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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필리핀은 왜 '악마'가 되었나?
필리핀과 남중국해 그리고 두테르테
7월 12일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관한 헤이그 판결이 났다. 처음부터 이상한 재판이었다. 중국과 필리핀이 당사자 간 협의로 해양 분쟁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 1995년이다. 20년 가까이 별 문제가 없었다. 별안간 필리핀 단독으로 제소한 것이다. 해양 분쟁 조정은 당사자 전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절차가 진행되었다.
헤이그 상설 중재 재판소는 국제 사법 재판소가 아닌 고로 상주하는 판사들도 없다. 제소가 들어오면 판결을 내릴 배심원을 선발한다. 즉 중국 입장을 대변할 사람도 없이 판결이 진행된 것이다. 그럼 누가 재판 과정을 주도했는가? 야나이 순지(柳井俊二)이다. 그가 배심원 5명을 선발했다. 야나이는 누구인가? 전직 주미 일본 대사 이다. 아베 총리의 최측근 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 극우파 인 사이다. 헤이그 판결에 가장 환호했던 나라도 미국과 일본이었다. 미국-일본-필리핀의 해양 동맹이 가동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필리핀에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정권이 바뀌었다 . 중국과의 협상을 일방으로 거두고 헤이그로 달려갔던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물러났다. 그는 임기 중에 자국의 군사 기지를 미국에 재차 내준 인물이다. 그 아키노의 후계자를 500만 표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정권을 접수한 이가 로드리고 두테르테이다.
선거 직후부터 독자 노선을 천명했다.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했다 . 본인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정확한 설명과 보고 없이는 미군이 필리핀 기지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헤이그 판결과 무관하게 중국과의 직접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판결 선고 이틀 후에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할 계획까지 밝혔다.
라모스는 1995년 합의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때처럼 남중국해의 공동 이용, 공동 개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대신에 중국이 필리핀의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항만 건설 등 인프라 정비를 지원해주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 편이 미군의 항공모함이 수빅 만에 돌아오는 것보다 이롭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견해이다. 상식에 부합하는 판단이다.
선거 기간 그에 대한 마타도어가 난무했다. "필리핀의 트럼프"라며 혹평했다 . '교조적 민주주의자'들의 교묘한 프레임이다. 두테르테는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리얼리티 쇼의 스타가 아니다. 실력으로 검증된 인사이다. 그가 다스렸던 도시가 다바오(Davao)이다. 필리핀 견문 당시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한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시키는 무정부적 도시 였다고 한다. 마약에 찌든 범죄자들의 소굴이었다. 그 곳을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 두테르테였다. 마닐라에서 만났던 월든 벨로 또한 두테르테와 친분이 있었다. 미군의 필리핀 재진입과 남중국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하셨다.
두테르테는 자칭 '사회주의자'이다. 필리핀 독립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자가 당선되었다. 최초의 좌파 정부가 탄생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좌/우는 부차적이다. 상/하의 역전, 흙수저의 반란이다. 식민지와 속국에 기생하며 대대손손 호가호위했던 필리핀의 지배 계급에 대한 도전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아래서 지속되었던 가문 정치와 토호 정치, 격차 사회에 대한 시정이 시작되었다. 식민지 근대화와 속국 민주화 100년 동안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며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엘리트들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선거 혁명'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터키만큼이나 필리핀에서도 100년만의 대역전이 전개 중이다.
즉 유럽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군사주의는 작금 남중국해 사태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과 해양 경계선 또한 대부분 식민모국들이 그어둔 것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현재의 해양 국경으로 갈라진 것은 152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이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경계는 1842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은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해양 경계는 1887년 프랑스가 그었다. 필리핀의 해양 경계 또한 1898년 미국과 스페인에 의해서 그어졌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경계는 1930년 미국과 영국에 의해서 그어졌다. 죄다 서세동점의 유산 이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국경 분쟁을 해소할 수 없었다. 서세가 여전히 드셌기 때문이다. 미/소가 강요하는 냉전 체제에 휘말려 들어갔다. 우파 국가와 좌파 국가로 갈라섰다. 199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간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과 주변 국가들 간에, 중국과 아세안 간에, 그리고 아세안 내부 국가들 사이에 수많은 공동 개발 사업이 합의되고 이행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돌연 갈등이 증폭된 것이다. 여기서 재차 '외부 세력'이 등장한다. 중동에서 아시아로 축을 옮기겠다고 한 나라가 있었다. 미국에서 '축의 이동(Pivot to Asia)'이 발표된 것이 2011년이다
터키 에르도안, 친 러시아.. 친시리아로 방향선회
7월 15일 밤과 16일 새벽은 터키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쿠데타가 좌초되었다. 현장에 있었다. 이란 생활을 마치고 막 터키로 옮겨온 차였다. 아침형 인간이다. 10시면 잔다. 글도 아침에만 쓴다. 일찍 잘수록 생산력이 는다. 탓에 격동의 밤을 지켜보지 못했다. 두고두고 아쉽다.
CNN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포위된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NBC의 특파원은 에르도안이 독일로 망명할 것이라는 트위터를 날렸다(가 지웠다). 쿠데타 진압이 완료되자 FOX는 "터키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논평을 냈다. BBC 홈페이지는 "터키의 무자비한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하루 종일 메인에 걸었다.
<뉴욕타임스>는 에르도안 지지자들을 '양(sheep)'에 빗대었다. "에르도안의 명령에 따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폭력적인 군중"이라는 칼럼까지 실렸다. 자작극이라는 음모설까지 보태었다. 편집 또한 자의적이었다. 혹은 악의적이었다. 에르도안 지지자와 반대자들 간 갈등을 묘사하는(부추기는?) 사진들이 넘쳐났다.
쿠데타 전후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아래로도 훑어볼 필요가 있다. 터키의 외교 정책이 크게 변하고 있던 시점이다. 터키의 아래로는 시리아가 있다. 터키의 위에는 러시아가 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양국의 접근이 전혀 달랐다. 터키는 미국과 NATO편에 섰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 이라크의 후세인처럼,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제거하려 했다.
정작 IS 격퇴는 뒷전이었다. 아니 뒷문을 열어 IS 팽창에 일조한 것이 터키였다. IS에 지원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터키의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갔다. 미국과 NATO도 묵인했다. '테러와의 전쟁'보다 '체제 전환'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 반대편에 러시아와 이란이 있었다. 두 나라는 아사드 정권을 도와 IS 퇴치에 앞장섰다. 시리아 내전은 일종의 준 '세계 대전'이었고, 터키와 러시아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즐겨 읽던 러시아 언론들도 몽땅 차단되어 있던 것이다.
이 교착 국면에서 에르도안이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러시아와 이란과 합작하여 시리아 내전 종식에 나서기로 했다. 푸틴과의 정상 회담도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그때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누가 이익을 보았을 것인가? 터키는 NATO 가맹국이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핵심 국가이다. 미국의 중동 정책을 매개하는 국가였고, 러시아 압박의 최전선에 자리한 나라도 터키였다.
에르도안이 쿠데타의 배후로 미국과 서방을 정조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고 있다. 이참에 군대, 학교, 언론 등에 근거지를 둔 친서방파 혹은 자유주의파와 세속주의자를 일망타진하고 있다. '외부 세력'과 공모하는 내부자를 발본색원하고 있다. 야당까지 일치단결이다. 51%로 당선된 에르도안의 지지율은 80%까지 치솟았다. '내정 간섭' 혐의가 먹혀든 것이다. 선전과 선동에 능란하다. 100만 명이 운집한 이스탄불 집회는 터키가 '다른 백 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에르도안은 마치 술탄인양 보였다.
터키는 오스만제국 붕괴 이래 100년간 서구화를 국책으로 삼았던 나라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구미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발버둥 쳤다. 10개월간 기껏 고생해서 배운 아랍어가 이스탄불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근대화를 한답시고 아랍어도 버리고 로마자 알파벳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턱 밑에 자리한 냉전의 파수꾼이자, 미국의 중동 정책을 매개하는 첨병이었다.
에르도안은 이 100년의 실험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새천년 집권 이래 탈서구화와 재이슬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뜩이나 유로존 위기와 브렉시트로 EU 가입의 매력이 확 떨어지던 차였다. 터키식 '재균형'이고 '신상태'이다. 일각에서는 NATO 탈퇴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가입을 전망하기도 한다. 아직은 성급한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