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제가 올린 글이 삭제되고 없어졌네요.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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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위안부 문제 관련 합의를 환영한다.
2015.12.30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한 것을 환영하면서 양국 정상들이 자국내의 반발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과감히 합의를 이룬 용기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대의 정권들이 뜨거운 감자로 보고 다루어 보아야 정치적으로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회피하거나, 정치적 수사로 얼버무려 오면서 양국 국민들의 감정의 골만 깊게 한 것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정공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정치적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에 비해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이 제 생각이며,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들도 반일감정 때문에 잘못 알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아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등의 야당 정치인과 자칭 진보진영측에서 이번 합의를 폄하하거나 굴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며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하고 배상도 청구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에 입도 뻥긋 못했습니다. 이랬던 현 야당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 재단 기금 출연을 이끌어낸 박근혜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고 비열한 정치공세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비난하지만, 일본으로부터 법적 책임을 받아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제시 못하고 있습니다. 법적 책임 운운하기 이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배상도 청구하지 않겠다고 한 것부터 비판해야 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지요.
솔직히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이만큼의 합의를 이끌어내었다면 이들이 지금 같이 비난을 할까요? 아마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최선, 최고의 합의라고 칭찬일색이었을 것이라는데 저는 100원 겁니다. 이번 합의에서 일본 내각 총리 자격으로 반성과 사과를 표하고 일본 정부가 재단기금 10억엔을 출연하겠다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로 사실 지금까지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 중에 최고 수준입니다. 저는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번과 같은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간의 경제/문화 교류와 협력의 걸림돌로 양국의 경제, 특히 한국 경제에 많은 악영향을 주었을 뿐아니라 재일교포들의 현지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일 3국의 안보동맹에도 균열을 가져오게 한 것이기도 하구요. 이번 합의는 이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함으로써 세계 경제 위기 속의 불안한 한국경제 상황을 개선하는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치가는 철학자나 사상가도 아니며, 이론가도 아닌 현실문제를 직접 풀어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정치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자국의 현실적 정치, 경제, 외교, 안보문제를 원활하게 풀어내 자국과 자국민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최선의 것만, 최고의 것만을 요구하면서 그것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비판과 비난을 퍼붓는 것이야말로 국민들의 현실적인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죠.
* 예전에 썼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을 피력한 글을 다시 재업하오니 이번 합의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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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2015.07.31
오늘은 제가 그 동안 글을 써 온 것 중에 가장 민감하고 위험한 주제를 다루어 볼까 합니다.
저는 민비를 희대의 악녀라고 평가 절하하고, 김구는 과대 포장된 인물이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을 썼습니다. 독도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가 내세우는 근거들이 사실과 다르다며 우리 측의 부실한 논리를 공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 글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와 거리가 멀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어 읽으시는 분들이 매우 당혹스러워 하시고 놀라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글들보다도 더 충격적인 내용이 담기는 글을 써 볼까 합니다. 2~3년 전부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글을 올릴까 하다가 현재의 왜곡된 국민정서와의 충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어 왔습니다만, 최근의 한일관계의 경색이 이 위안부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 기회에 제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써내려갈 대부분의 내용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님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진실을 알리고 역사 왜곡을 바로 잡으며 건전한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 이 책을 출간하신 박유하 교수님의 대단한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1. 우리는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제가 독도문제를 다루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는 우리 땅’이고 일본 측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그 확신에 대한 근거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분들에게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근거를 하나라도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답하는 분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원래부터 우리 땅이었다는 말만 할 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답하지 못했습니다. 나름 구체적인 근거를 대시는 분이 있긴 합니다만 정광태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사를 읊조리는 수준이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들먹이며 이사부 장군을 말하는 것이 최대치였죠. 세종실록지리지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이사부 장군은 독도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근거라고 주장할 뿐이죠.
위안부문제에 있어서도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오해하는 것도 많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아래의 질문을 드려볼 테니 얼마나 대답할 수 있는지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할 수 있는가
2) 여러분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위안부와 일반 매춘부와는 어떻게 다른가 - 일본 군대가 주둔한 지역에 자리 잡은 유곽이나 사창가에서 매춘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문제를 삼는 위안부에 속하는가
3) 위안부들 중에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하고 댓가를 받은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문제 삼는 위안부에 속하는가
4) 일본 종군 위안부에는 조선인들만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5) 일본 종군 위안부의 숫자는 어느 정도였다고 생각하며 이 중에 조선인 위안부는 얼마였으며, 이 조선인 위안부들이 모두 동일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6)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위안부들과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인 위안부들과는 동일한 성격의 위안부라고 생각하는가
7) 1940년대 초반의 국내 신문을 보면, 위안부 모집인들의 유괴, 유인 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총독부나 일본 군부가 단속한다는 기사들이 나오는데 본 적이 있는가
8) 일본 군부의 위탁을 받은 포주-모집인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많았고, 조선의 부모들이 돈을 받고 딸을 팔아 위안부로 보냈던 사실을 아는가
9) 한국도 미군과 유엔군이 주둔하자 이들을 위해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2014년 한국의 미군 위안부들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10) 일본은 패전 후 미군 등 연합군 43만명이 일본에 주둔하자 미군 주둔군에 의한 일반 부녀자의 강간을 막고자 5만5천명의 일본인 위안부를 모집하여 도쿄, 히로시마 등 일본 각지에 위안소를 운영하여 주둔 미군의 성욕구 해소를 해 줄 계획을 세운 사실을 아는가
11) 한국의 위안부 운영, 일본의 연합군 위안부 운영, 그리고 일본의 위안부 접대를 받은 미군(미국)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12) 현재 의정부, 동두천, 평택 등 미군이 주둔하는 지역의 사창가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강남의 퇴폐업소, 영등포역, 파주 등의 집창촌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일본 위안부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3) 여러분들이 문제로 삼는 일본 위안부는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관점에서 일본은 사과하고 보상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14) 2차 대전시에 러시아의 적군이 자행한 독일 여성들에 대한 대규모(수십만 명) 강간, 북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접수하면서 이탈리아 여성들을 상대로 저지른 대규모 강간과 일본이 종군 위안부를 운영한 것은 모두 비윤리적 반인권적이지만, 이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15)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인도네시아 여성 위안부를 모집하여 일본을 도운 사실을 아는가
16)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도록 활동하고 있다고(활동 했다고) 생각하는가
2.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위에서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해 여러분들은 얼마나 답변을 할 수 있었나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위안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일본 위안부로 종사한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 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꽃다운 소녀들이 강제로 징집 혹은 연행 당해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본군의 성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가 나오면 일본의 책임을 묻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요, 과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위안부가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위안부는 저는 수백 명, 많아야 1천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군(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아무 댓가도 없이 위안부 생활을 한 사람들은 많지 않고, 조선인이나 일본인 포주(위안부 모집과 운영)들에 의해 유괴, 유인되어 그들의 착취로 제대로 댓가를 받지 못한 경우는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인 부모들이 딸들을 팔아먹은 경우도 많았다는 점은 우리도 크게 반성해야 하구요.
일본의 강제에 의한 연행이나 징집에 의해 비자율적 의사에 따라 위안부가 된 경우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묻고 보상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악덕 포주에 속아 위안부가 되었거나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한 경우, 부모들이 딸을 팔아 먹은 경우에는 그 책임을 묻기는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군은 위안부에 댓가를 군표로써 지급했고, 그 댓가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나타납니다.
미군이 미얀마의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낸 포로심문서 49호를 보면, 당시 위안부들이 받은 월급여가 1,500엔으로 나옵니다. 이 중에 750엔을 하우스마스터(포주)들이 선대금으로 떼어갔다고 하구요. 1,500엔이면 당시의 택시기사의 10배가 넘는 소득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댓가를 지불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포주들에 의한 중간 착취로 인해 제대로 댓가를 받지 못한 점에 대한 책임에 일본도 자유로울 수 없겠으나 그 직접적인 책임은 포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하겠죠.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집창촌과 룸싸롱에서 일어나는 성매매 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고 보아야죠. 지금도 어린 소녀들을 유괴, 유인하여 성매매를 하게 하고, 집창촌이나 룸싸롱에서 포주들에 의한 중간 착취가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아야 하죠. 하물며 지금은 성매매와 매춘이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합법적인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위안부 문제가 지금보다 과하다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당시 위안부 모집인들이 모집 광고를 신문에 낸 것은 지금의 월수 500 보장, 숙식 제공하겠다는 광고와 다를 바 없고, 악덕 포주들에 의한 유괴, 유인이 잇따른 것 역시 지금과 유사합니다. 일본군과 총독부가 이를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포고하거나 발표까지 하는 기사들이 당시 국내 신문에 발표된 것을 보면 지금이나 당시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3. 조선인 위안부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 국민들은 일본은 조선인만을 위안부로 모집해 운영했다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사실은 위안부 중에는 일본인이 가장 많았고,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이 뒤를 잇고,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난 뒤에 네덜란드 여성도 위안부로 두기도 했죠.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인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본을 도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숫자도 학자들 마다 차이가 많으나,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종전까지의 일본군이 300만명, 위안부 1인당 30명의 군인을 상대했다고 가정하고, 2번 정도 교대가 이루어졌다고 보면, 300만명/30명*2회 = 20만명의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이 중에 일본 여성들이 15만명,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들이 4~5만명,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이 수천명 이내이고, 네덜란드인은 수백명 이내로 극소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 여성들이 많다고 보는 이유는 우리나라 군부대나 미군기지 앞의 매춘업소에서의 모습과 같이 일본인 여성들이 일본 군부대 주변에서 성매매 해위를 하였고, 이들이 일본군의 위안부 시스템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초중기까지의 위안부들은 일본 여성 중심이었습니다.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자 조선인들의 일본군 입대가 늘고, 일본군의 위안부 시스템도 체계화되고 위안부 수요도 늘면서 조선인, 대만인 여성들도 위안부로 모집되어 미얀마 전선까지 나가게 된 것이죠.
우리나라는 1991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238명의 위안부들이 등록하였고, 이 숫자로 볼 때 조선 위안부의 숫자가 5만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끄러운 과거라고 생각해서 등록을 기피했을 사람들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제 추정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주변에 위안부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없고, 제 친족들 중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어 위안부의 숫자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숫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이후이고 ‘정대협’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되었지요. ‘정대협’의 활동이 위안부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위안부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는 측면도 많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국민들은 위안부의 숫자에 대해서도 부풀려 상상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3.1운동에서 사망한 사람을 7509명이라고 기술한 내용을 우리 역사교과서는 그대로 옮겨 놓고 있지만, 사실은 300명 수준의 사망자만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 국민들은 모릅니다. 관동 대지진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수만, 수십만명을 학살했다고 알고 있지만, 이 숫자들은 지진에 의한 사망자이고, 일본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숫자는 3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인들이 1930년대 만보산 사건으로 화교를 죽인 숫자보다도 오히려 작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 숫자는 지진과 쓰나미로 죽은 사망자 숫자이고 실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죽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한 명도 없다는 것도 모르지요.
5.18에서 죽은 민간인과 경찰/군인이 수천 명에 달한다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모두 190여명에 그친다는 사실도 우리 국민 중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는 것은 사건(역사) 서술자의 편견이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폭력 정도를 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전가하려는 대중들(조선인)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서술자의 편견과 정치적 의도, 이에 대해 대중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왜곡된 기술에 동의하는 것을 소거하고 객관적 사실만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4.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의 신빙성 - 이용수 할머니 사례를 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의 실상들은 대부분 생존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들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들이 처음에 진술했던 내용과 최근에 표현해 내는 내용들이 너무나 달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의 대표적 사례로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던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보면,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인 90년대에 인터뷰한 내용과 ‘정대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이후인 2000년대에 증언한 내용이 너무나 차이가 많아 위안부가 된 계기, 위안부 생활과 대우 등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것이 많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93년~99년 사이 언론과 인터뷰에서는 1944년 10월 16살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가 1945년 1월에 대만 신주시에서 가미가제의 위안부로 일을 했으며 하루 5~6명의 군인들을 상대했고,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준 가미가제 특공대에게 사랑을 느꼈고 98년에는 이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는 2007년 미의회 청문회에 나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증언에서도 마찬가지로 90년대의 증언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1944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왔다고 하면서도 3년간 일본 위안부 생활(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했으니 10개월의 위안부 생활이 됨. 대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했음으로 일본군의 항복 후에는 위안부 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루에 적게는 20번, 많게는 70번 성관계를 강요받았으며, 생리중에도 성관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93년 첫 증언에서는 하루에 5~6명을 상대했다는 증언과는 그 횟수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죠.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주어 사랑을 느껴 98년에 그 특공대원과 영혼결혼식도 올렸다고 98년에 증언했는데 2007년에는 이런 내용 대신에 대만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일본군 300명에 강제로 강간을 당하고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요구를 거부하면 칼을 가지고 쭉쭉 째는 폭력과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90년대 처음 증언 때에는 나오지 않던 것들이죠.
그러면서 자신은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이며 조선의 딸이다’고 강조합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60대 나이에 증언하지 못한 기억들이 70~80이 넘어 새롭게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일까요? 저는 이용수 할머니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 증언 이후 세간의 관심을 받고 ‘정대협’ 활동을 하면서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조각들을 활동하면서 들은 이야기들로 보충하고 그러는 사이 이것들이 자신의 과거 경험이라고 기억 속에 재편입되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재편입된 가공된 기억들이 2007년, 2015년에는 재생되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대협’ 활동 중에 집단 극단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이 정치적, 조직적 요구에 의한 경험담으로 각색되어 대치된 것이라 저는 보지요.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다 저장하는 반면에 사람의 뇌는 기억할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자신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모든 정보를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만 키워드 형태로 저장하게 되고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때는 그 키워드들만 재생하고 키워드 간의 빈 공간은 기억해 낼 당시의 상황에 맞춰 스스로 가공해 엮어 내게 됩니다.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에서 동창생들이 큰 줄기에서는 기억들이 유사하지만 디테일한 내용에서는 각자가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이와 같은 우리 뇌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고, 같은 사람이 똑같은 과거의 기억들을 기억을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재생해 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용수 할머니도 초기에 기억했던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들 사이의 디테일한 기억들을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 가미가제 특공대와의 사랑으로 재생하여 증언했지만, 정대협 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 사건이자 역사적 문제로 부각됨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디테일을 이에 맞춰 구성하게 되는데, 이 가공되는 디테일의 내용들이 정대협 활동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 채워지고 또 그런 방향으로의 구성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은 환경에 노출됨으로써 이런 왜곡된 기억들이 강화되었던 것이죠.
제가 이용수 할머니의 기억이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채워지고 있다고 보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2012년 통합민주당(현재 새민련)의 비례대표로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비례대표는 되지 않았지만, 정치적 관심이 많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정대협의 주변 환경과 상황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억을 왜곡시켰다고 봅니다. 정대협의 간부들의 면면들을 보면 이들이 진정 위안부 할머니의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을 어루만져주려고 하는 것인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하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윤미향의 남편은 1994년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4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김삼석이고, 손미희 대외협력위원장은 40차례 방북하고, 통진당 해산을 반대했으며, 김정일 조문을 주장했던 인물이죠. 또 그 남편은 맥아더 동상 철거 등 반미집회를 주도하다 실형을 산 사람입니다. 정대협 간부들 중 일부는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는 등 시국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정대협 간부들이 정대협 활동을 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어떤 말들을 전하고 어떤 식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유도했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죠. 정대협 간부들과 위안부 할머니들끼리만 모여 있다 보니 서로의 경험담이 상승작용하고 거기에다 간부들의 정치적 논리가 가세하여 집단 극단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이용수 할머니도 이런 환경에서 정대협 간부진들의 반복되는 말들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경험한 것처럼 왜곡된 기억들을 부지불식간에 쌓아갔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용수 할머니의 위안부에 대한 증언은 90년대 첫 증언시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고 정대협 활동 이후의 2007년~2015년의 EBS 다큐 <시대의 초상>, 미의회 증언, WP의 기사는 과장과 왜곡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도 한일 쌍방간에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식의 괴리 매우 심하다고 보이며, 이런 괴리로 인해 한일간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상호간 객관적 사실에 대한 간극을 좁히거나 해소하지 않은 이상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고 보지요. 그 괴리의 책임이 일본에만 있다고 보기 힘들고, 저는 상당 부분 우리 쪽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민족의 억압 속에 개인의 삶은 소거되고, 민족의 책임은 사라지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시간이 가면서 변해가는 것은 왜 일까? 가미가제 특공대를 사랑했던 한 소녀는 이젠 ‘민족의 딸로 일본군의 성폭력 희생자’로 세상을 향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선봉에 서고 있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이러한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변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제국의 위안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의 그런 욕망은, 일본 군인에 대한 사랑도, 자신을 판 부모나 조선인 업자나 '주인'에 대한 미움도, 그리고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이어진 차가운 '한국인'의 시선도 잊고 소거시킬 수밖에 없다.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한만을 되살리기를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진 '위안부 문제'란 지원단체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그런 욕망과 기대가 우선시되면서 '당사자'들의 '지금, 이곳'에서의 고통은 잊혀진 문제이기도 하다.>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의 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 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박유하 교수는 또 조선인 위안부의 모순적인 삶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위안부들이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라고 밝히면서 위안부의 문제는 식민지 문제이며 일본의 책임을 이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 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 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 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6.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진정으로 돕고 있는 것일까 - 그 정체와 재평가
위안부 할머니를 돕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단체인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과연 지금 그 본연의 목적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 갈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정신대는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명칭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것을 보아도 이 단체가 애초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이 단체는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진행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등의 긍정적인 일을 하는 것은 저도 인정하지만,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사들이 사심 없이 진정성을 갖고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어집니다.
‘정대협’은 일본이 일본 위안부들에게 사죄와 함께 보상을 하겠다며 내놓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금 수령을 적극 반대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당시(1997년~2002년) 우리 돈으로 1인당 3천만원에 이르는 보상금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대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대부분 ’정대협‘ 소속이 아니라 ’무궁화할머니회‘ 소속)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요.
한국 위안부 71명과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위안부들 285명은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사죄와 함께 보상을 받고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유독 한국만 현재까지도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등 제반 부문에 대한 배상금과 보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고, 네덜란드 위안부들은 일본의 인정과 사죄를 받아들이는 대신 보상금 수령은 사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위안부 할머니 모임인 ‘무궁화할머니회’는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보상금을 수령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정대협’과 의견 충돌로 현재 극한 대립관계를 보이고 있죠. ‘무궁화할머니회’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으로 ‘정대협’보다 먼저 결성된 단체로 순수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이었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활동했습니다.
정대협은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을 거부하고 일본을 상대로 보상금 지급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하게 되어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직도 한 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게 되어 할머니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정대협)의 지도급 인사들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며 정치문제화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고 그것을 이용해 국회의원이나 장관(지은희, 이미경) 등 제도권 정치에 입문하는 개인적 영달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실질적 도움은커녕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의 고통은 무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들을 소거시키고 오로지 일본에 대한 원한만 되살리기를 요구하고 ’항일 투사‘로 나서기를 강요하고 있지요. 위에 이용수 할머니의 사례를 설명드렸지만,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왜곡된 기억을 강제하고 과장과 거짓을 은연중에 강요하면서 할머니들을 이용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위안부문제에 관해 정대협의 소수 관계자들만이 독점하고 이들이 위안부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입장을 결정했으며,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의 대일정서에 편승한 이들의 주장에 대해 감히 어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지낸 것이 20년이 넘은 것이죠. 이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은연중 강요하더라도 누구도 나서서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사실은 사실대로 돌려놓고 정대협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7. 우리 국민들의 ‘조선인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를 보는 이중적 시각
위안부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저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아 갸우뚱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인 종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강력히 요구하면서도 ’조선인 일본군‘에 대해서는 사죄와 보상을 언급하지 않거나 요구를 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인 위안부‘와 ’조선인 일본군‘은 무엇이 다르길래 우리는 이토록 극명하게 다르게 인식할까요? ’조선인 일본군‘도 자발적 지원도 있고, 징집에 의한 것도 있으며, 대일본 제국을 위한 충성심으로 참전하기도 했고, 징집을 피하려 도망다니다 잡혀 입대한 경우도 있지요.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일본군에 입대한 조선인 남성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위안부 모집에 응한 조선인 여성과 무엇이 다를까요?
조선인 남성은 어찌되었던 당시에는 일본국의 국민으로써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군에 징집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전쟁에서 생명의 위험을 더 감수했었던 점에서 자발적으로 위안부 모집에 응한 위안부들보다도 그 보상을 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자발적으로 입대했던, 징집에 의한 것이던 ‘조선인 일본군’에 대해서는 쌀쌀하게 대하고 심지어 친일의 굴레를 덮어씌우면서 자발적 모집에 댓가를 받았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15살의 소녀 피해자’로 대우하고 이 문제만을 부각시킬까요?
이제 우리가 갖고 있는 위안부 문제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나요? 사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위안부는 일본군이나 총독부의 경찰(순사)들의 일탈행위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어 위안부로 일했던 극소수의 위안부로 한정하거나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이라는 보편적 문제로 접근하거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안부들의 자발성, 모집과정, 위안부에 대한 대우나 댓가 등을 무시한 채 모든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한 범주에 넣고 일본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안부 문제를 조선인 위안부 뿐아니라 일본인 위안부까지 포괄하여 성의 도구화, 국가기관(일본군)의 운영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 인권과 성매매의 부당성이라는 보편적 문제로 생각하고 제기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일본군과 총독부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비자발적 강제에 의한 극소수의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하여 그것도 ‘조선인 위안부들’만의 문제로 전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과 우리가 이 위안부문제에서 대립하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것도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선인 위안부’나 ‘조선인 일본군’은 ‘위안부’나 ‘일본군’ 일반의 문제에서 식민지 모순의 문제가 부가되는 점은 우리가 명백하게 지적하고 이 부분에 대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지만, ‘위안부’ 일반의 문제를 우리만의 특수한 문제로 보고 이에 대해 일본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지요. 일본의 사과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에 대해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가 수용하고 끝냈던 것과 비교해 우리는 아직까지 문제 제기를 하는 것도 우리가 문제의 본질과 사과/보상 요구의 성격간에 미스매칭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8. 유럽과 미국은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을까
조금 더 위험한 발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이 전쟁시기에 위안부를 운영한 것은 비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과연 (상대적으로) 전쟁당사국들이 저지른 유사한 행위와 비교하여 더 나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전쟁 그 자체는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며 전쟁을 시작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국주의 시절에 발발한 전쟁 국면에서 자국 군대의 전투력 보존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침략(점령)지역의 여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군이 위안부를 운영하여 자국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종군시킨 것이 더 나쁘다고만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만약 일본군이 자국의 여성(조선도 일본과 합병되어 조선인도 일본인이었음)을 위안부로 하여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더라면 만주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 동남아의 일본군 점령지의 여성들이 어떤 수난을 당했을까요? 물론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하고도 점령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현지 여성들의 강간 사건은 더러 있었습니다만, 위안소가 없었더라면 그런 강간 사례는 대규모로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독일이 소련(러시아)를 침공해 러시아 여성들을 무차별, 대규모로 강간했던 일이나 독일을 점령했던 러시아군과 이탈리아를 접수했던 프랑스군이 현지 여성들에 대해 대규모로 자행했던 강간 사례를 보면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점령지에서 대규모 강간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지요. 위안소 운영 전에 발생한 만주사변에서의 일본군의 대규모 강간이 벌어졌던 것을 보아도 충분히 예견되는 일입니다.
솔직히 저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난하는 유럽과 미국을 보면 참 뻔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패악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하지 않으면서 일본의 위안부를 문제 삼고 비난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위안부와 유사한, 아니 이보다 더 부도덕한 범죄를 희석하려 하는 것 같아 몹시 불편하더군요.
우리나라도 주한 미군을 위해 위안소를 운영했고, 일본도 패전 후 미군 점령군을 위해 동경과 나가사키 등의 일본 현지에 위안소를 운영했습니다. 또 미군은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남아 일대에서 항복을 받고 접수했던 지역에서 일본군이 운영했던 위안소에서 성욕구를 해소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동남아의 위안소를 이용했던 미군(미국)이 위안소에서 일을 했던 위안부 문제를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하는 것은 웃긴 것이죠. 미의회가 위안부문제를 가지고 청문회를 여는 것이나 미국 언론들이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면서 자국도 함께 반성을 촉구하지 않는 것도 제대로 된 접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문제로 함께 반성하고, 현재에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함께 해결방안을 찾고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2차대전시에 소련군에 의해 저질러진 강간의 참혹성
2차대전 종전후 소련이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수백만 건의 강간이 자행된 것으로 추산. 많은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당했고 심한 경우 60~70번까지도 반복해 당함, 병원의 낙태 기록을 보면 베를린에서만 100만명의 독일 여성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됨, 강간과 연관되어 사망한 여성이 유대인, 소련인을 포함하여 24만명으로 추산, 1945년 강간 피해를 본 90% 여성이 성병을 앓았고, 1946~1947년 독일에서 출생한 아이의 3.7%가 소련 혼혈.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ar_rape
위에 링크하는 wikipedia에는 소련군에 의한 만행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호주, 영국 등의 연합국에 의해 자행된 강간 상황도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9. 우리 안의 ‘위안부’ -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나라는 주한미군들을 위해 위안소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땅에서도 여전히 위안부와 유사한 성매매들이 성행하고 있지요. 일본군 위안부들이 존재하던 그 당시에는 성매매나 매춘이 합법적이었던 것에 비해 현재는 그것이 불법으로 금지되고 있음에도 우리 안의 ‘위안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강남의 룸싸롱이나 퇴폐 안마시술소, 심지어 일부 노래방에서도 은밀하게 성매매와 매춘이 일어나고 있으며, 파주나 영등포역 주변의 집창촌에서도 암묵적으로 남성들의 성욕구를 해소하게 해주고 있지요. 이들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업소를 찾기도 하고, 업주(포주)들의 광고를 보고 찾아오는 가출 청소년들도 있으며, 업주들이 어린 청소년들을 꼬셔서 강제로 유흥업소에 종사케 하는 경우 등 이 업에 종사한 경위도 다양합니다.
현재의 성매매업소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일본군 위안부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모집되어 오는 과정, 업소를 찾게 되는 이유, 중간에 업주(포주)들에게 착취되는 형태, 고객(?)과 이루어지는 사랑 등의 그 속에서의 개인적 경험 등은 일본군 위안부와 흡사하지요. 일본군과 총독부는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유괴나 유인, 불법 광고에 대해 단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도 지금 우리 정부나 경찰이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위안소)는 국가(일본군)가 운영(개입)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많은 조선의 부모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자신의 딸들을 팔았고, 많은 조선의 업주들은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하기도 했고 또 강제 유괴, 유인도 했습니다. 조선 내에서 이루어진 유괴, 유인이나 모집이 조선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태반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이러한 우리 조선인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통해 자행했던 잘못들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반성을 했던 적이 있나요? 이런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기에만 급급했고, 또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 모든 책임을 일본에 전가하려 하지 않았는지요? 개개인의 잘못을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로 문제를 확장하여 전도시킴으로써 다른 국가(민족)에게 그 모든 책임을 돌리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개개인의 잘못은 표면화되는 것을 막게 하고, 결국은 우리(민족)의 잘못은 무의식적으로(어쩌면 의도적으로) 희석시켜 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 안의 ‘위안부’ 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일본에게 묻는 태도때문에 현재, 이 땅에서 ‘오늘의 또 다른 위안부’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 ‘생리휴가‘라는 제도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당시 점령했던 지역인 한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에만 있고(중국과 대만은 있는지 모르겠음) 유럽이나 미국에는 없는 제도입니다. 왜 이 생리휴가가 동아시아 지역 국가에는 있고 유럽이나 미국에는 없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여성의 생리기간에 유급휴가를 주는 제도를 복지나 인권 측면에서 선도적인 유럽과 미국이 아닌 동아시아 국가가 시행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던가요? 이 ’생리휴가‘는 생리 기간에 위안부들이 위안활동을 할 수 없음으로 일본군본영이 위안부들을 생리기간에는 쉬게 할 목적으로 만든 제도라고 합니다. 이 ’생리휴가‘를 일본군본영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근로조건을 악화시키려 한다며 반발이 심해 ‘생리휴가’ 제도를 없애지 못하고 아직 근로기준법에 그대로 두고 있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사죄와 보상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정작 일본군 위안부에서 유래한 ‘생리휴가’에 대해서는 존치를 강력 요구하는 것은 모순 아닐까요?
10.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풀 것인가
이 부분은 제가 별도로 제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여러분들 각자가 고민해 보는 것으로 남겨 놓고자 합니다.
PS :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옹호하거나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위안부의 생활, 사후의 일본의 자세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기반하여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여야 할지를 토론하고자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