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방 수형생활 회상
마음이 올곧고 정직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간이 콩알만 해서 무슨 죄를 지을만한 담력이 없고, 60평생 토정비결이나 사주팔자에 관재-ㅅ 수가 없어 60살까지는 포졸에게 엮여 옥살이를 해 본경험이 없다.
그런데 60살을 살짝 넘겨서부터는 관재-ㅅ수가 낀 것 같았다.
2008. 5. 2
촛불의 출산일이자 첫 생일날이다.
신록은 우거지고 따사롭고 해맑은 날씨에 청계천은 상춘객들로 넘쳐났다.
거기다가 그날 청계광장 소라탑 앞에서 첫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날이니 길 양편에는 엿장수, 뺑뺑이판 뽑기를 비롯한 옛적 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행상들도 대거 몰려나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어릴 적 보았던 기지시리장터(충남 당진시 송악읍소재지인 기지시리)의 난장판을 50여년 만에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땅과 하늘도 즐거웠고 그 사이에 끼인 사람들도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명박이 청와대에 짐을 풀 사이도 없이 미국에 가서 아들부시가 등 두들겨 주는 책봉-례를 치르고 의기양양해서 귀국을 해서 국민들에게 “이제 값싸고 질 좋은 미국쇠고기 마음껏 드시라!”는 말 한마디가 전국을 날만 어두워지면 촛불로 날을 밝히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100여 일간 태평로와 종로가 만나는 광화문광장 4거리는 매일저녁 6시쯤 되면 경찰도 으레 광장을 촛불에게 양보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매일같이 수십만이 몰려 나왔고, 특히 6.10항쟁의 기념일인 6.9저녁부터 그 이튿날 까지는 100만 이상의 촛불시민이 몰려 나왔다.
그때 KBS와 MBC의 편파보도가 문젯거리로 떠올랐다.
8월 초순쯤으로 기억되는데 그날은 여의도 KBS앞에서 KBS의 편파보도 규탄 촛불집회가 열렸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그때까지 경찰에 연행된 누적시위대가 1,000명을 넘어설 때였다.
줄잡아 10만은 KBS앞에 운집했다.
낯익은 야당국회의원 20여명이 인도에 주저앉아 있었고 나는 바로 그 뒷줄에 앉아 있었다.
저쪽에서부터 경찰의 왱왱거리는 방송이 시작되고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고 시위대들은 경찰에게 쫓겨 가로공원 소나무와 갈대숲사이로 숨어들고 있었다.
그때 내 생각이 도대체 경찰에 연행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스스로 경험해 보기로 했다.
야당국회의원들은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 와도 꼼짝도 안 하고 앉아 있었고, 옆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콩 튀듯 했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경찰을 “견찰”이라고 빈정대지만 경찰의 코는 모두 다 개 코인지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맞고 앞줄의 국회의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뒤에 홀로 앉아있는 나를 경찰 둘이 양편에 겨드랑이를 끼고 다른 경찰 두 명이 내 양 다리를 잡고 행가레를 시키며 닭장차에 갖다 실었다.
그리고 닭장차가 은평구 어느 경찰서로 가더니 거기는 유치장이 만원이 되었다고 다시 차를 되돌려 노량진 학원가에 끼어있는 관악경찰서로 인계가 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쑤셔 박혔다.
모든 용품은 경찰에게 유치를 당했는데, 평상복을 수의로 갈이 입지는 않은 것 같다.(기억이 확실치는 않음)
좁은 방 한 칸에 낯선 젊은이 하나와 같이 수감되었고, 그 젊은이는 민주노총소속의 노동자였다.
그날 밤 저녁밥은 안 주었던 것 같으며 그 이튿날 아침밥이 나왔는데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통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 민노총노동자 동료들이 면회를 와서 그 사람은 잠시 나갔다 들어왔고, 그 동료들이 영치금을 넣어주어 점심은 특별히 사식을 시켰다.
그래서 내 생각에 사식을 시켰으니 당연히 외부식당에서 설렁탕이나 곰탕 아니면 짜장면 등을 배달해서 먹는 것으로 생각했고 한 끼 사식비가 8,000원 인가라고 했다.
헌데 점심밥이 나온 것을 보니 내 밥은 그대로 반찬 3가지의 콩밥인데, 사식을 시킨 민노총노동자의 밥도 내 밥과 똑 같은 콩밥이고 그 위에 고등어 1/6토막 구운 게 달랑 하나 더 얹어져 있었다.
민조총노동자는 별 생각이 없이 고등어구이를 반을 쪼개 내 밥 위에 얹어 주었고, 나는 그 고등어 1/6토막이 8,000원이라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간수를 불러 아니 저게 내 밥과 똑같은 콩밥이지 어떻게 8,000원짜리 사식이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 간수가 하는 말이 수감자의 안전에 문제가 있을까봐 외부식당의 밥은 절대로 감방으로 들어 올 수가 없고 다만 사식비용으로 유치장에서 제공되는 밥에 다른 반찬을 추가로 더 준다는 설명을 자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러냐고 한 뒤, 당신도 보다시피 고등어 한 마리를 좌/우로 가르고 그 한편 마저 1/3토막 친 저 고등어 1/6토막이 8,000원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거에 대한 답변은 자신이 할 수 없고 위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잠시 뒤에 배식과 관련된 사무를 보는 부서의 경찰관인 듯 여겨지는 사복을 입은 남성이 내려와서 내 주장을 듣고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이 기록은 경찰서에서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답변을 할 것이고, 자신은 국가인권위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침 10시 쯤 천정배의원을 비롯한 야당의원 5~6명이 그날 관악경찰서로 연행된 9명의 합동면회를 왔고, 그 자리에서 이 얘지 저 얘기들이 오고간 끝에 내가 천정배 의원에게 항의를 했다.
천의원께서는 법무부장관 재직 시 왜 <전투경찰>제도를 없애지 않고 그냥 놔두어 촛불이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법적으로 전투경찰은 2012년도까지만 존속된다고 하는 대답을 들은 것 같다.(?)
지금은 2012년도 지났고 전투경찰은 없어졌지만, 폐지가 아니라 전투경찰/의무경찰로 이름만 살짝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거기에도 이명박의 얄팍한 꼼수가 끼어든 결과 같다.
11시쯤 되었는데 가족이 면회 왔으니 면회실로 나오라고 했다.
의외였다.
혹시 경찰서로 연행 된다고 집에 연락하면 가족이 놀랠까봐 핸드폰을 영치시키면서 까지 집에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때는 툭하면 촛불현장에서 밤을 새고 이튿날 아침에 집에 들어가니 밤에 귀가를 안 해도 집에서는 그러려니 했는데, 웬 가족이 면회를 왔단 말인가?
면회실에 갔더니 유리창 저 편에 입을 한 자나 내밀고 근심서린 눈초리의 마누라와 딸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면회를 왔느냐고 물었더니, 안성에 사는 4촌동생이 TV뉴스를 보다 경찰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나를 보고 즉시 4촌형수인 내 마누라에게 연락을 했고 마누라와 딸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서울경찰청으로 전화를 해서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면회를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어 와서 “집에서는 쌀밥만 먹다 오래간만에 콩밥을 먹었더니 힘이 더 나서 내일부터는 더 열심히 촛불집회에 나가야 되겠다.”고 하며 오후에 나갈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쯤 모두 유치장을 나와 영치물을 돌려받고 출소를 하였다.
우리가 <야간 집시법 위반>현행범으로 연행되었음으로 오늘은 내 보내지만 앞으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구속 사유는 안 되니 오늘은 이대로 내 보낸다는 것이었다.
9명이 경찰서 후문을 나서려는데 경비실에서 경찰이 뛰어나오더니 영치금을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치금이 무슨 영치금이냐고 물었더니 익명의 시민 한분이 9분 앞으로 50만원의 영치금을 맡겼는데 영치금을 한 푼도 쓰지 않았으니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9명이 경찰서 뒷마당에서 선채로 구수회의가 열렸다.
9명중 가장 연장자인 내가 우리 9명이 50만원을 받아 간들 뭣 하겠습니까? 하면서 경찰서 뒤편 산동네를 가리키면서 저 산동네에 살기 힘드신 분들이 많을 것이니 경찰서에서 알아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써 달라고 하고 영치금을 맡기자고 하였더니 모두 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경찰서를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뒤에 집회현장에서 영치금 얘기를 꺼냈더니 모두다 잘못 하였단다.
꼭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부근에 있는 동사무소로 가서 얘기를 하고 영수증을 받고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종이쪽지 영수증 하나 안 받고 그 돈을 맡긴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토막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라고들 말 했다.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았다.
이게 60평생에 처음 겪어본 첫 수감생활 경험담이다.
오래 되어서 기억나는 대로 써서 사실관계가 조금은 다른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한참 뒤 <야간집시법>에 <위헌>판결이 내려져 재판 없이 이 건은 끝났다.
그리고 국가인권위로부터 여러 차례 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한 끼 사식비용으로 8천원 받고 고등어 1/6토막을 더 준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앞으로 경찰서 유치장을 더욱 철저히 관리감찰해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다.
그리고 몇 달 지난 겨울철
수서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수서경찰서에 갔더니 차도 상에 서 있는 내 채증사진을 내밀며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입건(?)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룻밤인가 이틀 밤 자고 나왔고, 나중에 재판이 열려 150만원이 선고 된 것을 80만원으로 감액 결정되어 생떼 같은 돈 80만원을 강탈당했다.
그 뒤 또 한 번 비슷한 건으로 엮여 150만원을 선고 받았는데, 판사의 언행이나 태도로 봐서 검찰의 주장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 같았다.
최후진술에서 “판사님! 뒷날 이번 재판 한 것을 후회하시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하고 쏘아 붙여 괘심죄 까지 합산하여 150만원을 또 강탈당했다.
다음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나 뿐 아니라 많은 촛불들이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강탈당한 벌금의 환급 소송을 벌일 것으로 예측한다.
나도 그때 끼어들어 <230만원 법정이자>를 환급받아 위안부할머님들 단체나 세월호 연대에 기증을 할 예정이다.
경찰에 3번 연행되고 나서 알은 것도 있다.
전과가 없거나 경찰에 한 번도 연행이 안 되었던 사람은 채증사진이 있어도 경찰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문제를 삼을 수가 없는데, 단 한번이라도 경찰에 연행되면 바로 지문채취를 하고 사진을 찍어 어떤 시위현장에서건 채증사진만 찍히면 바로 경찰이 신분파악이 되어 소환장이 날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수서경찰서의 소환을 받은 경우가 그런 경우다.
그러고저러고 박근혜양(?)
미심쩍기는 한데 본인이 결혼을 안 한 늙은 처녀라고 빡빡 우기니 할 수 없이 “박근혜 양”으로 쓸 수밖에!
양보다 몇 해 더 산 이 늙은 오라비도 견뎠는데 잘 견디시게!
그리고 감방 선배인 내 수형경험담 읽어보고 깨닫는 바가 있다면 편지하면 기꺼이 한번 면회 감세!
콩밥이 생각보다 영양가 있고, 그 무엇보다도 머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작용을 하고, 10년 이상 상복을 하면 악마를 천사로 탈바꿈 시키는 효험이 있다하니 그 밥과 입을 옷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국민에게 항상 감사해 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게!
먼 뒷날
악으로 똘똘 뭉친 마귀할멈이 옥문을 나서려나?
전죄를 말끔히 뉘우치고 늙은 선녀가 된 할머니가 옥문을 나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