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의 실패를 공식 선언했다. 더 나아가 “지난 20년간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트럼프 정부가 지난 20년간의 미국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한 결과를 공표한 것으로 사실상 미국이 부시 정부 이래 지속해온 대북적대정책의 총파산을 인정한 것이다. 중대한 선언이다.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이란 단지 북한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전략이 아니다. 이 정책은 미국이 남미의 반미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했던 ‘저강도 전쟁전략’을 한반도 상황에 맞게 변용한 북한 붕괴전략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전쟁훈련과 같은 소모전과 각종 제재를 통해 북한을 피폐케 해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는 전략이다. 본질적으로 부시 정부의 ‘악의 축’ 전략과 다르지 않다. 오바마 정부는 이를 거의 최고수준으로 실행하였다. 거의 1년 내내 지속되는 한미연합훈련, 봉쇄에 가까운 유엔안보리 결의 등 초고강도 경제제재, 삐라 살포, 인권문제를 비롯한 각종의 여론 선전전 등 전쟁을 제외한 모든 적대행위가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는커녕 핵능력을 더욱 고도화하여 이제는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전략적 인내‘ 정책의 파산을 선언한 배경이다.
그럼에도 틸러슨 국무장관은 ‘새로운 접근법’과 관련해 기존 대북적대정책과 다르지 않은 방안만을 늘어놓았다. “북한이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해야 대화할 것”, “유엔안보리 제재 조치를 최고 수준으로 취했다고 믿지 않는다”, “(북핵)동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등의 발언은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 실행 과정에서 제기된 조치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방안들이다. 이것은 트럼프 정부가 아직 새로운 접근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 방안을 숨기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 정책의 실패 선언 뒤 나올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일 수밖에 없다. 전쟁 아니면 평화협상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틸러슨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서는 사드 배치나 세컨더리 보이콧 등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중국의 사드 보복조치에 대해 “중국이 이러한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하더니 막상 중국에 가서는 정부의 희망과 달리 사드 보복에 대한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미중 양국이 공동 노력한다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틸러슨 국무장관은 왕이 외교부장의 제제와 대화 병행 제안에 대해 어떠한 이견도 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중국신문망은 “중국과 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일부 공동 인식에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왕이 외교부장이 밝힌 중국의 입장은 북의 핵·미사일 시험과 한미 연합훈련을 함께 멈추는 ‘쌍(雙)중단’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쌍궤(雙軌) 병행’ 제안이다. 사실 전자는 북한이 2년 전부터 미국에 제안했던 바이다. 또 후자는 미국이 오바마 정부 시절 북한에 제안한 것으로, 지난해 미 외교협회(CFR)가 준비한 차기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미국의 이런 이중적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북적대 이외에 어떠한 정책대안도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 외교부나 국방부, 수구보수언론들은 미국이 선제타격이나 전술핵무기 재배치 같은 보다 강도 높은 대북적대정책을 취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국민 생존권이 심각히 위협받고, 국민적 반대가 하늘에 닿아 있음에도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것이다. 미국이 이를 모를 리 없다. 20년 대북적대정책의 총파산을 선언하고서도 모순된 행보를 보인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