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93년 2월 17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의 '법제소위원회'에 구성된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위원회'에 자료로 제출한 내용을 보면, 안두희는 백범 암살 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그 후 신성모 국방장관이 안두희를 은밀히 불러 수고 많았다며 돈을 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성모 국방장관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에게 돈을 준 곳은 김활란 당시 이화여자대학장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신성모는 안두희를 포병으로 원대복귀 시켜 줄 것도 약속한다. 이런 정황을 보면 백범 암살의 배경에 이승만, 김활란 그리고 미국이 있다는 심증을 감출 수 없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미국 CIA 요원이었다. 김활란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미군정기에는 미국, 그리고 이승만과는 '특수관계'였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굳이 김활란의 서재에서 안두희를 '포병 원대복귀' 등을 논의한 것은, 이승만에게 보고될 것으로 믿고 한 행동이었다. 신성모는 6·25전쟁 관련 허위정보 보고 등 이승만으로부터 언제 해임될지 모른다는 불안심리에서 그의 '아킬레스건'을 이승만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 지금까지 백범 암살 배경과 동기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지만 놀랍게도 문헌적 증거는 거의 없다. 사건과 관련된 기관의 직접기록은 현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두희의 심문기록은 물론 재판기록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안두희 재판 관련 '기록'은 언론인 오소백의 방청기뿐이다. 왜 이렇게 백범 암살과 관련한 이승만정권의 공식기록이 부재하다고 보시는지?
" 이승만정권은 민간과 군정보기관 그리고 경찰을 동원하여 백범 암살관련 기록은 모두 제거시켰다. 그래서 심지어 신문의 재판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직적인 기록 말살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은 처음부터 백범을 배제시켰다. 그의 강인한 민족주의 성향이 향후 미국의 한국 지배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해서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의 항복 후에는 개인 자격으로 백범을 귀국시켰으며, 한때 중국으로 추방시키려고까지 했다. 미국은 자기 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민족주의자를 싫어한다. 베트남의 호치민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이 같은 미국의 속셈을 술수에 능한 이승만이 놓칠 리 없다. 결국 백범 암살은 미국과 이승만의 이해가 일치한 대목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백범을 암살하는 데 있어서 안두희는 단순히 이승만정권이나 미국의 꼭두각시였다고 보시나 아니면 '확신범'이었다고 보시나? 그리고 그 이유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여느 암살사건의 하수인과 다른 확신범이었다. 그는 단순한 총잡이나 암살범이 아니다. 그는 해방정국의 극렬한 테러집단이었던 서북청년단의 핵심간부였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실세이던 88구락부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적임자로 선발된 테러리스트였다. 동시에 미국 정보기관 소속의 에이전트였다."
- 지금이라도 백범 암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백범 암살에 대한 전모가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이후 김대중 수장·납치사건, 장준하 암살사건 등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정적을 암살하는 야만이 재발하지 않도록 백범 암살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 이것은 과거사 진상규명이면서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역사정의 실현'의 과정이다."
-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백범의 모습이 담긴 10만 원 권 지폐가 거의 나올 뻔하다 결국 무산되었다. 비록 늦었지만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는 백범의 모습이 담긴 10만 원 권 지폐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해방 70주년이 지났고 3·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다가온다. 건국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우리 화폐에 조선시대 인물들만 등장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백범 등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하고 역사에서 말살하고자 했다. 그래서 5만 원권 화폐 도안에 백범 초상화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이었는데도 이를 배제했다. 이제라도 복원시키는 것이 '역사 바로 잡기'의 출발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