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철든 아이였어요.
아빠가 1995년. 저 중3때 돌아가셨거든요.
아빠가 살아계실때까지는
엄마는 평범한 짠순이 전업주부,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 서민층이었어요.
아빠는 암으로 3년을 투병하셨는데
수술,투병,재발,또수술 그 과정을 거치면서
보험조차 없던 우리집 재산은
아빠 사후에
딱 살고있는 집 한채와, 조의금으로 들어온 현금 1000만원 뿐이었어요.
아빠가 투병하시는 3년동안
온갖좋다는 풀뿌리며, 버섯, 나뭇가지 까지 구해 끓여드리고
밤잠 못자며, 통증에 시달리는 아빠등을 안마해주고.
새벽기도 다니느라
정말 해골같이 말랐던 엄마는
장례가 끝나자마자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1000만원을가지고 시장 한귀퉁이에 조그만 반찬가게를 열었어요.
엄마는 배움도 짧고
시골 출신인데다가
아빠가 정말 엄마를 '아기'처럼 예뻐하며 모든 걸 다 해주던 스타일이라
엄마가 뭔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죠.
막연히 우리는 시골 외갓집으로 가게되지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사십구제도 지내기전에 엄마는 가게 시작을 했고
삼년동안 하루도 쉬지않았어요.
매일 반찬가게 문을 열고
매일 산더미같은 야채를 다듬어 김치를하고 반찬을 만들고
새벽시장을 다니며 젓갈을 사오고 하셨죠.
아빠 돌아가시고
몇달지나 저는고등학교에, 동생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매일 아침마다 준비물이 있었어요.
1000만원뿐인 현금이 다 가게 보증금과 집기사는데 들어가있던 상황이라
그날그날 엄마가 벌어오는 몇만원이 우리 수중에 있는 돈의 전부였어요.
엄마 체육복값 오늘까지 내야해.
엄마 실내화 사야해.
교재 사야해.
엄마 회수권 사야해.
그말이 너무 안나와서
늘 마감일날 아침에, 회수권이 딱 떨어진 아침에 말을 해서 받았어요.
새벽시장 다녀와서 주무시는 엄마를 깨워 말을하면
엄마가 전대에서 돈을 꺼내주시는데
예전에 아빠가 계실때 받던 돈과는 달리
구깃구깃하고 고춧가루가 묻어있을때도 있는 그 돈이 너무 슬펐어요.
동네에 있던 중학교와
번화가에 있던 고등학교는 사뭇 분위기도 달라서
중학교때가지는 친구들 만나면 500원짜리 떡볶이를 사먹었는데
고등학교땐 학교 밑에 있는 KFC에서 만나더라구요.
이십년이넘은 지금도 기억이나요.
제일 싼 세트이름이 '마이펙세트'였는데 3200원이었어요.
친구들의 '오늘 켄치(KFC의줄임말ㅋ)가자'라는 말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어쩌다 한번도 아니고
우리 엄마가 오징어젓 한근을 팔아야 생기는 돈보다 200원이나 비싼 ㅋㅋ 군것질을
일주일에 몇번씩 할 수는 없었죠.
친구들에게 그냥 나빼고 너희끼리 가라고 했어요.
고1짜리 여자애가 스스로
'친구들아 나빼고 놀아'라고 하는건 아주 어렵고 마음아픈 일이었답니다.
어렴풋이 제 마음을 아는 친구가
"xx아, 그럼 비스켓이라도 가져가"하며
따로 주문해준 그 빵덩이를 들고 오면서
이게 속상한건가, 슬픈건가, 화나는건가, 잘 모르겠지만
목이 메였던 기억이 생생해요.
엄마와 동생과 저는
어쨌든, 아빠 없이도 우리가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열심히 살고, 아껴살고 그랬어요.
'여유'란 것은 한푼어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우리는
빚지러안가고, 아쉬운 소리안하고 '산다'는게 대단하다고 느끼고 살던때라
아껴사는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반찬가게를 하는 3년동안(엄마가 하루도 쉬지않고 일했던 3년)
엄마가 아끼지 않았던 순간이 딱 세번있었는데
첫번째는 제 수학여행때였어요.
수학여행날짜가 나오자 엄마가
옷사라고 십만원을 주셨어요.
96년에 10만원이면, 더구나 짠순이 엄마에게 10만원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교복을 입는 학교라 집에서 입는 옷은 정말 형편없었는데
10만원을 들고 친구들과 이대에 가서
옷을 사던 그 기쁨과 설레임이라니!
아침저녁으로 갈아입을 수있을 만큼 가방에 옷을 빵빵하게 싸고
선글라스도 친구들과 맞춰 사서 끼고 떠났던 수학여행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어요.
두번째는 수능때였어요.
수능 전 주말 낮에 엄마가 제일 먹고싶은게 뭐냐고 하시길래
피자라고했더니 가자고 하셨어요
당시 홍대앞에 피자몰에 가서
피자도 시키고 스파게티도 시키고 샐러드도 시켜서
샐러드를 어떻게 하면 많이 담을 수있는지 동생에게 가르쳐주며
(오이와 방울토마토를 이용해 높이 쌓는게 당시 유행이었음ㅋ)
엄마는 창피하다고 그만 담으라고 막 웃고 그랬죠.
세번째는 대학합격한 다음에
신촌 현대백화점 옆에 센서스라는 옷집이 있었는데
거기가서 바지정장 한벌과 코트를 사주셨어요.
엄마는 뭔가 대학생이 되었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로다가 정장과 코트를 사주셨지만
큰돈을 쓴것에 비해
멋낼 줄 모를때라 그다지 유용하지는 았었어요
더구나 저희 대학때는 힙합이 유행할때라 ㅜㅜ
우리는 정말 가난하고 궁핍했는데
딱 저 세번의 기억때문에
그 시절이 아프지는 않아요.
엄마는 반찬가게에서 조금 돈을 벌어
작은 식당을 열고, 다시 좀더 돈을 벌어 좀더 큰 식당을 열고
저희 형편은 부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동생과 저 둘다 수월하게 대학진학해서, 수월하게 졸업하고
수월하게 괜찮은 직장입사하고
수월하게 괜찮은 결혼해서
평범하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빠 돌아가신후 딱 19년 정말 불꽃같이 일하시고
은퇴하셔서
영어공부, 수영, 춤, 노래 배우시며
재미나게 잘 지내시고
맞벌이하는 제 아아도 케어해주시면서
늘 꼭 필요하고 고마운 자리에 있어주십니다.
수학여행 티셔츠글 보고 생각나서 주저리 주저리 써봤어요.
그 글쓴님을 계도하려는 것 아니예요.
그냥 옛날에 그랬다구요..
남들한테 못했던말이 써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