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그날 이후 가장 많이 변한 것은 5월 18일만 되면 한국의 모든 정치인이 광주로 집결한다는 것이다. 이제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는 ‘정치묘지’가 된 느낌이다. 선거철이나 중요한 정치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은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영령들께 마치 허락이라도 받을 듯 굳은 맹세를 하곤 한다. 왜 정치인들은 통과의례처럼 국립518민주묘지의 헌화를 밥먹듯 하는가. 광주정신의 가치가 스며있는 국립5·18민주묘지의 희생자들이 염원했던 것이 민주인권평화, 민주주의 가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정치인이 빠져나간 5월19일 아침, 필자는 그 많은 정치인들이 광주에서 와서 무슨 약속을 하고 무슨 의지를 피력했는지 뒤져보지만, 뾰족한 얘기는 없다. 적어도 그 수많은 정치인들이 광주에 모일때 ‘뭔가 광주를 위로할만한 그 무엇’을 기대했던 필자는 매번 배반감을 느낀다. 광주는 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다 내어주기만 할뿐, 이번 36주기에도 정치인들에게 ‘광주의 자식들을 어찌할거요?’ 묻지 못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주역들의 자식들이 이제 취직할 나이가 되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좀 해주시오, 그런 뻔뻔한 이야기를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36년 되었으면 이제 속 얘기,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광주매일신문은 지난 4월 ‘광주정신, 미래를 말한다’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광주가 잘살기 위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 기초단체장과 거물 정치인이 따로 만나 광주·전남의 시급한 현안을 논의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정치인들은 금남로와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과거’와 대화하고 ‘현재’와 ‘미래’는 방치하고 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번 5·18광주민주화운동 36주기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열심히 5·18에 관심을 보인 정치인들이 아니라 소설가 한강(46)이었다. 소설가 한승원씨의 딸인 그녀는 5월16일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위원회가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 겸 시상식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하자 국내가 발칵 뒤집어졌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그녀의 수상작은 ‘채식주의자’였지만 각 언론은 5월18일 일제히 그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주목했다.
2014년 제29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당시 계엄군에 맞서던 중학생 동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내적 외적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제1장에서 주인공 동호는 친구 정대와 함께 도청 광장에서 항쟁의 선두에 섰지만, 정대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도 그에게 달려가지 못한다.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에서 일을 돕다가 집으로 돌아온 동호는 정대의 빈자리를 보고 슬픔에 젖어 하염없이 운다.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통해 저자 특유의 정교하고도 밀도 있는 문장으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맞게 된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고통 받는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그날, 돌아오라는 엄마와 돌아가라는 형, 누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동호는 도청에 남는다.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은 5·18 이후 경찰에 연행되어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살아 있다는 것을 치욕스러운 고통으로 여기거나 일상을 회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저자는 5·18 당시 숨죽이며 고통 받았던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소년이 온다’는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가의 부조리한 폭력에 맞서 시위현장으로 나서야 했던 ‘깨끗하고도 무서운 양심’을 절절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작가는 말했다. “제가 작품을 썼다기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80년 광주를 체험했던 시민들이 작품을 썼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글을 쓰는 동안 저의 삶을 온전히 그분들께 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던 것 같다.”
18일 아침, 광주 언론사 사장단과 국민의당 지도부 조찬간담회에서 안철수 대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 한 대목을 읽으며 한없이 울었다고 얘기했다. 광주가 얼마나 아팠는지 온몸으로 느꼈다고 했다. 안철수 대표처럼 지금 많은 이들이 ‘소년이 온다’를 구매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인들보다 소설가 한강이 더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무고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진심 어린 문장들로 어느덧 그 시절을 잊고 무심하게 5·18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여전히 5·18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무한다. ‘소년이 온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치인들이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광주의 장례식에 와서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 당신들이 상주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 고작 그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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