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는 인종적 차이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음에도 일본만큼은 황인종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1904년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인종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인종주의’에 ‘문명화’라는 또 하나의 기준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터키인들은 일본인들보다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에게 더 가깝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우리의 국제사회(소위 ‘문명권’)에서 구제 불능의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 회원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는 루스벨트의 희망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에 대한 루스벨트의 태도는 처음엔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1902~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 병력 철수와 문호 개방 유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계기로 적대적으로 돌아섬으로써 한국에겐 재앙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1년 1월 러시아의 한반도 중립화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1902년 1월 30일, 일본은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에 대해 만주로부터 철병할 것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일(英日)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대신 일본은 중국에 대한 영국의 특수 권익을 인정했다.
영일동맹 직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과 충돌을 빚게 했다. 아직은 러시아와 맞붙을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양분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9도선 분단안을 제시해 담판은 결렬되었다.
러일전쟁의 종군 기자들이 묘사한 조선의 모습은?러일전쟁 종군 기자단에는 캐나다인으로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The London Daily Mail)>지에서 파견되었던 매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Twain, 1835~1910),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나(The San Francisco Examiner)>지에서 파견된 잭 런던(JackLondon, 1876~1916)도 있었다. 런던은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사회주의 작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인데, 그는 1904년 3월 5일자 일기에서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한국인들은 이미 그들을 점령하여 지금은 주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상전인 ‘왜놈’들을 몸집으로 훨씬 능가하는, 근육이 발달된 건장한 민족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기개가 없다. 한국인에겐 일본인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맹렬함이 없다. …… 정말로 한국인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중에서도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다.”
비단 런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승리를 알린 러일전쟁 종군 기자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조선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와 관련, 송우혜는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 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 루스벨트는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 1838~1905)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아웃룩 매거진(Outlook Magazine)>의 편집장 조지 케난(George Kennan, 1845~1924)도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난은 1905년에 출간한 [나태한 나라, 한국]에서 조선인을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과 옷차림이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늘어놓은 인물이었다.
케난은 개인적으로도 루스벨트의 친구이자 이른바 ‘루스벨트 사단’에 속한 인물이었던 바, 그가 발행하는 잡지는 루스벨트가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유일한 잡지였다. 케난이 잡지 기사를 통해 한국을 “자립할 능력이 없는 타락한 국가”라고 묘사하자, 루스벨트는 케난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첫 번째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고 동감을 표시했다. 1905년 8월 루스벨트는 “나는 이전에 친일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친일적이다.”라고 실토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다미국의 역사학자 캐롤 쇼(Carole C. Shaw)가 2007년에 출간한 [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The Foreign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는 루스벨트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사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지금까지 일본 학계는 이와 관련해 미국의 유대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Jacob H. Schiff, 1847~1920)가 전쟁 비용을 조달했다는 내용만을 거론했지만, 이 책은 3000만 달러를 지원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를 비롯하여 존 피어몬트 모건(JohnPierpont Morgan, 1837~1913) 등 미국의 6개 재벌이 일본에 차관을 지원한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조달한 일본의 전쟁 비용은 약 7억 엔(현재가 14조 원 상당)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2세인 쇼는 “100여년 전 우리(미국)가 ‘공공의 선’이란 미명하에 작은 나라(대한제국)의 국권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라”며 “미국인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루스벨트는 자국 식민지인 필리핀 시찰 명목으로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를 일본으로 보내 7월 29일 일본 총리이자 임시로 외상도 겸하고 있던 가쓰라 다로(桂太郞, 1848~1913)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게 했다. 이 밀약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이는 약 20년 후인 1924년 역사가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 1883~1949)의 루스벨트 문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