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움이 필요한 할머니
중 3때였어요. 지금으로 부터 거진 20년 전이었어요.
그 때 부산 서면은 번화가로 변모하는 중이었고 대로변은 큰 건물들이 많았고
안쪽으로는 다세대 주택들이 즐비한 그런 골목길이었어요.
드문 드문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같은 것도 있었구요.
어느날 혼자 버스를 타고 그 골목에 있는 이모집에 갈 거라고
대로변에서 내립니다.
내리자 마자 이분도 안되어서 키작고 마른 어떤 40대 정도의 남자가 저에게 다가옵니다.
학생, 저기 육교에서 어떤 할머니가 못 일어나셔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같이 가서 도와주면 좋겠어.
인상이 선하게 보입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추악하고 그런지 몰랐죠.
죽음이라는 것이 있고 슬픔이라는 게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그 나이에 신문을 열심히 보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승낙을 하자
그 아저씨의 얼굴에 꽃이 핍니다 (이건 세월이 지나서 기억을 조작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더욱 생생해지는 장면입니다)
마치 신난 어린아이 회전목마 타러 가듯 거의 뛰다시피 급하게 걸어갑니다. 저는 뒤에서 따라갔지요.
걸음걸이가 완전 스타카토예요.
한 십분쯤 갔을까 그 아저씨는 다세대인지 그냥 건물인지 그건 정확치 않은데
재빨리 지하로 내려가는데 아무생각없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지하 계단 바로 앞에서
무슨 고리에 걸린 듯 누가 내 발목을 잡듯이 자동정지가 됩니다.
아저씨의 대사가 들립니다. 아래는 컴컴합니다.
할머니, 착한 학생이 도와주러 왔어요. 어쩌고 저쩌고...
할머니 소리, 기척도 없어요.
순간 생각할 일초도 없이 저는 자동으로 뒤돌아서서 전력질주를 했어요.
뒤에서 쫒아오는지 아닌지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거
무조건 대로변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뛰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제가 아무리 과장이라도 올림픽은 무리고 전국체전 나갔으면 동메달을 획득했을 겁니다.
그리고 곧 그 해프닝은 잊었죠. 뭘 했을거라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세월이 지나서 어른이 되고 사건사고를 보고 괴담을 듣고 이 때 무언가 내 발목을 잡던 그 무엇이 없었다면
나 살아있었을까? 살아 있었더라도 정상적으로 편안히 살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정말 다행이고 상상만해도 오싹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그 어떤 힘,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 혼자 돌아가는 열쇠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그 때 당시는 이런 고층아파트는 많이 없었고 맨션이라고 부르는 5층까지 아파트가 많을 때였어요.
생계를 책임지시는 엄마, 늘 집에 안 계셨고, 저도 자습하느라 늦게 왔고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열쇠는 경비실에 맡겼어요. 그 때 많은 집들이 그랬어요.
그리고 맨션 규모가 크지 않아서 누구집에 숟가락 몇개인지까지는 아니라도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때 였지요.
경비실도 맨션 입구에 한 개 있었어요.
엄마가 식당을 하셔서 늦게 오셨어요. 새벽에 오셨죠.
학교 갔다 와서 혼자 밥먹고 곯아 떨어지는 게 보통인 날이었죠.
그날, 그날따라 새벽에 깹니다. 느낌이 너무 안좋아요. 현관 쪽으로 나가보니 위 열쇠가 천천히 천천히 돌아갑니다.
문 따는 게 아니라 열쇠를 넣고 소리 안나게 숨죽여서 하는 그런 거요.
천천히 돌아가는 데 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그 느낌.
당황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열쇠를 도로 돌렸습니다.
문 따던 그 놈도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똑딱이를 겁니다.
내쪽에서도 그 쪽에서도 아무 소리를 안 냅니다.
저는 티브이를 켜고 불이란 불은 다 켰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차라리 경찰에 신고할 걸 그랬나 싶어요.
과연 와주었을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그 때 역시 엄마에게 문이 열리려고 해서 내가 안에서 도로 잠궈버렸다라고 말했고
별로 놀라지도 않으셨던 거 같아요. 제 말을 믿는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우린 열쇠를 바꿨고 다시는 열쇠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듬해 대학을 갔고 저희 집이 꼭대기 층인데 옥상에서 내려와 베란다를 통해
침투하려다가 실패했더군요.
근데 신기한 거 말이죠. 저는 그 때 대충 누가 범인인 줄 추측은 했습니다.
경비아저씨 중에 한 명입니다.
늘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말을 걸고, 그 때만 해도 하도 나이브해서 누가 무슨 의도가 있어
어떤 행동을 한다라고 생각조차 안할 때였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역에 발성이 안되어도 세계 영화감독에게 바로 캐스팅될 그런 인상이었어요.
40에 후반에서 50대 초반. 세월이 지날 수록 그 사람의 얼굴이 또렷히 몽타쥬가 아니라 세밀화를 그릴 정도로 분명해집니다.
오싹합니다.
그 순간 제가 자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때도 아빠가 깨워주셨다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잘 몰라서 덜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서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지만
이제는 제가 아는 이상
아이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아요.
서로 믿고 사는 세상, 아름답지만
그래서 어디서든 늪에 빠질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이런 교육시간 많이 가졌으면 좋겠고
또한 정부와 국회에서 어린이, 여성 대상의 범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특단의 조치를 발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런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도록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정신이 건강한 세상으로 가는 길을 닦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부모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도 못숨이 있어야지 누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