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있었던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숫자는 바로 48.7이다. 프랑스는 5공화국 출범(1958) 이후, 최악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지난 5월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도 전체 유권자의 1/3은 결선투표에 오른 두 후보 마크롱, 르펜을 모두 거부하는 백지 혹은 기권을 선택했던 바 있다. 이 기록적으로 낮은 투표율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무너져 내릴듯한 불신, 무기력함이다.
마크롱은 대통령 당선 직후,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행정 명령으로 자신의 첫 과제인 노동법 개악을 진행할 것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의회가 어떻게 구성되더라도, 나는 내 갈 길을 가리란 선언이다. 마크롱이 전통적인 좌우 정당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이 대목에서 실망스러운 점은 프랑스인들이 당장 저항하기보다 차갑게 외면하기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마크롱은 노골적으로 기업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노동자와 노조를 적대하는 인물이다. 그가 경제부 장관이던 시절 발의했던 법안, 일명 마크롱법은, 노동자들의 일요일 노동을 본격화하고 주 35시간제를 건드리면서, 기업주들의 오랜 염원을 실현시킨 반면, 노동계가 지켜온 금기들을 깨는 물꼬를 텄다.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손을 댄 정책 또한 노동정책이다. 지난해 프랑스 사회에 큰 사회적 갈등을 일으켰던 바로 그 노동법을 그는 더 가차 없이 밀어붙이겠다고 나섰다. 마크롱의 새 노동법 개악에 대해 프랑스인의 70%가 반대한다고 여론 조사는 거듭 전하고 있다.
올랑드가 지난해 노동법 개악을 하려 했을 때에도 역시 국민의 71%가 이 법안을 반대했다. 거센 여론의 저항 때문에, 의회에서 표결 전망이 어두워지자, 올랑드는 국가 비상시에만 사용할 수 있는 헌법특별조항을 남용, 국회표결 없이 대통령 직권으로 노동악법을 통과시켰고, 이는 그의 지지율은 5%까지로 끌어내린 주범이었으며,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었던 3-4개월 간의 밤샘 시위(La nuit debout)를 촉발시켰다.
집권 1개월, 마크롱의 지지율은 45%다. 언론이 부풀려 보여주는 폭발적인 마크롱 현상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임명한 총리 에두아르 필립의 지지율은 38%로 마크롱보다 더 낮다. 공화당 의원이던 에두아르 필립은 프랑스의 원전 마피아로 불리는 그룹 아레바(AREVA:원자력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에너지기업)에서 중책을 맡은 바 있던 인물로, 아레바가 벌인 니제르에서의 우라늄 약탈에 연루된 흑역사를 갖고 있고 환경정책과 에너지 전환 정책 추진에 있어서 대척점에 서 있다.
누가 마크롱 현상을 만들었나?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2016년 프랑스의 언론의 자유는 세계 45위까지로 추락했다. 2010년, 삐에르 베르제가 두 명의 거부들과 함께 르몽드를 인수한 이후, 한 줌의 수퍼리치들이 2015년을 전후하여, 올랑드 정부의 도움 하에 프랑스 주요 미디어들을 사들였다. 이후 프랑스의 언론의 자유는 마비상태에 이른다. 극소수의 독립 언론 이외에,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강력한 배급망을 가진 언론들은 모두 엇비슷한 주인 밑에서 그들의 가치와 이해를 대변하는 시녀로 전락해갔다. 프랑스 언론의 자유가 곤두박질치던 이 시절은 바로 마크롱이 금융가의 모짜르트에서 공화국을 현대의 귀족들 입 속에게 넣어줄 적임자로 길러지던 절호의 찬스였다.
본격화된 과두정치
이미 사르코지 시절부터, 과두정치란 어휘는 무대 뒤의 프랑스 정치시스템을 지목하는 말로 떠올랐다. 한 무리의 슈퍼리치들이 주도하는 이 정치 시스템은 이미 부자들의 대통령을 자처하는 사르코지 때 그 응큼한 체계가 눈밝은 자들에게 포착되었다. 소위 40대 기업 그룹 혹은 메데프(프랑스 전경련)로 대변되는 그들의 행복한 시절은, 물론 사회당 올랑드 집권기에도 계속되었다. 사회당의 간판을 달고 있었을 뿐, 올랑드는 메데프가 다 만들어 주다시피 한 노동개악 안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헌법의 예외조항까지 사용해 가며 통과시켜 주었다. 올랑드가 집권 5년 동안 사회주의자로서의 지킨 단 하나의 공약은 동성애자 결혼법뿐. 부르주아들 입장에서 전혀 불편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는 법이었다. 전통 카톨릭 신자들만 열을 좀 냈을 뿐이다.
노동자들과 대다수의 시민들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기업인들이 보기에 2016년의 노동개혁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노조들의 무릎을 완전히 꺾을 수 있는 더 강력한 법이 필요했다. 앞뒤 안 가리고 그들의 말을 잘 이행해 줄, 풋내기 시절에서부터 신자유주의의 젖병을 물고 성장한 마크롱이 바로 그 적임자였다.
마크롱은 로스차일드가의 은행가로 일하던 시절부터 세계 금융가, 수퍼리치들에게 친숙한 인물이었다. 기업 인수 합병의 영역에서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고, 20대 때, 사회당에 매력을 느꼈던 그는 사회당과 기업인들 사이를 오가며, 기업인들의 이해를 정치권에 대변하는 로비스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2006년 올랑드와 첫 친분을 맺기 시작한 그는, 2012년 올랑드가 대통령이 되자 엘리제궁에 경제비서관이란 타이틀로 드나들었고, 2014년엔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사회당이 스스로 붕괴한 뒤, 마크롱이 넘어야 할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극우 인종주의 정당 FN의 르펜이었다. 그러나 르펜은 대선전에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동시에 가장 써먹기 좋은 지렛대이기도 했다. '차마 우리가 인종주의자 르펜을, 파시스트 정당을 뽑을 순 없지 않나. 르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대세남 마크롱밖에 없다'는 논리는 슬슬 먹혀 들어갔다.
대선 두 달 전까지도 공약 하나 제대로 내놓은 게 없는 마크롱은 그렇게 이미지와 언론의 선동으로 대중의 뇌리에 대안으로 박혀버렸다. 부패스캔들로 이미지를 구긴 우파의 피용은 의외로 쉽게 제쳤으나 마지막 복병은 사실 극좌 멜랑숑이었다. TV토론이 회를 거듭할 수록, 유일하게 시민의 입장에 서서 서민들의 삶을 짖누르는,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을 공격한 멜랑숑의 언어는 대중을 강력하게 설득했다. 그의 지지율은 10%에서 3주만에 거의 두 배 가량 상승했다.
그러자 언론은 푸틴의 친구, 차베스의 동지, 스탈린 버금가는 독재자 이미지를 멜랑숑에게 씌웠다. 올랑드까지 나서서 과거 사회당의 동지였던 멜랑숑을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혹은 르펜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유럽으로부터 고립시킬 인물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미디어의 모든 은총을 받은 후보 마크롱이 대선에서 얻은 득표는 24%. 미디어의 모독을 한 몸에 뒤집어쓴 후보 멜랑숑의 득표는 19.6%였다.
결선투표를 코앞에 두고 마크롱의 실체가 좀 더 또렷해졌을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거부하는 것뿐이었다. 초유의 사태였던 대선 결선투표에서 1/3의 백지 혹은 기권은 최선을 다해 마크롱 거부를 표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르펜 공포를 피하기 위해 무난하고 익숙한 적인 마크롱을 선택했지만. 이제 마크롱은 자신이 맡은, 기업을 위한 정부를 주문대로 전격 작동시키는 중이다.
프랑스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무력감에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이 저항하기에 앞서 포기를 선택한 이번 선거는 새로운 시대에 프랑스가 접어들었음을 예고한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듯했던 이 나라 사람들이, 마크롱 앞에서는 아직 분노할 방법을, 명분을, 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결국 끝끝내 우리를 실망으로 이끌고, 마지막 한 가지 써보지 않은 카드, 극우를 선택해보는 길로 프랑스를 이끌 것이라고. 눈 뜨고 속고 있는 오늘의 상황이 미디어의 조력 속에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쩐지 저항하기 쉽지 않은 낯선 통치자 앞에서 대적한 무기를 갖추지 못한 채, 내내 외면하는 방식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다. 괴물이 눈 앞에 서 있는데, 너무 가까이 있어, 실체가 파악 안 되는 형국이다. 이제 곧 그 실체를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자발적 복종이라는 선택만은 피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