지 2017/11/19 1,066
749612 피피티 발표자료 만들기 6 캔두 2017/11/19 1,493
749611 어릴 때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닌 애들은 뭐가 다른가요? 37 부모가 2017/11/19 13,522
749610 세제없이 설거지 가능하다면요... 3 알고싶어요... 2017/11/19 1,666
749609 롱패딩대란이 지디때문이란게 말이 되요?? 9 .. 2017/11/19 3,097
749608 저 지금 싱가폴인데요 15 피곤하다 ㅜ.. 2017/11/19 6,562
749607 경동시장? 청량리 도매?시장 5 궁금 2017/11/19 1,839
749606 초등 고학년 남자아이 부츠신나요? 6 2017/11/19 990
749605 이 하얀 소스 뭘까요? 넘 맛있어 보여요 6 ㅇㅇ 2017/11/19 2,739
749604 지금 이시간에 과탄산소다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 3 dddd 2017/11/19 1,796
749603 지금 입시 개정은 어떻게 되가고 있죠 1 답답 2017/11/19 773
749602 아파트 주차스티커에 동.호수까지 적혀있는거 맞나요? 12 dd 2017/11/19 5,832
749601 열흘에 베르겐 오슬로 스톡홀름 말뭬 4 10 2017/11/19 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