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으로 신경질이나 비난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저마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각자의 경계선들을 성벽처럼 지어놓고 산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신의 경계선을 밟는 이에게는 언제든 조소를 흘려주고 힐책과 비난 분노를 뱉어낼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입밖으로 꺼내지든 마음 속으로만 머무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누군가 나의 경계선을 넘어왔고 이제 그는 비난, 무시, 혐오,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됐다는 얘기다.
그 경계에는 옷은 꼭 신상을 입어야 한다거나 사람들은 내 호의에 감사해야 한다는 식의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정치인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경제인들은 부를 나눠야 한다는 거시적 당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넓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 스파게티같은 경계선들은 모두 명확하게 의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약간의 기분나쁨이나 긴장감, 불안따위는 무시되고 지나친다.
만약 옷은 꼭 신상을 입어야 한다는 여자가 이월상품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비난 앞에 서야 하는 꼴이 된다. 내가 조소하고 비아냥댄 사람들, 그들 중 한명이 되어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타인이 자신을 힐끗거린다면 그건 수치로 느껴지게 된다. 이쯤에서, 이월상품이나 입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는 무능한 남편과, 지난 프로젝트를 망쳐 내 승진을 물거품으로 만든 동료, 거품을 잔뜩 끼얹은 의류업체의 횡포와 경쟁의식 가득한 이 사회분위기에서 자신은 피해자가 된 기분으로 분통을 터트리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난리법석을 피고 무례를 저지른 자신의 아이들에게 화가 난 부모는 비록, 분노 없이도 아이들의 훈육은 가능하겠지만 주위로부터 쏟아질 혐오와 경멸에 대한 두려움이 이 분노의 방향을 아이들에게 돌리게 만든다. "사람들이 엄마를 뭐라고 생각하겠니!" 타인들에게 끼친 민폐보다는 자신의 위신에 난 상처가 실질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무례한 사람들을 경멸해왔을지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비난 앞에 서야 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된 것이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인생보다는 내 자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건 아닌지, 내가 잘못 키운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고 주위의 눈초리가 두려워진다. 다들 자식자랑에 즐거울 때 자신은 초라하게 그들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 너희 큰애는 어떻게 지내냐는 말 한마디를 건넨다면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을 타겟으로 분노가 터져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너 언제 결혼할래!" 그 부모는 언젠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누구네집 애는 서른이 넘도록 집에서 뒹군다고 안타깝다는 말 뒤로 은근히 우열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들보단 낫지" 는 더이상 통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비난의 성벽위에 다른이가 아닌 바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여럿이 함께 누군가를 흉보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결속력을 돈독히 해왔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그 집단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설사 억울한 일과 불공정, 불합리가 닥치더라도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한다. 집단에서 비난과 조롱의 타겟이었던, 사회생활을 못한다, 적응력이 없다, 대인관계가 안좋다며 신랄하게 욕을 퍼붇고 깔깔거린 그 대상이 이제 내가 될거라 상상해보라.
심지어 비난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쩌면 "그래 난 이제부터 비난하지 않겠어!" 라고 의지를 불태우고는 곧이어 "이제부터는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겠어" 라는 함정에 흔히 빠진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떠올리지 않았더라도 대게 사람들은 계획을 품고 의지력을 발휘해야 할 때면 흔히 반대 상황에 대한 "비난" 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만 한다 라는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렇게 못하는 상황을 가리켜 그건 나쁘고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혐오하고 경멸하겠다는 식으로 온갖 부정적 이미지들을 협박용으로 씌워버린다. 두려움을 이용해서라도 의지력을 키워내겠다는 것인데 이런 과정으로 목표를 이루게 되면, 주위에 실패하는 젊은이나 동료들을 향해 마찬가지의 잣대를 들이대어 "의지력 박약들, 나보다 못한 사람들, 낮은 레벨의 사람들" 따위로 교만을 부린다. 만약 자신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동안 욕해온 온갖 비난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 되야 하기 때문에 마찬가지의 과정으로 누군가를 제물로 바칠 필요를 느낀다. 나에게 생겨난 화를 그대로 방향만 바꾸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맨날 싸워서, 친구들이 자꾸 놀자고 해서, 필요한 자본이 없어서, 부하직원들이 무능해서, 이 나라가 원래 약자들의 기회를 빼앗으므로.." 하지만 그 "화"의 시작점이 애초에 계획이 실패 될 상황, 흔히 루저라 불릴만한 반대 상항에 대한 무시와 비난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은 무능한 것이고 머리가 나쁜 것이고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는 비난의 이미지를 겁박용으로 이용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쓰레기 청소부를 향해 "니네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 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비난이란 폄하의 감정이 묻어있다. 아이들에게 니네들이 저렇게 된다면 그 감정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협박도 들어있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될지 모르나 실패의 순간엔 결국 혐오의 대상이 되리라는 두려움을 기저감정으로 품게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 무의식에 스며든 감정은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 극심한 자기비하와 분노를 느끼도록 작동할 것이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자신을 철창에 가둔다. 그리고 밖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아.. 아니야.. 이건.. 그래 이건 바로 저녀석 때문이야!! 라고 믿게 만든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화를 쏟어내며 자신의 두려움을 꼭꼭 숨긴다.
나에게 분노가 솟구친다면 우선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고 확정하기에 앞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내가 혐오하거나 멸시하고 무시하진 않았는지 먼저 되물어야 한다. 연봉이 낮은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들을 조소하고 폄하하고 있던게 아니었는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살면 맨날 당한다 멍충아라고 무시했던 건 아니었는지? (이런 심리는 피해자가 비난받는 문화에 일조한다) 가족을 경제적 위험에 처하게 하는 가장은 무능력의 표본이라 깔보았던가?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씌운다거나) 세상은 나에게 우호적이여야 하며 난 운이 좋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특별하지 못한 사람이고 그저 그런 사람들은 저렇게 고생만 하며 사는 거라고, 근거없는 우월감을 뽑내어 무시와 비난이란 횡포를 휘두르고 성밖을 맘껏 비웃으며 살았던게 아닌지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옭아맨게 과연 누구란 말인가?
화는 나 자신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이다. 나에게 화가 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냈거나 내가 의심없이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게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외부의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이제부터 너가 원인이야" 라고 나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줄 이를 숙제처럼 찾아낸다.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쳇바퀴에서 더 힘만 빼는 꼴이다. 화는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하나 쌓아왔던 "비난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모두 뾰족한 가시들과 같다. 내 자신조차도 찔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때문에 만약 찔리기라도 한다면 "누가 날 밀었어!" 라고 소릴 버럭 지르고 그 가시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더 아프고 매섭게 들이댄다. 이성은 감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들에게도 특정 행동을 금기시키는데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가 공부를 못하면 내가 주위에서 능력없는 부모, 지능유전자가 떨어지는 부모가 되기 때문에..", "내 애인이 못났다면 친구들이 내 무능력을 비웃을 것이기 때문에..", "내 연봉이, 내 아파트 평수가, 내 자동차가, 내 나라가.."
하지만 비난이 일으키는 문제점보다 그 비난을 피해갈 방법을 찾으라는 교육방식과 어른들의 가치관은 생각보다 매우 뿌리가 깊다. 아이들은 부모의 가치관을 저항없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아이들의 입장에선 생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중에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자신에게 습득되어 있는 못된 사고 방식들을 발견하고 하나씩 고쳐 나가려 들 때에는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도중에 겪게 되는 자기비하와 무기력증은 아예 포기의 길로 돌아서게 만든다. 이쯤에서 또 다시 국가와 부모를 비난할 거리를 찾았다고 좋아한다면 똑같은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걸 알아차리기 바란다. 비상식이나 무례, 옳지 않음 앞에서 비난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과 개선의 방안을 찾아낼 의지를 키워내는 건 매우 다른 접근법이다. 누구라도 흔하게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부모, 선생,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비난의 힘을 빌어 훈육되었다면 당신 역시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시를 잔뜩 세우게 된다. 하지만 무시, 혐오, 경멸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고 사회는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이쯤에서, 화가 생겨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본래 이야기하려던 주의력, 집중력을 강화시키는 방법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 뒷부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