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남서부 깡시골을 실컷 체험하고 있다고 여기 보고했던 처자입니다 ㅎㅎ
지금은 독일 중부 한국인 절친 집에 있고요, 이제 무지무지 더운 이탈리아로 곧 돌아가요.
모허 절벽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갔다 와서 몸살이 나는 바람에
친구 엄마 아빠에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어요.
친구 집이 제 집인 것처럼 드러누워 대접받고
한국 친구가 사는 독일로 왔어요.
여긴 어제 뮌헨에서 총기테러가 일어나서…
모허 절벽 가는 날.
아침을 먹고 차를 몰고 출발 40분을 달려서
큰 도시에 사는 제 친구 대학 동기를 한 명 태워서 같이 갔어요.
한국 사람과 사실상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다는 그 친구.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아주 소박했고, 주변은 전부 구릉지대였어요.
뾰족한 산들이 없이 완만하게 뻗어나간 지형들.
참 다채롭게 날씨가 변화했어요. 햇빛이 구름 사이로 조금 비치다가,
다시 차창을 와이퍼로 닦아내야 할만큼 빗발이 들이치다가, 다시 두꺼운 구름을 마주하다가.
제가 왜 몸살이 났냐면요.
모허 절벽에 도착하니…
비가 지면과 평행으로 오고 있었어요.
비가 위에서 오는게 아니라 옆에서 오는 중…
제 친구가 혹시나 해서 비닐 우비를 두 개 가져왔다며 하나를 줘서 그거 입고 나갔는데
무릎 아래로는 금새 다 젖었고 안경을 끼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쳤어요.
친구 동기가 저한테 허리에 스페어 타이어라도 하나 묶어놔야지
안 그러면 넌 날아갈거라면서 농담을 할 정도였어요.
모허 절벽은 진짜 절벽뿐이었어요. 너무 솔직한 관광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모허라는 이름이 붙은 절벽.
비바람 속의 모허 절벽은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굉장했어요.
구릉이 끝나는 곳에 바로 깎아내린 수직 절벽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어요.
꼭 땅을 도끼로 패어내서 반으로 갈라 절반을 들어낸 것 같았어요.
비바람 소리, 우비 모자를 때리는 빗소리에 휘말려서 바다 소리는 들을 수도 없었고
저 아득 아래에는 검회색 바다가 있었어요.
눈앞에 펼쳐진 장면도 장관인데 비바람 음향효과까지 겹쳐서
그때의 기분은 천지창조후 아직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인 태고적으로 돌아간 듯 했어요.
살아있는거라곤 사람들 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거든요.
제가 쫄딱 젖어서 춥기 시작했기 때문에 좀 일찍 내려왔어요.
아일랜드 본토 두 남자도 얼굴에 비바람이 들이쳐서 얼굴에 물이 흘러내릴 정도였지만
뭐 이쯤이야… 하는 것 같았어요.
근처 펍에서 피쉬앤칩스로 점심을 먹었어요.
친구는 왜 그런 걸로 점심을 먹냐는 입장이었지만
저는 누구에겐가 피쉬앤칩스를 아일랜드 펍에서 먹어봤다고 자랑해야 하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걸 시켜먹었어요.
생각보다 튀긴감자가 바삭해서 먹을만 했어요.
너무 추워서 맥주는 마시지 않았어요.
옆자리에 아일랜드 아저씨 둘이서 점심을 먹으며 이따만한 맥주컵으로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어요.
건너 자리의 아일랜드 남자 둘, 동양 여자 한 명의 조합이 신기했는지
(게다가 저는 친구와 떠들 때는 이탈리아어, 친구의 친구와 이야기할 때는 영어로 떠드는 중)
흥미로운 얼굴로 쳐다보는 중이었어요.
어쩌다가 말을 트게 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그 아저씨들 수다 시작.
제 자리에는 맥주도 없고, 피쉬앤칩스의 감자가 너무 많아서 접시에 남긴 상태였거든요.
한 아저씨가 아일랜드에서 점심을 먹는데 맥주도 없고 감자도 먹지 않냐면서 참견을 했어요.
“제가 튀긴 감자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맥주도 많이 못 마시고요.”
이랬더니
그 아저씨가 윙크를 하면서 큰 소리로
“난 맥주도 마시고 감자도 먹을거야! 난 아일랜드인이니까!”
이러면서 자기 접시의 감자를 손으로 푹 집어 입에 집어넣더니
절반쯤 남은 맥주를 원샷해 보였어요.
얼떨결에 우리 모두 환호성과 박수를 ㅋ
점심 먹고 나오니 언제 비바람이 쳤었냐는 듯이 구름만 깔려 있고 날씨가 멀쩡해졌어요.
근데 돌아와서 결국은 몸살에 걸렸어요 아놔.
밤중부터 아프기 시작해서ㅠㅠ 민폐도 이런 민폐가 ㅠ
날씨도 비오고 습하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포리지 묽게 끓여달래서 죽 대신 먹고 약 먹고
온수주머니 끌어안고 전기 히터 틀어놓고 죽은 듯이 잤어요.
저번 글 댓글에 매의 눈을 한 언니들이
이 빨간머리 아일랜드 친구와 어떤 사이냐고 물으시던데
……
그게 바로 저의 고민인데요……
아래의 이야기는 금방 지울께요 넘 개인적인 이야기라 ㅠㅠㅠㅠ
유럽에 있는 동안 한국인 외국인 등등 여러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다 지나간 사이지만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어요.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나와 대화가 통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사이면 누구라도 좋다는게 외국에서 살면서 다져온 제 생각인데요.
사실 이 친구가 저를 좋아해요.
자세한 건 못 쓰겠고… 저는 취업만 되면 유럽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는 남자가 한국사람이 아니어도 별 상관 없었고 이탈리아나 주변 나라 정도 살면 괜찮겠다 하고 있었어요.
아일랜드 남자는 이 친구가 처음이에요. 이 친구는 더블린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자기 고향에서 취직을 할 생각이에요.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9개월 와 있으면서 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청강했어요. 원래 열정은 고전 문학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그것과 상관없는 엉뚱한 직업. 이탈리아에서도 가끔 아이리쉬펍에 맥주 마시러 갈 뿐이고 청강생 주제에 저보다 더 열심히 아침 1교시부터 학교가고 혼자 밥해먹고 평일에도 가끔 동네 성당 나가고, 아일랜드인 성당에 나가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자유시간이라면서.
이 친구 형들 중에 두 명이 천주교 신부님이에요. 자기 포함 형제들 모두 친주교 단체 신부님들이 운영하는 사립 남자 기숙 학교를 졸업했고 친가 외가 친척 중에 나이 드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있어요.
순수하고 우직하고 바른생활맨처럼 보이고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별로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았어요. 제가 영어 때문에 뭘 부탁한게 처음이었는데 그걸 계기로 친해지고 나서 계속 함께 다니게 된 거였어요. 저한테 고백을 했을 때 좀 당황했어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랬더니 당황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아직은 네게 나를 알려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둘지 않을테니 그냥 우선 친구로 지내자, 괜찮다면 방학 때 우리 집에 놀러올래? 친구로? 이렇게 해서 그 친구가 6월 초에 귀국했고 저는 7월 초에 여기 오게 된…
친구 엄마 아빠 집에 갔다 와서 생긴 부작용은… 친구 엄마 아빠가 너무나 편하게 대해 주셔서 그 집이 정말 정들고 좋아요;;; 처음으로 한국인을 집에 맞아들인 셈인데 오래 알던 옆집 여자애가 놀러온 것처럼 대해주셨어요. 사실 이탈리아에 9개월 지내러 갔던 아들이 거기서 알게 되었다며 난데없이 동양 여자를 데려와 거의 열흘을 비빈 셈인데 이렇게 쿨한 듯 따뜻한 돌봄을 받은 것에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있어요. 떠나기 전날 저녁 먹으면서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선물로 한국 노래와 이탈리아 노래 메들리 불러드렸어요. 제가 노래를 좀 잘하거든요 ㅎㅎㅎㅎㅎ 재롱잔치 ㅋ 막 좋아하면서 신기해 하시면서 어떤 노래는 듣기 좋다고 하셨어요. 두 분 다 저를 꽉 안으면서 언제든지 또 오라고 하셨어요.
아무튼 저의 고민은…… 아일랜드 남서부, 한국 사람을 처음 봤다고 하는 동네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이 친구를 믿고 평생 살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에요.
지금 독일에서는 독일 남자와 사는 절친 집에 있어요.
같이 이탈리아로 갈거구요.
보니까, 외국남자와 같이 살지만 큰 도시이고 다른 한국사람들도 많고 외국인도 많으니 활기 있고 지낼만해 보이거든요. 제가 사는 이탈리아 도시처럼요.
근데 아일랜드 그곳은… 한국 사람 포함 극동 아시아 사람과 처음 이야기를 해본다고 하는 이웃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쓰고 보니 왠지 제가 무지 속물에 계산적인 거 같아보여요ㅠㅠ
하지만 제 인생의 나머지를 함께 보낼 사람과 장소라는 걸 생각하면…
아주 많이 이 친구를 사랑한다면 그런 고민 다 접을 수 있는거겠죠? 영어도 하라면 기를 쓰고 하겠지만 아직은 불편한 그 언어를 가지고, 제가 공부한 걸로 직업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아일랜드의 시골 도시에서 산다는 건… 저에게 막막하게 다가와요.
이 친구네는 전형적인 아일랜드 천주교 신자 가족인데 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에요. 지금 시점에서는 그러나 종교가 크게 문제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어릴 때 교회에 좀 다녔기 때문에 성당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건 부수적인 문제고, 가장 큰 문제는… 아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내가 이 빨간머리를 진짜 사랑하는가? 하는거네요…… 사실은 이 고민이 감당이 안되어서 밤에 혼자 울 때도 있어요. 여러 남친들이 있었지만 지금 가장 고민을 하고 있어요.
아무튼 이러고 있어요 ㅠㅠㅠ
마음 오락가락한다고 혼내지 말아주세요 ㅠㅠ 저도 바보같아서 답답해요 ㅠㅠㅠ 집에는 아직 이야기를 안 했어요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