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누구지 봤더니
더민주당에 오늘 입당한 분이라고 합니다.
광주여상 나와서 삼성전자 상무 헐
그런데 이제 정치를 하시겠다고 하네요.
어느 지역 나가실지..이런 분 나오면 버선발로 나가 맞을텐데...
같은 여자지만 반성이 됩니다. 존경도 물론.
이 분의 삶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이게 원글임. 좀 복잡
http://news.donga.com/3/all/20140115/60170931/1
여기에 간단 설명
http://yunatalktalk.net/220595186938
입당 기자회견도 감동, 영상도 있음
http://yunatalktalk.net/220595199290
위 블로그에서 긁어옴 내용 전문은 위 동아일보 보시면 될듯
“아부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무거운 약속을 평생 지켰다
내 고향은 전남 화순군 쌍봉리 작은 마을이다. 농사짓는 할아버지, 할머니, 광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남동생을 챙기는 건 어릴 적부터 나의 몫이었다.
1982년 겨울 어느 날,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누나, 아부지가 얼른 안방으로 건너오란다.” 남동생이 불렀다. 폐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평생을 안방 이부자리에 누워만 계셨다.
“향자야, 이제 나는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기력이 없었다. 퀭한 눈 때문에 별명이 ‘소 눈’이었던 아버지는 큰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동생들 잘 부탁한다.”
“아부지. 제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와 했던 나의 첫 번째 약속이었다.
한때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오르는 꿈을 꿨던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일주일 전 꼬박꼬박 눌러쓴 인문계고 입학 원서를 반으로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다음 날 광주여상 입학원서를 새로 썼다.
특별할 것 없었던 여상 시절이 지나갔고 1985년 겨울 또 한 번의 갈림길에 섰다.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사실 대학에 정말 가고 싶었다. 가서 제대로 영어도 공부하고 싶었고 그토록 되고 싶었던 교수라는 사람들도 직접 보고 싶었다. 현실은 취업뿐이었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겠다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경기 기흥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메모리설계팀에 입사했다. 대졸 연구원들의 업무를 돕는 보조, 이른바 ‘시다바리’였다. 매일 오전 7시 출근해 복사 일부터 연구원이 던져주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려내는 단순 업무를 반복했다. 손은 주어진 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욕망했다. ‘회로를 왜 저렇게 그리는지 알아야겠다. 더 배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반도체 업계 1위였다. 회사에는 일본 선진업체들이 일본어로 출판한 기술서적이 많았다. 기술을 알려면 일본어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 말단 직원은 겁도 없이 사내(社內)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 연구원들의 텃세를 견뎌가며 매일 3시간씩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공부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연구원들이 번역이 필요한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술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다 보니 반도체 설계 업무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1990년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임신했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첫 임신부였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회사 관두지 않느냐’는 말도 수시로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그리고 나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알아서 잘하자.’
아이를 낳고 나니 바람은 더 커졌다. 부산 시댁에 맡겨놓고 한 달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훗날 부끄럽지 않을 엄마가 돼야 했다.
1993년 인사팀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사내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 입학원서였다. 여상을 졸업할 때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대학 원서였다. “여사원은 사규상 뽑을 수 없다”는 인사팀 과장에게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었기에 매일 오후 4시 퇴근 직후부터 오후 9시까지 수업을 들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3년 뒤엔 함께 입학한 남자 직원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입사 22년 만인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수석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에서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도 땄다. 대학도 못 갈 줄 알았던 내가 석사라니….
회사에서 내 별명은 ‘이모’다. 든든한 이모처럼 후배들의 뒤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다.
부장 6년차이던 2013년 12월 5일, 아버지 30주기 제삿날이었던 그날 아침 나는 당시 상사였던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양 상무, 축하해.”
30년 전 아버지가 하늘의 별이 됐던 그날, 나는 삼성의 별이 됐다. 나는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이다.
별을 달던 순간 아버지 얼굴부터 떠올랐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고 당부대로 두 동생도 잘 키워냈다. 막냇동생은 삼성맨이 되었다.
▼ 양향자 상무가 걸어온 길 ▼
―1967년 출생
―1983년 인문계 진학 포기 후 광주여상 입학
―1985년 대학 진학 포기 후 삼성반도체통신 입사
―1990년 결혼 후 일과 가정일 병행
―1991년 출산 전날까지 근무하고 첫딸 출산
―1993년 메모리사업부 S램 설계팀 과장 승진
―1995년 삼성전자기술대 반도체공학 학사 취득
―2005년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 취득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부장 승진
―2008년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취득
―2013년 입사 28년 만에 상무 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