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농민이 “병사”라면, 박정희 역시 병사가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의학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1948년도에 똥구멍이 찢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말라붙을 정도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모든 여건이 갖추어졌었다 해도 수재중의 수재만 들어가는 의대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 의학이나 그 방면의 용어에 대해서는 청맹과니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반인들의 상식수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용어를 내 나름대로 골라 이 글을 쓴다.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포물선도 아니고 거의 직선으로 날아오는 물대포가 쏜 빨랫줄 같은 물줄기를 맞고 몸뚱이가 썩은 나무토막 쓰러지듯 아스팔트바닥에 나가떨어지는 즉시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힌 머리통이 다시 한 번 튕겨 오른(이 부분은 영상이 희미해 확실치는 않음)뒤에 쓰러진 몸뚱이에 다시 그 강력한 물줄기를 맞은 것 까지가 백남기농민이 식물인간상태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과 과정이다.
그 뒤 서울대 병원 병실에 누워있었던 300여 일 간은 말 그대로 식물인간 상태로 의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시간이다.
사건의 원인과 과정이 이러함에도 물대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는 소위 “직사”나 “즉사”를 안 하고 300일 이상 심장이 멈추지를 않았으니 백농민의 사인(死因)이 “병사(病死)”라는 진단서가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와 의술을 자랑한다는 국립서울대 병원에서 나왔다.
하느님도 혀를 내 두르고, 지나가던 소가 배꼽을 빼며 웃을 정도가 아니라 미치고 팔짝 뛸 정도의 의학적 소견이자 판단이다.
그렇다면 전국적으로 매일 수도 없이 발생하는 교통사고도 그 자리에서 몸이 아스러지거나 의학적으로 “사망”이라 할 수 있는 심장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서 짧은 시간일망정 응급치료를 받다 사망하였다면 그 사인도 교통사고에 의한 “외인사(?)”가 아니고 “병사”이어야 옳다.
1979. 10. 26궁정동 안가!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만 천하에 공개가 되었으니 세세히 재론치는 않겠다.
김재규장군이 거사를 시작하자 화장실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차지철은 김장군이 문을 부수고 차지철의 대갈통에 총알을 쑤셔 박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박정희는 머리와 심장에 총을 맞고서도 총알이 핵심부위를 비켜나 맞았는지 심장이 멈추지를 않은 상태(?)로 소격동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짧은 시간이지만 응급치료를 받다 사망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전 과정이 확실하다고 자신은 못함)
자- 그렇다면 박정희의 사인도 총격사가 아닌 병사가 된단 말인가?
김재규장군의 총격이 아니었다 해도 당시 박정희가 병사할 수 있는 여건은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김재규장군 재판에서 밝혀졌듯이 박정희는 서울시내 8곳인가에 200여명의 젊고 젊은 미희들을 대기시켜 놓고 사흘거리로 돌아가면서 그 짓거리를 했다니 이미 60을 넘긴 나이에서 체력이 바닥나 있었을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그 당시의 정국상황은 유신이 막바지 발악을 하던 때로 이미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을 타도하려는 봉홧불이 타 올라 추풍령을 넘어 일로 서울로 치닫지 직전이었다.
정국상황이 한 솥 그득한 팥죽이 펄펄 끓어오르기 직전과 같이 예서 불쑥 제서 불쑥 팥죽 공기방울이 서서히 터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젊은 미희 옆에 끼고 주물러대며 심 아무개가 뜯는 기타반주에 맞춘 “그 때 그 사람”의 매미소리를 듣는 박정희의 속인들 편했겠는가?
김재규장군의 총격이 아니었다 해도 얼마든지 체력의 소진과 심적 고통으로 인해 심장이 멈춰 병사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서울대병원당국과 백농민의 사망진단서를 발부한 담당의사에게 묻는다.
백남기농민의 사인이 병사라면, 박정희의 사인은 무엇인가?
당신들이 “병사”라는 진단서를 발부해, 검경으로 하여금 부검을 해야 된다는 구실을 주었으니 그 고매한 의학적 소견을 한 번 발표해 보기 바란다.
서울대병원 당국과 담당의사에게 상기시킨다.
치안본부 남영동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순국한 박종철 열사!
용기 있고 양심적인 의사 한 분이 아니었으면 박열사의 죽음은 영원히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은 돌연사였을 것이다.
그런 것을 부검에 참여했던 용기 있고 양심적인 의사 한 분이 도저히 사인을 책상 탁 치자 억하고 죽은 돌연사로는 발표할 수가 없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것을 만 천하에 폭로하여 박열사의 사인이 제대로 밝질 수가 있었고, 그게 도화선이 되어 6.10항쟁의 불길이 타 올라 5공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장충체육관에 거수기들 모아 놓고 뽑는 것을 그나마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오늘날의 헌법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 의사의 양심이 더러운 세월을 연장시킬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새날 새 역사를 열 수도 있다는 실례를 보여 주었다.
여론이 따갑자 서울대병원측이 백농민의 사망진단을 재논의 하겠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자!
이미 서울대병원측은 돌일 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한 번의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선 판단이 잘못 인 것을 알고서도 또 그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실수를 넘어 범죄에 다름 아니다.
한 번의 실수로 국립서울대병원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은 오점을 남겼고, 담당의사 개인적으로는 평생을 두고 괴로워해야 할 가슴에 멍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기 바란다.
박종철열사의 사망당시의 상황은 지금보다도 훨씬 살벌하였음에도, 그런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의사가 있었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병사”라는 사망진단서 때문에 검경에게 부검을 해야 된다는 빌미를 주어 장례식이 무한정 길어지고 있는 것 역시 참고하기 바란다.
서울대병원과 담당의사의 용기 있는 양심이 혼란을 짧게 할 수도 있고, 혼란을 길게 끌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