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찰 편에 선 미군
1945년 9월 8일, 4만5천명에 달하는 미군은 전투기의 엄호 아래 장갑차를 앞세우고 완전무장 상태로 인천에 들어왔다.
인천시민들은 일본에게 항복을 받아냈다는 미군을 환영하러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인천시민들을 가로막은 것은 패망한 일본경찰들이었다. 일본경찰은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인천시민들에게 총탄을 퍼부어 권병권과 이석구 등 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째서 해방된 인천 시민이 일본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을까.
미 태평양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조선 총독 아베에게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치안을 계속 유지하고 행정기구를 존속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일본군과 경찰을 동원해 조선의 정치활동과 집회를 탄압했으며 심지어 시위대에 기관총을 발포하기도 했다.
9월 8일, 미군진주과정에서 사망한 유족들은 발포한 일본경찰을 미군정에 고소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경찰의 발포를 두둔했다. 군정재판에서 ‘일본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넘은 인천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고 판결한 것이다. 미군진주 당일 발생한 총격 사건은 우리민족 앞에 펼쳐질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상징이었다.
조선을 점령한 미군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의 역할은 9월 7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문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맥아더는 포고문에서 “본인이 지휘하는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라고 하여 스스로 점령군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력과 복종이 요구된다”고 하여 조선의 복종을 강요했다.
아울러 포고문 2조에서는 “정부, 공공단체 및 ... (중략)...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며 해방과 더불어 줄행랑 쳤던 총독부 친일파들을 재생시켜 주고 그들의 재산도 보장해주었다.
맥아더는 포고문 3조에서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라며 미군의 절대적 지위와 조선의 복종을 명확히 했다.
게다가 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일제 통치기구가 가장 효과적인 운영방법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용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1945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의하면, 하지는 ‘전 조선 총독이 가지던 직권과 권리를 나 자신, 즉 군정장관 아놀드가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미 국무부도 주둔군 사령관 하지에게 ‘첫째 조선의 통치방식은 일제의 통치방식을 계승할 것, 둘째 일제의 군사, 경찰, 관료기구를 그대로 넘겨받을 것, 셋째 조선에 대한 분열정책을 최대한 유효하게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어받은 미군은 관리들도 일본인, 친일파를 그대로 유임시켰고 나중에 자문역할을 하게 했다. 김성수와 같은 대지주 출신 친일파가 친미파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도 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