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글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에서 “단심으로 사형판결 받은 황태성 사건을 3심제로 돌린 것이나,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한 것이나, 홍승만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파기환송을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황태성을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해 황태성 재판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고등법원으로 내려온 사건은 다시 사형, 두 번째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KBS는 김일성이 준 돈으로 만든 언론”
황태성은 2년간(1961~1963년) 뭘 했을까? 세간의 루머와 당시 야당의 주장은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가져와 공화당 창당 작업으로 사용했고, 일부는 KBS 현대화 자금으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김 이사장은 “JP의 증언으로 이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황태성 재판 기록에 따르면 황태성은 20만 달러가 아닌 2669달러만 가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김 이사장은 “20만달러는 황태성 이후 내려온 간첩 이만희의 공작금으로 추정된다”며 “황태성은 김성곤 등 남쪽에 남로당 출신 지인들이 많으니 돈을 많이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간첩들에게 압수한 20만 달러를 당시 오재경 공보부 장관에게 넘겨 KBS 개국을 지시했다”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여기에 황태성의 돈도 포함돼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자금은 한일회담과 4대의혹 사건으로 마련한 돈이 비중 있게 쓰였다.
민주공화당, 공산당과 닮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61년 중정에서 황태성을 연행할 때 중정요원들이 큰절 올리고 모셔갔다”며 “김민하, 권상능, 황유경(황태성 손녀)도 모두 황태성을 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조직에 도움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큰절까지 하고 모셔간 밀사 황태성을 2년 간 살려둔 이유로 볼만한 정황이다.
김 이사장은 “공화당은 당시 획기적인 정당으로 크게 두 가지가 공산당 조직을 벤치마킹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라는 점이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이전 자유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사무국이 있고, 사무원 공채를 시작했다.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는 중앙당과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했다.
밀사를 죽이는 것은 전쟁선포와 다름없다. 남북관계는 ‘냉전’이 유지돼 살벌해졌고, 휴전선에서 우발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1968년 1월21일엔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 부대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로 내려오기도 했다. 황태성의 죽음은 남북관계 악화와 박정희 정권 이후 본격화할 간첩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