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 박유(朴愉)라는 재상이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데다 원나라 사나이들이 고려인 첩을 많이 거느려 원나라 인구만 늘리고
있다고 개탄하고 일부이처다첩(一夫二妻多妾)제도로 국력을 보강하기를
상소했다.
<고려사>에 보면 박유가 연등회 날, 왕의 행차를 호위하고 따라가는 것을 본 노파가
‘첩을 두자고 요청한 자가 저 못된 늙은이다’라고 소리 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던지
거리와 골목에서 붉은 손가락이 한 무더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인들의 거센 비난과 동침 거부로 벼슬아치들이 어느 누구도 박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처첩 합법화는 무산되었다.
재상부인들은 조정에서 돌아온 남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조정에 상정된 이 의논에 압력을 가했다.
한국 여권운동의 맹렬성을 대변해주는 섹스 스트라이크였다.
- 고려 시대는 고려 황제만이 황후 외에 여러 부인들(즉 후궁이죠)을 거느릴 수 있었고
황제를 제외한 귀족들도 일부일처제 국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려 여성들은 조선 후기 여성과는 달랐어요.
현대여성처럼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진 못했지만(중세 시대 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없었죠)
그 외에는 중세 시대에서 가장 여성이 평등한 국가 중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당시 중국 대륙이나 일본, 유럽 어느 나라도 고려만큼 여성들이 존중받지는 못했습니다.
중국 대륙에 수없이 일어나고 망했던 유목 민족 국가 중 또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자들과 똑같이 말을 타고 달렸으며, 아들딸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고 제사도 아들딸 똑같이 지냈으며
(고려시대 제사는 절에서 지냈죠) 이혼과 재혼도 자유로와서 이혼한 여자가 황후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성 주장이 강해 남자를 패는 여성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고, 자유 연애와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겨서 조선시대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목욕을 강에서 남녀가 함께 했다고 하죠.
그런 여성들이 조선 후기로 와서는,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조선 지배층이 강압적으로 나라에서
강요하는 통에 억눌려 남편이 첩을 들여도 투기해서는 안 된다는, 비인간적이고 철저히 남성 위주의
가치관으로 재편되었고 일제 시대를 거쳐 원래 여자를 아주 천시하던 일본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지위는
바닥으로 떨어졌죠. 그래도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들이 부지런히 집안일하고 부업을 해서 아이들을 키우고
실의에 빠진 남편들을 대신해 가정을 강건하게 지켜서 지금 한국이 이렇게 일어나게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에서 바로 대한민국이 되었다면, 지금 여성들은 시월드도 없었을 것이고 제사 지내는데 맞벌이하는
며느리가 가니 마니 하는 문제로 머리 싸맬 일도 없었을 것이며 훨씬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 까지의 문화가 우리 고유의 전통(신라, 백제, 고구려부터 이어내려온 전통)이며
조선 후기의 시집살이며 각종 남녀차별 문화는 변질된 문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