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변호사는 28일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새누리당의 독주를 막고 주도권을 찾아오겠다”고 밝혔다.
제46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장진영 변호사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자율분쟁 조정위원, 온라인광고분쟁조정위원회 조정위원, 제45ㆍ46대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 2012년 3월 디도스 특별검사 수사팀 특별수사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소비자정의센터 운영위원장,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국민의당 대변인을 맡고 있다.
장진영 변호사는 10년간 소비자 운동을 계속했고, sbs tv로펌 솔로몬, mbc 무한도전 등 8년간 방송에 출연하며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다.
<다음은 장진영 변호사 출마 선언문 전문>
저는 오늘 20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 선거구에 출마할 것을 선언합니다.
작년 11월 저는 제1 야당의 변화를 위해 밖에서 외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 전혀 변할 것 같지 않던 제1 야당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변화하는 정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완전히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목표는 새누리당의 독주를 막고 주도권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누리당으로부터 제고향 동작을을 찾아오기 위한 도전에 나섭니다.
저는 첫 직장인 아시아나 항공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던 중 IMF를 겪고 뒤늦게 30세에 사법시험에 도전하였습니다. 사법연수원 2년차에 국내 1위 신용카드 회사를 상대로 혼자 소송을 제기한 이후 10년간 소비자 운동을 계속했고, sbs tv로펌 솔로몬, mbc 무한도전 등 8년간 줄곧 방송을 해왔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두가지 가치인 재미와 의미를 모두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편하고 즐거울 삶을 두고 왜 진흙탕인 정치권으로 가느냐는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전남 보성 복내 출신이지만 복내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습니다. 9살에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고향사람들이 초등학교 기수를 물어볼 때 아버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벌어 모은 재산으로 고향 후배들이 돈 없어 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장학회를 세워 못 배운 한을 푸셨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철거민 신세였던 제 아버지는 5남매를 자신보다 훨씬 많이 가르치셨고 저희 5남매는 부모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이 저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소득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탓에 자녀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더 가난해 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제 뿐 아닙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마저 조롱하는 반인륜행위, 생각이 다르면 매도하는 종북몰이 등 비상식이 상식을 쫓아내고 있는 사회,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빈부격차, 세대격차, 지역격차, 노동격차 등 독점, 독식이 구조화되는 사회를 보며 솔직히 이 나라에서 내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유학을 보내 이 헬조선을 벗어나게 할까 고민도 했지만 아이들이 많아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아비인 저라도 세상을 바꾸는 도전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정치로 생활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 소비자의 작지만 소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아 왔습니다.
신용카드 부가서비스를 마음대로 바꾸는 나쁜 관행을 바꾸기 위해 무려 8년 동안 대형카드회사와 대형로펌과 싸웠고 모두 이겼습니다. 신용카드 부가서비스가 제멋대로 바뀌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외국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로밍요금폭탄을 맞는 일이 생겼습니다. SK텔레콤을 상대로 소송을 했습니다. 이제는 로밍요금폭탄이 없어졌습니다.
경유차라고 해서 무조건 매기는 환경개선부담금이 부당하다는 소송도 했습니다. 그 이후 경유차 환경개선부담금이 폐지되었습니다.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취급해 부당한 아이폰 A/S 정책을 펴왔던 애플의 약관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애플이 아이폰 약관을 바꾸고 A/S 정책을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죽었지만 약자에 대 한 재벌과 정부의 횡포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신용카드사들은 로비로 법을 바꾸어 8년간의 제 힘겨운 싸움을 되돌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분노했습니다. 제게 입법권이 있었다면, 제가 10년간 들인 시간과 노력으로 훨씬 더 많은 변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특권이 필요했습니다. 국민위에 군림하는 특권이 아니라 법을 만들 수 있는 그 특권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정치를 동작에서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975년 홍은동 철거민이셨던 저희 부모님이 5남매를 데리고 동작에 터를 잡으셨습니다. 제가 동작에서 초, 중, 고등학교,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까지 30년 동안 동작은 제게 놀이터이자 성장판이 되어 주었습니다.
40년 전 부모님이 길 건너 서초구 방배동이 아니라 동작구 사당동에 터를 잡으셨던 이유는 여름마다 홍수가 나는 방배동은 사람 살 곳이 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땅꼬마가 변호사가 되도록 성장하는 동안 사람살기 힘든 곳이었던 방배동은 어느새 동작구 주민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동작은 그만큼 변하지 않았습니다. 동작에도 판자촌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단독주택들은 다세대 주택들로 바뀌는 등 외관은 바뀌었지만 도로, 문화시설 등 기반시설은 그대로인데 인구와 차량이 크게 늘어나 생활하기가 더 불편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 초중고 동창들 중에 아직도 동작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은 별로 없습니다. 어른이 된 친구들은 강남으로 신도시로 더 좋은 생활여건을 찾아 떠나 버린 것입니다.
저는 동작에서 자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동작의 한’이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동작을 떠나는 곳에서 대를 이어 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주거환경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려 합니다.
2016.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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