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노만 소프(Norman thorpe, 아시아월스트리트 저널)는 사방에서 날라 오는 총탄을 피하며 그날의 참상을 기록했다. 그가 작성한 기사는 해외로 건너가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그리고 다시 36년 만에 찾은 광주에서 그날의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환대 속에 치러진 이번 방문은 피해야 할 공포가 아니라 전하고 알려야 할 생생한 기억의 일부가 됐다.
노만 소프를 비롯해 5·18의 진실을 전했던 외신기자 4명이 16일 광주를 다시 찾았다. 브래들리 마틴(Bradeley martin, 당시 볼티모어 선 도쿄지국장), 도날드 커크(Donald Kirtk, 시카고 트리뷰), 팀 셔록(Tim shorrock, 저널 오브 커머스)와 함께 광주 금남로 등 5·18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이어 이날 오후에는 금남로에 위치한 5·18 기록관에서 광주시민과 함께 ‘생생토크’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 외신기자들은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5·18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특히 5·18 당시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며 희생된 윤상원 열사에 대해 외신기자 브래들리 마틴이 떠올린 기억은 큰 울림을 줬다.
“5월26일 YMCA에서 항쟁 지도부는 외신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때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 윤상원에게 ‘군사정권이 진격해 들어오는데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죽을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브래들리 마틴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윤상원 열사와의 대화를 에세이 형식의 기사로 보도했다. 그것이 윤상원 열사가 27일 산화하기 전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증언이 됐다.
도날드 커크는 현장에서 취재했던 장면을 스케치 하듯 묘사했다.
“광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곽을 통해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민들이 시위를 이끌고 있었고 군인들은 도시를 장악했다. 시위대들은 내 여권 내역을 복사해 프레스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몇 해 동안 그것을 지갑에 지니고 다녔다. 아쉽게도 지갑을 잃어버려 지금은 없다.”
5·18 이후 그가 찾지 못한 것은 지갑만이 아니라 당시 현장을 누비며 인터뷰 했던 시민군들의 살아있는 얼굴들이다.
5·18 이후 광주의 진실에 대해 끌텅을 팠던 기자도 참석했다. 팀 셔록은 1996년 ‘저널오브커머스’와 한국의 ‘시사저널’에 행정부가 1980년 군사 쿠테타 계획에 얼마나 연루돼 있는지를 폭로하는 연재기사를 썼다.
“미국 정부가 보고 받은 1980년 5월 광주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이 달랐다. 군인들은 당시 한미 합동사령부 사령관 존 위컴의 승인에 따라 파병됐다. 미 정부의 최 고위급이 내린 결정이었다. 미군이 민주화 운동 세력의 편에 섰을 것이라 믿었던 광주 시민들이게 이는 잊지 못할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외신기자들은 “아직까지 미국은 5·18 당시 미국 개입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국가 폭력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시민들의 희생을 왜곡하는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한편 이날 외신기자들과 함께 80년해직언론인협회 회원들도 참석해 “80년 5월 광주를 왜곡, 폄훼하는 세력은 엄단해야 한다”며 검열과 폭압 속의 당시 국내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