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3월, 화학산 기슭에 위치한 복구래 마을(도암면 운월리)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인근 마을로 모두 피신해 있었다. 형학남(당시 31세) 씨도 친척이 살고 있는 도암면 원천리 동두산 마을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작전 중이던 20연대(연대장 박원근) 3대대(대대장 최형록) 군인들에 의해 형 씨는 이곳 젊은이들과 함께 '빨갱이 부역자'로 분류됐다. 젊기 때문에 반군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죄목이었다.
그리고 논바닥에 쭈그린 이들을 향해 심한 매질이 이어졌다. 군인 뒤를 따르던 또 다른 민간인(우익 청년)들은 도리깨(곡식을 두들겨 알갱이를 털어내는데 쓰는 연장)를 든 채 마구잡이로 이들을 폭행했다. 그 와중에 형 씨는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시뻘건 피가 턱을 타고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지만, 흥분한 우익 청년들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군 간부 중 한 명이 도포배미에 오른 주민을 향해 소리쳤다.
"군이나 경찰 가족이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서라."
이내 주민들은 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13살이던 김범순 씨도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경찰이던 그의 큰형님(김학순·25세)은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진압 도중 14연대 반란군에 의해 순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