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4월 18일 장충단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의 총통제 영구집권을 경고한 연설..
박정희의 10월 유신, 종신독재 개막
1971년 ‘4·27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박정희 후보는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라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의 공언이 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기대했던 “3선만 하고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주장한 “이번에 박정희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경고대로 현실화한 것은 한국 정치사의 최대 비극이다.
종신집권 추진에 앞서 박정희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이유로 71년 12월6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27일에는 국회에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법은 집회 및 시위와 언론출판 규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규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특별조치를 위반하는 자에게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72년 박정희는 북한의 김일성과 비밀리에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을 깜짝 발표해 국민들이 남북 교류와 통일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사이, 10월17일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고,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겠다’는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바로 ‘유신헌법’의 탄생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영구집권만을 꾀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직접 지휘하고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이 비밀작업을 통해 추진한 ‘유신헌법안’은 당시 법무부에 파견되어 있던 검사 김기춘(현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이 실무를 맡았다. 유신헌법안의 핵심은 ‘삼권분립의 파괴’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으로 압축된다.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의 임면권을 넘겼다. 이로써 사법부는 ‘독립된 법 집행기구’가 아니라 ‘유신 대통령’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또한 유신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며, 국회해산권을 가진다. 반면 국회는 대통령 탄핵권과 국정감사권을 가질 수 없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소선거구에서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도시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국회의원을 1 대 1로 나눠 가지게 돼 국회는 언제나 대통령 지명 관선의원 3분의 1과 합쳐 3분의 2 정도의 의석을 차지한 집권여당 몫이 되었다.이처럼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을 제도적으로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대통령에게 ‘긴급조치를 취할 비상 권한’을 부여했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사유물로 만들었다”며, 유신헌법의 긴급조치권에 대해 “이는 긴급 시에 의회를 거치지 않고 ‘칙령’을 반포할 수 있는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천황대권’이 원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유신>, 한겨레출판, 2014)
애초 71년 3선 연임 이래 박정희의 ‘1인 지배체제’를 막을 제도적 장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때부터 박정희 독재의 존속기간은 박정희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박정희는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종신 독재’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헌법상 3선 금지 조항을 스스로 깼고,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넘어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총통제 대통령’이 되었다. 필자/성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