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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오싹했던 그날들

생각할수록 조회수 : 3,740
작성일 : 2015-10-19 15:29:51

1. 도움이 필요한 할머니 


중 3때였어요. 지금으로 부터 거진 20년 전이었어요.

그 때 부산 서면은 번화가로 변모하는 중이었고 대로변은 큰 건물들이 많았고

안쪽으로는 다세대 주택들이 즐비한 그런 골목길이었어요.

드문 드문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같은 것도 있었구요.

어느날 혼자 버스를 타고 그 골목에 있는 이모집에 갈 거라고

대로변에서 내립니다.


내리자 마자 이분도 안되어서 키작고 마른 어떤 40대 정도의 남자가 저에게 다가옵니다.


학생, 저기 육교에서 어떤 할머니가 못 일어나셔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같이 가서 도와주면 좋겠어.


인상이 선하게 보입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추악하고 그런지 몰랐죠.

죽음이라는 것이 있고 슬픔이라는 게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그 나이에 신문을 열심히 보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승낙을 하자

그 아저씨의 얼굴에 꽃이 핍니다 (이건 세월이 지나서 기억을 조작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더욱 생생해지는 장면입니다)

마치 신난 어린아이 회전목마 타러 가듯 거의 뛰다시피 급하게 걸어갑니다. 저는 뒤에서 따라갔지요.


걸음걸이가 완전 스타카토예요.

한 십분쯤 갔을까 그 아저씨는 다세대인지 그냥 건물인지 그건 정확치 않은데

재빨리 지하로 내려가는데 아무생각없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지하 계단 바로 앞에서

무슨 고리에 걸린 듯  누가 내 발목을 잡듯이 자동정지가 됩니다.


아저씨의 대사가 들립니다. 아래는 컴컴합니다.


할머니, 착한 학생이 도와주러 왔어요. 어쩌고 저쩌고...

할머니 소리, 기척도 없어요.

순간 생각할 일초도 없이 저는 자동으로 뒤돌아서서 전력질주를 했어요.

뒤에서 쫒아오는지 아닌지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거

무조건 대로변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뛰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제가 아무리 과장이라도 올림픽은 무리고 전국체전 나갔으면 동메달을 획득했을 겁니다.


그리고 곧 그 해프닝은 잊었죠. 뭘 했을거라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세월이 지나서 어른이 되고 사건사고를 보고 괴담을 듣고 이 때 무언가 내 발목을 잡던 그 무엇이 없었다면

나 살아있었을까? 살아 있었더라도 정상적으로 편안히 살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정말 다행이고 상상만해도 오싹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그 어떤 힘,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 혼자 돌아가는 열쇠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그 때 당시는 이런 고층아파트는 많이 없었고 맨션이라고 부르는 5층까지 아파트가 많을 때였어요.

생계를 책임지시는 엄마, 늘 집에 안 계셨고, 저도 자습하느라 늦게 왔고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열쇠는 경비실에 맡겼어요. 그 때 많은 집들이 그랬어요.


그리고 맨션 규모가 크지 않아서 누구집에 숟가락 몇개인지까지는 아니라도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때 였지요.

경비실도 맨션 입구에 한 개 있었어요.


엄마가 식당을 하셔서 늦게 오셨어요. 새벽에 오셨죠.

학교 갔다 와서 혼자 밥먹고 곯아 떨어지는 게 보통인 날이었죠.


그날, 그날따라 새벽에 깹니다. 느낌이 너무 안좋아요. 현관 쪽으로 나가보니 위 열쇠가 천천히 천천히 돌아갑니다.

문 따는 게 아니라 열쇠를 넣고 소리 안나게 숨죽여서 하는 그런 거요.

천천히 돌아가는 데 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그 느낌.

당황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열쇠를 도로 돌렸습니다.

문 따던 그 놈도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똑딱이를 겁니다.

내쪽에서도 그 쪽에서도 아무 소리를 안 냅니다.

저는 티브이를 켜고 불이란 불은 다 켰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차라리 경찰에 신고할 걸 그랬나 싶어요.

과연 와주었을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그 때 역시 엄마에게 문이 열리려고 해서 내가 안에서 도로 잠궈버렸다라고 말했고

별로 놀라지도 않으셨던 거 같아요. 제 말을 믿는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우린 열쇠를 바꿨고 다시는 열쇠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듬해 대학을 갔고 저희 집이 꼭대기 층인데 옥상에서 내려와 베란다를 통해

침투하려다가 실패했더군요.


근데 신기한 거 말이죠. 저는 그 때 대충 누가 범인인 줄 추측은 했습니다.

경비아저씨 중에 한 명입니다.

늘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말을 걸고, 그 때만 해도 하도 나이브해서 누가 무슨 의도가 있어

어떤 행동을 한다라고 생각조차 안할 때였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역에 발성이 안되어도 세계 영화감독에게 바로 캐스팅될 그런 인상이었어요.

40에 후반에서 50대 초반. 세월이 지날 수록 그 사람의 얼굴이 또렷히 몽타쥬가 아니라 세밀화를 그릴 정도로 분명해집니다. 


오싹합니다.

그 순간 제가 자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때도 아빠가 깨워주셨다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잘 몰라서 덜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서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지만

이제는 제가 아는 이상

아이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아요.


서로 믿고 사는 세상, 아름답지만

그래서 어디서든 늪에 빠질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이런 교육시간 많이 가졌으면 좋겠고

또한 정부와 국회에서 어린이, 여성 대상의 범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특단의 조치를 발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런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도록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정신이 건강한 세상으로 가는 길을 닦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부모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도 못숨이 있어야지 누리죠. 


    

IP : 112.152.xxx.18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기억나요
    '15.10.19 3:39 PM (110.70.xxx.205)

    몇년전에 두번째 글 올리셯죠?
    저 그때 원글님 올린글 읽고 굉장히 오싹했던 기억나요
    그 뒤로 저도 문단속에 한번더 신경쓰고요
    다시 읽어도 등골이 오싹하네요 1.2번 두개다요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운인지 촉인지 좋으셔서 천만다행..

  • 2. 원글
    '15.10.19 3:42 PM (112.152.xxx.18)

    맞아요. 두번째 꺼 올렸어요. 대학다니고 할 때만해도 암 생각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오싹합니다. 여차했으면 귀신이 되어 82 눈팅하고 있었겠죠.

  • 3.
    '15.10.19 3:43 PM (223.62.xxx.6)

    현실이 공포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네요

  • 4.
    '15.10.19 3:52 PM (223.33.xxx.238)

    세상 참 무서워요 조심 또 조심 해야돼요
    첫번째는 정말 소름끼치네요

  • 5. 세상에
    '15.10.19 4:09 PM (125.177.xxx.23)

    아버지가 지켜주신거 맞는거 같아요.
    천만다행이네요.

  • 6. ..
    '15.10.19 4:14 PM (183.109.xxx.124)

    저기 육교에서 어떤 할머니가 못 일어나셔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같이 가서 도와주면 좋겠어

    해놓고, 지하로 왜 델고 갔을까요? 정말 큰일날뻔 했네요.

    역시, 인간의 목숨은 어느정도는 신의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운이 좋으셨네요.

    저도 나이 40 넘어 생각해보니, 험한일 당하지 않고 살다 가는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것같아요.

  • 7. 원글
    '15.10.19 4:17 PM (112.152.xxx.18)

    .. 그러니까요. 멍청한 놈이죠. 그리고 낚시에 성공해서 정신줄 놓고 혼자 신나서 먼저 내려가서 호들갑 떨고...

  • 8. 저는
    '15.10.19 4:24 PM (222.107.xxx.182)

    대학교 2학년 때 농활을 갔는데
    그 마을에 고등학생 애들이 몇몇이
    저를 좋아한다고 표현하려 애썼어요
    농활 마직막날 보통 마을잔치라고 해서
    막걸리도 사놓고 마을 어르신들 모셔서 놀기도 하는데
    저 좋아한다는 애 하나가 저보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나오라는거에요
    마을잔치 하던 집에서 나와 애들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려는데
    갑자기 덜컥 무서워지는겁니다.
    동네는 그 잔치하는 집 빼고는 조용하고
    가로등 하나 없이 캄캄한데
    애들은 한둘이 아닌것 같구요
    그래서 그냥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에요
    두고두고 잘했다 생각합니다

  • 9. 원글
    '15.10.19 4:37 PM (112.152.xxx.18)

    저는님, 참 잘하셨어요.

  • 10. ....
    '15.10.19 5:21 PM (211.252.xxx.12)

    우와 넘 오싹한게 제가 동생과 자취하면서 동생은 시험기간이라 낮에 집에서 공부하다가 밖에서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에 제가온줄알고 언니야?문열었다가 깜짝놀라서 문열었다가 낯선놈을 보고 문닫고 비명을 질렀다네요 다행히 간작은 도둑놈이어서 줄행랑을 놓았지만 제가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 와서 무섭다고 제일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들어갔어요...그때랑 비슷하고요....
    제가 이사간집에서 일주일도 안됐는데 옆집이라면서 문두드리길래 문을 열었더니 옆집남자놈이 술처먹고
    게슴츠레하고 발그레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더니 며칠뒤 경찰이 와서 옆집놈이 어디갔는지 묻고
    혹시 들어오면 연락주라더니 한일주일뒤 잡혔다고 연락오고 4~5년째 빈집인데 며칠전에 잠깐 열려있더군요
    그집에 누구라도 와서 살게되면 빨리 이사가야겠어요

  • 11. ....
    '15.10.19 5:23 PM (211.252.xxx.12)

    그리고 그놈이 제집에 들어오려고 해서 못들어오게 바로 문닫았구요...아이들이 어려서 엄마없을때
    누가 문열어달라면 절대 집에 아무도 없는척 문열어 주지말라했어요..우리집에 찾아올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 12. 진짜무서워요
    '15.10.19 5:59 PM (218.239.xxx.9)

    따라내려갔다면 어쩔뻔했어요
    열쇠돌리던놈도 님이생각한 그놈이 맞을꺼에요
    이상하게 나쁜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죠?
    정말 얼켜있던게 샥 정리가 되더라구요
    그때 그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한건다 알겠더라구요.
    두사건모두 아빠가 도우셨나봐요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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