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김원봉이 귀국했을 때 고향인 밀양 사람들은 밀양역에서 환영대회가 열리는 초등학교까지 가마니를 깔았다는 말을 들었다. 최근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한 방송인터뷰에서 “오빠가 밀양까지 오는데 학생들이 전부 다 태극기 들고 만세하고 맞이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상황은 곧 반전되어 세상은 다시 친일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들은 의열단 단원 유석현 선생 이야기가 있다. 해방 후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종로 한 복판에서 체포되어 수모를 겪은 후 유석현의 집을 찾아가 며칠 밤낮을 울면서 통음하다가 김구와 남북협상 때 방북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월북이 아니라는 뜻이다. 막내 누이 김학봉은 경남여고 2학년 때 형사들에게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지금도 손을 못 쓴다고 말했다. 다른 누이, 오빠들이 모두 살해된 것에 비하면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할 수 없이 북한으로 갔으나 “한 사람이 아홉 사람을 위하고, 아홉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김일성 개인을 우상화하던 북한 전체주의가 맞을 리 없었다. 북한에서 김원봉의 최후는 북한이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려면 김원봉의 의열투쟁 등을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김원봉의 이름을 한국사교과서에서 지울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거꾸로 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즉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귀국한 김원봉을 뺀 교과서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광복 70주년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