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142058005&code=...
돌봄노동자는 누가돌보나?
국가가 돌보아야죠!!
돌봄 노동자가 즐겁게 일하는세상!!
돌봄 노동자 처우개선!!
# 더 좋은 정권교체 안철수와 함께 합시다!!
얼마 전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 병원이 코앞이었고 채 삼십분도 안 흘렀건만 나는 그새 동네 언니가 모는 휠체어에 반쯤 눕다시피 쓰러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멋진 동네 언니는 방향감각을 잃어 좌우로 쓰러지는 나를 몸으로 막아가며,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토사물을 처리해가며, 외래부터 입원까지 종합병원의 복잡한 절차를 대행했고, 내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동시에 당장 몇 시간 뒤에 잡혀 있던 나의 업무 스케줄까지 정리해주었다.
언니는 가족에게 나를 인계하면서도 종합 입원세트처럼 꾸러미를 챙겨놓고 갔다. 수건, 티슈와 같은 생필품은 물론 마실 물, 당분이 필요할 때 마실 주스, 갈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입에 물고 있을 작은 각얼음 한 컵까지 나란히 세워두었다. 좀 전까지 함께 차를 나눠 마시며 회의를 준비하던 사람이 예고도 없이 쓰러졌는데 이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능숙할 수 있는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 엄마가 종종 어지럽다고 하셔서 잘 알아’였다. 결국 이 사람의 능숙한 대처는 엄마를 돌보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었고 이 경험은 그날의 나를 살렸다. 돌봄노동은 기르는 일뿐만 아니라 이렇게 종종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를, 노인을, 환자를 혹은 다른 누군가를 돌보는 일들은 종종 너무 숨어 있어서 그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다. ‘일단 낳아놓으면 아이는 저절로 큰다’거나 집안 살림과 양육을 도맡고 있는 전업주부를 ‘집에서 논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도 않다. 돌봄은 그림자노동의 대표주자다. 잘 드러나지도 않고 보수가 따라오지도 않는다. 엄마나 딸, 할머니라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당연스레 돌봄의 임무를 부여받기도 한다. 돌봄을 온전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돌봄노동자의 처우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해 초록상상과 중랑구 보건소, 노동환경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한 내용을 보면 보육교사들은 연차, 병가, 휴게시간과 같은 노동자로서의 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거나 학부모나 사회로부터 직업군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였다. 비단 보육교사뿐만이 아니다. 돌봄직종에 종사하려면 대부분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해야 가능하지만 사회는 돌봄노동을 아무나 하는 허드렛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돌봄노동이 전문적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분명히 있다. 허리나 어깨에 만성 통증질환을 가져오는 돌봄은 엄청난 강도의 육체적 노동이며 동시에 대상자의 마음을 꾸준히 만져주고 달래주는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한 선생님이 다섯명의 아이를 담당하다가 오늘부터 여덟명을 맡게 되어 돌봄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경제적 효율에 대해 논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지치고 까다로운 돌봄을 계속하게 되는 동력은 실제 돌봄을 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애착과 유대이다. 그러니 해본 사람이 또 하게 되고 하던 사람에게 일이 더 몰리게 된다. 그래서 돌봄은 대충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며 그래서 돌봄을 하시는 분들은 누구라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돌봄 문제는 내 아이를 맡길 가깝고 믿음직한 어린이집을 찾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계신 분의 노모나 아이들 역시 같은 시간 동안 동등한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간다.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에도 존중받는 삶을 누릴 수 있으려면 나를 도와줄 그 사람이 자부심을 갖고 건강한 상태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한국 사회는 개별가정에서 돌봄을 해결할 수 없다. 초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고 비혼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피붙이 가족이 없는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필요할 때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래도 돌봄을 엄마에게만 미룰 것인가. 돌봄노동자의 노동환경에 대해 모른 척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