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미국’의 진실 ‘체로키 파일’, 광주에 기증하는 팀 셔록
미국의 대통령이 광주 시민들 앞에서 공식 사과하는 날이 올까. 미국 정부는 1980년 5.18 광주에서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 개입한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된 거짓말’이다. 미국 정부의 광주항쟁 관련 비밀문건들인 ‘체로키(Cherokee) 파일’이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이 문건들을 입수해 폭로한 주인공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팀 셔록(Tim Shorrock)이다.
셔록은 5.18 광주 민중항쟁 36주년을 맞아 지난 14일부터 26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5월 광주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은 지 1년 만이다. 셔록은 이번 한국 방문 기간 동안 5.18의 도시 광주와 4.3 항쟁의 제주로 발길을 향했다. 제주에서는 정부가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한 강정마을에도 다녀왔다. ‘민중의소리’는 지난 23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셔록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정의당 박원석 의원실이 도움을 줬다.
“미국 대통령, 광주와 제주에 와서 사과해야 한다”
1980년 광주 5.18과 1948년 제주 4.3에는 공통점이 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항쟁 과정에서 군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 미국이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광주에서는 미국이 광주 시민을 상대로 한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묵인, 방조, 승인했다. 제주에서는 미군정이 직접 진압 작전을 지원하고 통제했다. 32년의 간극이 있지만 1948년에도, 1980년에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었다. 2016년인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셔록은 광주 5.18 기념식에 참석한 다음날인 19일부터 23일까지 제주에 있었다. 그 사이 4.3 평화기념관에도 들렀다. 셔록은 “그전까지 4.3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에서만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셔록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947년과 1948년, 우익 경찰의 폭력에 맞선 대중 시위와 군인들의 항거 이후 미국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 빨갱이섬)’으로 선포하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인 잔인한 진압작전을 승인했다. 서북청년단(A fascist youth group of men who'd left North Korea)은 수개월 동안 지속된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것은 미군정과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원이 뒷받침된 현대판 홀로코스트였다.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
셔록은 “실제 4.3 평화기념관을 보고 나서 정말 할 말을 잃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며 “미국이 4.3을 어떻게 다뤘는지 알고 나니 미국인으로서 화가 났다. 아주 중요하지만 숨겨진 역사임을 알게 돼 충격이었다”고 토로했다.
평화기념관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이던 2003년 10월 31일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하는 장면도 상영되고 있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위원회(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셔록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영상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꼬집었다. 바로 제주, 그리고 광주에서 벌어진 참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셔록은 “미국 대통령도 언젠간 4.3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광주에 와서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셔록은 현재진행형인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 역시 미국이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관리들이나 미 해군 관계자들은 강정 해군기지를 이용하고 싶다고 수차례 얘기해 왔다”며 “한미동맹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강정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면서 강정 해군기지 건설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군부와 한국 군부가 예전부터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것이 강정마을의 핵심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는 주일미군 기지가 있는 일본 오키나와(沖繩)가 처한 상황과도 유사하다고 셔록은 지적했다. 그는 “오키나와 현지사는 미 해병대 철수를 바라고 있지만, 미국은 아베(安倍) 정부와의 공조 하에 오키나와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오키나와는 미 해군 군무원이 현지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해 다시금 들끓고 있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미국은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의 전화 사과가 전부였다.
셔록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 시민들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미국이 해외에 700곳이 넘는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고 그 수는 더 늘어나고 있다”며 “그들은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과 미국’ 진실의 기록 ‘체로키 파일’, 광주에 기증하는 팀 셔록
미국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기자였던 셔록은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은 이후 1981년부터 광주를 직접 취재해 왔다. 그만큼 광주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그는 광주에 ‘특별한 선물’을 전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름 아닌 ‘체로키 파일’이다. 그는 지난 18일 윤장현 광주시장을 만나 이러한 의사를 전달했다.
앞서 셔록은 1996년 미국의 정보공개법(FOIA)을 활용해 광주항쟁 관련 미국 국무부의 2급 비밀문건, 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입수해 공개했다. 방대한 양의 문건들 속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미국이 방조하고 승인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89년 한국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조사특별위원회에 보낸 공식 백서를 통해 ‘미국은 한국 정부의 군대 동원 계획을 몰랐을 뿐 아니라 특수부대의 광주 투입을 사전에 몰랐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셔록이 공개한 미 정부의 비밀문건들은 이러한 미국의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됐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뒤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은 한국 동향을 주시하기 위해 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워싱턴과 서울 사이의 특별 대화 채널을 가동한다. 암호명 ‘체로키’이다. 여기에는 미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CIA(중앙정보국), 합동참모본부, NSC(국가안전보장회의)와 서울 주한 미대사관의 최고위급 관계자들이 섭렵돼 있었다.
1980년 5월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워싱턴에 보낸 비밀전문 등을 보면 미국이 한국군 공수부대 이동 및 배치 현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부대 투입을 용인하는 대목도 나온다. 특히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서 열린 ‘정책검토회의’에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 사용’을 결론으로 내린다. 광주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 과정에 미국이 개입돼 있다는 정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셔록은 이 문건들은 ‘당연히’ 광주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는 전두환 신군부의 손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곳”이라며 “당연히 문건들은 광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셔록은 ‘체로키 파일’을 포함한 비밀문건들을 기증하는 일은 5.18 광주의 역사를 복원하고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광주에는 이미 당시를 겪어낸 사람들이 있고, 광주는 그 자체로 역사적 현장이다. 여기에 ‘미국의 시각’이 담긴 기록을 더했을 때 비로소 5.18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셔록의 생각이다.
그는 “문건들은 단순히 5.18 광주뿐만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기 전부터 시작해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미국의 역할과 정책을 다루고 있는 문서들”이라며 “미국의 시각이 담긴 문서들이 없으면 광주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셔록에 따르면 ‘체로키 파일’은 방대한 양의 비밀문건 들 중 극히 일부라고 한다. 나머지 문건들 중에는 주한 미 대사관에서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등에 보내는 각종 전문들이 포함돼 있어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셔록은 설명했다. 야당 인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YH 사건과 같은 노동운동에 대한 기록도 담겨 있다고 한다.
셔록은 “이번 기증으로 광주시가 체로키 파일과 문건들을 받게 된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미국의 당시 역할과 정책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증할 문건들은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셔록은 말했다. 그는 문건들이 PDF 파일로도 만들어져 더 많은 연구자들과 대중에게 공개돼 5.18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셔록은 5.18 광주를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1985, 이하 ‘넘어 넘어’)의 유일한 공식 영문판으로 1999년 출간된 ‘광주일지’(Kwangju Diary: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에 저자로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워싱턴의 시각’(The View from Washington)이라는 글을 통해 ‘체로키 파일’이 담고 있는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5.18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책은 지난 2005년부터 절판된 상태이다.
셔록은 “광주항쟁 과정에서 하루하루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물인데 재출간이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 광주에 대해선 영어로 된 출판물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넘어 넘어’는) 미국이나 해외 영어권 시민들에게도 가치있는 자료들”이라며 “하루 속히 영문판이 미국에서 재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그는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판권을 사서 재출간이 될 경우 추가로 비밀해제 된 내용들을 포함시켜 ‘워싱턴의 시각’ 챕터를 수정·보강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