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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아일랜드 깡시골 숲속이야기

챠오 조회수 : 3,339
작성일 : 2016-07-14 16:01:43
안녕하세요 ㅎㅎㅎㅎ
어제 밤에 썼는데 인터넷 연결이 끊어져서
올릴 수가 없었어요.
같이 좋아해주셔서 저도 행복해요^^
전 인문과학 전공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뭔가 쓰는 걸 좋아해요.

이제 아침먹으러 내려가요!

-------------

오전에 비가 오락가락 했어요.

제 친구는 아래 큰 동네 마트에 엄마 심부름 갔고

저는 친구 아빠 산딸기 따러 나간다고 하셔서 따라갔어요.

친구 아빠… 어제처럼 이 날씨에 반팔 티셔츠;;;

팔뚝이 엄청 굵고 빨간 털이 한 겹 둘러싸여 있어요.

저는 후리스에 바람막이에 면스카프를 목에 휘감고 북극 탐험하러 갈 기세 ㅋㅋㅋ

집안에서 최신 이중 창문을 꼭 닫고 앉아 있으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세찬 비바람에 쓰러질 것 같이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지만

소리가 전혀 안들려서 꼭 음소거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위협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거든요.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제 뺨따구를 차갑게 때리며 작렬하는 바람 소리…

숲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안개비를 품은 바람 때문에 겉옷은 축축해졌어요.

친구 아빠는 한 손에 흰색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 관목들을 전투적으로 막 헤치고 들어가면서

저보고 따라올 수 있겠냐고 ㅎㅎㅎㅎ

오기가 생겨서 그럼요! 오케이.

라슾베리?라고 하는 새끼손톱만한 선홍색 투명 구슬같은 베리들이 잔뜩 열린 곳에 들어가니

비는 주룩주룩 오기 시작 ㅎㅎ그냥 다 포기했더니 춥지만 마음이 편해졌어요.

까짓거 좀 젖으면 어때? 돌아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홍차 마시면 되는 거 아냐?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빗발이 나무들을 때리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열매를 따는 데에만 집중했어요.

그 순간만은 채집생활을 하는 원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친구 아빠는 털이 숭숭 난 엄청 큰 손으로

그에 비해 엄청 작은 선홍색 알맹이들을 따서 모으시는데

얼마나 손놀림이 섬세한지 옆에서 훔쳐보며 감탄 ㅋㅋㅋㅋ

매일 아침 포리지도 친구 아빠 담당이에요 ㅎㅎㅎ

오트밀 재료 같은 것에 작은 건포도와 호박씨가 추가로 들어가요.



아무튼 2리터 들이 양동이 절반을 채우는 데 성공.

신발은 엉망이 되었고 얼굴도 옷도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가운데 묵묵히 걸어 집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아빠가 제 바람막이를 벗겨 탁탁 털어 입구에 걸어두시는 동안

저는 집안 카페트를 망칠까봐 신발 양말만 벗고 제 방 욕실로 직행.

샤워기를 틀어 뜨거운 물을 맞으니 진심 조난 당했다가 살아난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평생에 일부러라도 이렇게 비를 쫄딱 맞고 온통 젖어본 기억이 없는데

새로운 체험을 하나 했어요.

비를 맞으면 녹아서 죽기라도 할 것처럼 엄살을 떨면서

우산 없이 밖에 나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었는데

비를 맞는다고 죽는 건 아니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선홍색 열매는 어쩐지 맛은 없었어요. 시고 떫고.

그냥 먹기 위한게 아니고 이렇게 따모으는 대로 잼을 만들거나 파이를 만든대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착각에 뿌듯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쫄딱 젖어서 그런지

약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좀 늦게 점심 식사로 고기가 씹히는 수프, 닭가슴살 구이, 피망과 호박 구운 거,

후식으로 브레드 파이? 달걀과 건포도가 많이 들어간 빵 푸딩 같은 걸 먹고

발포 아스피린 하나 먹고 일단 취침 ㅎㅎㅎㅎㅎㅎㅎ

오후에는 바람이 세게 불고 여전히 회색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길고 긴 산책을 할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는 독일어코스 하느라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었지요.

여기 아일랜드는 단지 9일 동안의 일정으로 온 거지만

전적으로 쉬기 위해 왔어요.

저를 초대한 친구가 뭘 하고 싶냐길래 친구 집이 깡시골이라는 걸 미리 알았던 저는

단지 쉬고 싶을 뿐이라고 대답했었어요.

여느 아일랜드 남자들처럼 맥주를 무진장 마시지만

마시면 똑바로 누워 잠드는 착하고 내성적인 제 친구는

제 소원을 지금 열심히 들어주는 중이고 ㅋㅋㅋ



참 이상해요.

간만에 혼자 아무 것도 안한다는 것도 낯설게 느껴지고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풍경과 날씨가

제 안에 숨어있던 다른 감상적인 부분을 일깨우는 듯 해요.

오전 내내 휩쓸었던 비바람에 푹 젖은 숲속을

바람막이 후드 뒤집어쓰고 혼자 걸었어요.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숲속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센 바람에 흔들리는 높은 나무들 사이로

회색 먹구름이 낮고 빠르게 움직여서 지나가고 있었어요.

마치 제 인생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느낌이었어요.

무지 무지 센티멘탈해져서 한 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센 바람에 밀려 세상이 다 지워지고 시간만 남은 기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내가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싶을 만큼,

웬 청승이야?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리고 돌아와서

저녁 식사로 감자크로켓 큰 거 하나, 피망과 빨간 근대와 파를 썰어 올리브유와 소금을 친 샐러드,

버터 바른 빵, 우유 탄 홍차를 먹었어요.

간소하고 평범하고… 크게 화려하지는 않은 식사인데

날카롭지 않은 백열등 조명 아래서 오래된 세라믹 그릇들에 담긴 것들을 먹고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져요.





아참 친구 엄마 아빠한테 선물로 드리려고

초콜렛 씌운 커피콩, 무슨 수도원에서 만든 수제 초콜렛,

리몬첼로 한 병, 커피로 만든 리쾨르 한 병, 발사믹 식초 한 병

오렌지 마르멜라타 한 병, 밤으로 만든 마르멜라타 한 병,

무지개색 나비모양 파스타 한 봉지 (이것들 땜에 부치는 캐리어 들고 온 ㅋㅋㅋ)

레몬오일로 만든 비누, 한국에서 가져온 색색의 아크릴 수세미, 색동 주머니 같은 걸로

아일랜드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지고 왔어요.

친구 엄마가 ㅋㅋㅋㅋㅋ 친구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올 때 맨주먹으로 돌아왔다고ㅋㅋㅋ

역시 남자들은 만국 공통으로 무신경한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지방 특산품 가게에 가면 염소젖으로 만든 비누를 판다네요. 어디에 좋은 걸까?

큰 동네 나가면 하나 사 볼 계획이에요 ㅎㅎㅎㅎㅎ
IP : 5.169.xxx.135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비비
    '16.7.14 4:12 PM (223.62.xxx.68)

    나두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이야기~~^^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부산 입니다
    햇살에 눈 부시고!!
    원글님이 묘사하신 거 하나 하나 떠올리며 나두 모르게 아일랜드 촌 구성으로 풍덩 시간 공간 여행했어요

    근데 남자 칭구분 혹시 애인??( 소근 거리는 목소리로)

  • 2. ..
    '16.7.14 4:16 PM (122.35.xxx.138)

    아웅~첫번째로 댓글 써요. 인문학도군요. 멋져요. 사람들이 착함이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아요. 친구랑 그 부모님이랑. 그리고 글쓴이님도.
    선물이 푸짐해서(?) 어머님이 좋아하셨을듯...거긴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폭풍의 나라같은 느낌이네요. 아프지 말고 잘 쉬시고
    남자들만 친구분과는 로맨스는 없는 건가요.? 난 왜 이렇게 궁금하죠? 주책...쿨럭

  • 3. ..
    '16.7.14 4:17 PM (122.35.xxx.138)

    남자들만-남자사람 오타입니당

  • 4. 쌀국수n라임
    '16.7.14 4:53 PM (1.231.xxx.247)

    서울의 7월 더위 속에서 님 글을 읽으니 축축한 비오는 북유럽 숲속에서 저로 같이 베리를 따는 것 같네요.
    그리고 나의 모든 시간이 이렇게 흘러 가는 게 느껴진다는 글에서...ㅠㅡㅠ 감동....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겠네요.
    아일랜드....

  • 5. 냐아옹
    '16.7.14 6:04 PM (124.50.xxx.43) - 삭제된댓글

    글이 너무 좋아요^^

  • 6. ^^
    '16.7.14 6:06 PM (116.120.xxx.76)

    단순한 관광이 아닌 삶을 함께하는 여행 좋네요
    생생하게 묘사해주시니 영화를 보는것 같아요^^

  • 7. ㅇㅇ
    '16.7.14 6:28 PM (49.165.xxx.43)

    어우 너무 재미있어요.
    아일랜드 얘기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돌아가서도 종종 글 올려주세요~

  • 8.
    '16.7.14 6:58 PM (175.223.xxx.120)

    풍경이 영화처럼 내 머리속으로 지나가네요.
    비오는 어두컴컴한 숲속에 서있는 느낌도 생생하고
    따뜻한 밀크티도 같이 마시는것 같고...
    넘 좋습니다~^^

  • 9. 오오
    '16.7.14 7:02 PM (220.83.xxx.188)

    이런 글 만나고 싶어서
    못된 키보드 워리어 악플을 참고 82에 남아있어요.

  • 10. jeniffer
    '16.7.14 7:35 PM (110.9.xxx.236)

    또 재밌어요. 직접 제가 보고 느끼는 것같은 착각으로 한숨에 쭉 읽어 내려갔어요.
    또 또 재밌고 싶어요.
    초꼬쒸운 커피콩은 어떤 맛이예요?

  • 11. wow
    '16.7.14 8:05 PM (1.241.xxx.88)

    또올려주셨네요~ 원글님 글 읽는동안은 한여름 저녁인데도 더운걸 잊게 되네요. 읽기쉽게, 재미있게, 생생하게 참 잘 쓰세요. 아프지 마시고, 다음편 또 부탁드릴께요ㅡ

  • 12. ㅆㅆ
    '16.7.14 8:23 PM (120.16.xxx.3)

    저도 남편과 한 십년전 아일랜드 갔었는 데 더블린 가면 무슨 대학 하나 있어요, 거기 도서관이 좀 괜찮으니 함 둘러보시고~ 시내도 아주 작지만 괜찮아요~
    동네는 집들이 아주 똑같아서 길 잃으면 아주 헤멜듯..
    저도 바람 쌩쌩부는 데 무슨 절벽가서 찍은 사진 있는 듯 하네용
    날씨가 꽝이라 실제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저 사는 곳도 블랙베리 따다 먹고 그러는 데 이번에 많이 새싹난 뿌리를 줏어다 아주 심어버렸네요^^ 여름에 따먹는 재미가 좋죠

  • 13.
    '16.7.14 8:41 PM (59.12.xxx.242)

    생생한 아일랜드 풍경이야기 너무 좋아요.
    1편도 있다니 찾아봐야겠어요

  • 14. ㅇㅇㅇ
    '16.7.14 8:44 PM (221.139.xxx.19)

    모헤어절벽 잘 다녀오셨어요? 골웨이도 다시가고 싶고...
    글 너무 좋아요. 저는 아일랜드에서 먹었던 꿀이 지금까지 먹어본 꿀중에 최고였어요.
    9일 일정이라니 신나게 즐기다 오세요. 사진도 보고싶네요.
    글 기다립니다~

  • 15. 드라마
    '16.7.14 9:54 PM (79.213.xxx.94)

    잭 타일러 안보셨으면 한 번 보세요.

  • 16. 마중물
    '16.7.15 12:16 AM (125.176.xxx.34) - 삭제된댓글

    와우~
    이런 글 읽는 재미에 82를 떠날수가 없어요.
    아련한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기분이예요.
    원글님
    바쁘시더라도 종종 글 올려주세요.^^

  • 17. 아~
    '17.8.12 9:31 AM (1.234.xxx.11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너무 좋아
    속편인 스칼렛도 읽었는데 스칼렛의 아이랜드가 그대로
    세세히 눈앞에 펼쳐지는 군요.
    정감가는 친구 부모님까지 작품 이야기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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