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위안부 문제란 1932-1945년 일본 제국의 체계적 계획과 조직에 의해 실행된 전쟁범죄로서 그 피해자는 수십만명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40%는 자살을 택했으며 생존자의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견될만한 잔혹한 성착취의 전쟁범죄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당사자들의 침목 속에 1991년까지도 그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해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고통과 수치를 무릎 쓰고, 용기 있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위안부 문제는 세계의 공론장에 등장했다.
필자는 "인류 역사상 가해국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향후 피해자들의 문제 제기 및 비판을 금지시킨 적은 없었다.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에는 어떠한 제약도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이들 범죄에 대해 침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바로 이런 전제조건에 합의를 해주었다. 이처럼 전면적인 항복, 이보다 더한 도덕 및 주권의 포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게 사과라면-그리고 한국이 더 이상의 비판을 제기할 수 없다면-한국은 스스로 주권국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한국 정부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편 이유를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에서 찾는다. 미국은 떠오르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군사-정치 동맹이 필요했고, 이 동맹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위안부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세계 패권 유지, 일본은 군사화에 의한 과거 제국의 영광 재현, 한국은 미국에의 맹종이라는 광기에 이끌려 수십만 여성들의 생명과 인권, 존엄과 명예가 달린 중차대한 인도적 문제의 근원적 해결해결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한마디로 말해 '광기(狂氣)로의 회귀'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이 글은 미국의 진보적 매체 <카운터 펀치> 12월 31일자에 실렸으며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
위안부 희생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신
2015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외무장관은 갑자기, 그리고 성급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다. 일본 총리 개인의 사과와 함께 배상을 위한 기금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외상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부의 개입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46명의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10억엔 출연을 약속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운동단체들은 이번 합의가 '배신'이자 '사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어떤 할머니는 드러내놓고 울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외교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의 활동가 단체인 '종군 위안부를 위한 한국 협의회'는 이번 합의는 "충격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합의는 한국에게는 굴욕적 외교다...위안부 할머니 및 한국 국민들의 염원을 철저하게 배신한 외교적 유착에 지나지 않는다..이로써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지난 25년의 진전이 모두 허사가 됐다"
2015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외무장관은 갑자기, 그리고 성급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다. 일본 총리 개인의 사과와 함께 배상을 위한 기금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외상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부의 개입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46명의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10억엔 출연을 약속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운동단체들은 이번 합의가 '배신'이자 '사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어떤 할머니는 드러내놓고 울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외교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의 활동가 단체인 '종군 위안부를 위한 한국 협의회'는 이번 합의는 "충격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합의는 한국에게는 굴욕적 외교다...위안부 할머니 및 한국 국민들의 염원을 철저하게 배신한 외교적 유착에 지나지 않는다..이로써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지난 25년의 진전이 모두 허사가 됐다"
전쟁이 끝난 후 이러한 야만의 역사는 정책, 정치, 편견의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역사의 기억 상실을 유도하기 위한 음모였다. 고문과 매질, (팔, 다리의) 절단과 매일 이어지는 강간-하루에 최고 50회까지-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들 중 일부는 후퇴하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노예로 전락한 위안부 여성 중 약 40%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 중 살아남은 비율이 25%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전장에 투입된 병사, 대서양 노예무역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갔던 흑인노예들의 사망률보다도 높다. 이는 '위안부' 문제가 20세기 사상 최대의, 인정되지 않은, 나아가 해결되지 않은 학살 행위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