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사도세자가 가진 특이한 기록

mac250 조회수 : 29,353
작성일 : 2015-08-05 17:35:48
궁녀들이 승은을 거절함
궁녀에게 승은이라는 건
인생 필 수 있는 로또와도 같은 것인데
궁녀들이 세자의 승은을 거절하던 시대가 사도세자 시절입니다

물론 세자는 거절하면 거절한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때려패서 코피가 나더라도 할 건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내관의 머리를 베어 던지고
맘에 드는 궁녀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관계를 가져야 하고
마누라인 혜경궁에게는 바둑판까지 던졌다하니.....

당시 세자궁은 지옥 그 자체였을지도..

물론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영조라는게...
IP : 119.212.xxx.118
14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5.8.5 5:40 PM (210.93.xxx.125)

    전 첨듣는 얘기라....

    혹시 이런세자니 죽어마땅하는 근거로 만들어낸 기록은 아니고요?? (몰라서 묻는거임...이럴수도 있지않나해서..)

  • 2. mac250
    '15.8.5 5:43 PM (119.212.xxx.118)

    한중록의 사도세자 파트는
    우리남편 죄없거든
    그러니까 빨리 우리 남편 왕으로 추숭시켜줘
    이 목적하에 저술된 책입니다
    그러니 미화되면 미화되었지
    절대 나쁘게 기록될 책은 아니죠

  • 3. 어머나
    '15.8.5 5:47 PM (221.143.xxx.203) - 삭제된댓글

    얼마나 싫으면 그렇게 무섭게 구는데도 거부를....

  • 4. 한중록은
    '15.8.5 5:48 PM (110.47.xxx.210)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그 배경세력인 노론을 경계할 때,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억울함과 불쌍함을 어필하기 위해 쓴 책이었다는 썰이 있더군요.
    어쨌든 혜경궁 홍씨나 그 일가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건 사실로 보입니다.

  • 5. 지니
    '15.8.5 5:49 PM (123.214.xxx.63) - 삭제된댓글

    윗님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을 변호하기 위해 쓴 거에요. 사도세자를 죽일 때 죽여야 한다고 영조에게 처음 말한 사람이 생모인 영빈이씨이고 뒤주형을 제안한 사람이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환이죠.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자인 셈이죠. 혜경궁의 집안과는 당파가 달랐고 아들인 정조를 세손으로 해준다는 약속을 영조에게 받고 혜경궁 또한 동참했고요.

  • 6. 정조의 이복동생인
    '15.8.5 5:49 PM (110.70.xxx.115)

    은전군을 낳은 자기 후궁 박씨(빙애라고 하는)도 베어 죽였죠.
    정신병과 악행은 사실인데... 이게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영조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겠죠.

  • 7. 지니
    '15.8.5 5:52 PM (123.214.xxx.63) - 삭제된댓글

    뒤주에 며칠을 갇혀 울부짖어도 아들인 정조만 와서 울며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 했을 뿐 모두가 방관했어요. 사도세자가 영조와 당파가 다르게 된 과정을 알면 이 가족살해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되고요.

  • 8. 그런데 어떻게
    '15.8.5 5:54 PM (110.47.xxx.210)

    혜경궁 홍씨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홍씨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비호하지도 않았고 홍씨가 사도세자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듯 한데 희한하게도 홍씨에게만은 관대한 편이었단 말입니다.
    진짜 정신병자였다면 처첩을 구분할리가 없을텐데요.

  • 9. 지니님///
    '15.8.5 5:57 PM (110.70.xxx.115)

    사도세자의 광증은 심각했어요. 세자를 폐하면 죄인의 아들도 왕이 될 수 없는 게 원칙이었지만 영조는 아들을 폐하고 손자로 보위에 올릴 생각을 했죠.(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서요) 사실 세손의 똑똑함이 영조의 결정을 앞당겼다고 봐야겠죠.
    거기에 주변인들이 자신과 세손과 가문을 위해 모두 영조의 결정에 동조한 간 안티까운 일이죠.

  • 10. ..
    '15.8.5 5:59 PM (59.1.xxx.104)

    재미있어요~~
    더 듣고 싶은데 퇴근하네요

  • 11. 그러니까
    '15.8.5 6:02 PM (110.47.xxx.210)

    심각한 사도세자의 광증에서 혜경궁 홍씨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느냐는 거죠?
    멀쩡하던 남편이 부부싸움으로 아내를 죽이는 경우는 요즘도 흔하잖아요.
    그런데 뒤주에 갖혀 죽어야 할만큼 심각하게 미쳤던 사도세자가 본처인 혜경궁 홍씨에게는 왜 손을 대지 않았냐, 그것이 궁금합니다.

  • 12. 지니님///
    '15.8.5 6:04 PM (110.70.xxx.115)

    세자가 당파싸움의 희생자라는 것도, 소론에 가까웠다는 것도 실록이 완역되기 전에는 설득력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세자가 가장 믿었던 건 장인 홍봉한이었죠. 세자가 죽을 때 영조는 이미 일흔이 가까운 노인이었고 세자의 비행을 끝까지 조정은 감추려고 했어요. 영조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홍봉한이 세자를 포기했다고 봐야겠죠...

  • 13. ..............
    '15.8.5 6:06 PM (114.200.xxx.50)

    홍씨는 사도세자에게 헌신적으로 하지 않았을까요? 아주 옛날 하희라 나오던 한중록 드라마에서 둘사이는 좋았던거 같았어요. 시부모한테도 사랑받고...
    그런데 저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솔직히 아무리 왕자라도 사형을 받아야하는 건 사실이네요. 무고한 사람들이 여럿 살해됐는데 단지 왕자라서 그 죽음이 안타깝지는 않네요.

  • 14. 정신병....
    '15.8.5 6:08 PM (210.93.xxx.125)

    안됐네요.... 주변사람 다 미치게 만드는게 정신병인데...하물며 왕 다음의 무소불위권력을 가진자가 정신병이니.... ㅠ.ㅠ 근데 궁녀들은 왜 승은을 거부했을까요? 정신병때문에?? 거절해도 죽잖아요?

  • 15. 세자가
    '15.8.5 6:09 PM (110.70.xxx.115)

    죽인 건 나인, 내시, 상궁, 후궁 등 100여 명인데,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조선 왕실에서 세자빈을 때려죽이기는 쉽지 않죠.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면 나인들이 말리고 그와중에 나인들에게 폭력을 썼겠죠.
    그리고 홍봉한 등과 세자는 사이가 좋았어요. 세자가 믿고 따랐죠...한중록에도 다른 외척과 다르게 자신의 처가와 장인이 급제자라고 자랑스러워했다는 기록도 나오고요. 홍봉한이 세자의 비행을 감싼다고 반대파에게 공격받은 기록도 있습니다. 영조를 거슬러 세손에게 화를 미칠까 임오화변 당시에는 세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 16. 영조나뻐
    '15.8.5 6:10 PM (175.170.xxx.26)

    사도세자가 정신병 든건 아버지 영조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어릴때부터 사도세자를 쥐잡듯 잡아서 공부를 시켰다네요 책잡히지 않을 완벽한 군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공부하는걸 매일 지켜보고 시험에 불통이면 만점 나올때까지 벌주고 공부시키고ᆞᆢ아무리 똑똑해도 정신병에 편집증 생길수밖에 없을듯ᆢ

  • 17. 혜경궁 홍씨가
    '15.8.5 6:11 PM (183.100.xxx.240)

    남편을 위하는 포지션은 취했겠죠, 조선시대니.
    그렇지만 혜경궁은 친정의 당파를 위해 산 사람이예요.
    사도의 광증이 사실이었지만
    영조가 가진 컴플렉스나 권력욕이나 당파를 잠재우기 위해
    영특했던 아들의 심신이 희생당한건 사실이예요.
    권력은 아들과도 나누기 힘들다고.

  • 18. 영조는 적자가 아님
    '15.8.5 6:11 PM (223.62.xxx.17)

    그래서 노론에 의해 추대된 왕이에요.
    왜냐?그래야 영조의 약점을 잡고 끊임없이 자기들 뜻대로 흔들수 있기 때문이죠
    즉..영조는 노론일파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에요
    나중에 들어온 젊은 후궁도 노론쪽 사람이고..
    그들이 작당해서 사도세자를 죽인거에요.
    영조는 힘에서 밀려 자기 자식 죽인거고요..
    그들이 사도세자를 죽인걸 보니..사도세자가 엄청 똑똑했었나보다..추측이 갑니다.
    노론에게 개혁군주는 제거 대상이어요.
    사도세자 부인이었던 혜경궁홍씨가 바로 노론의 수장딸...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살리기 위해 남편을 내어줍니다..
    운명이 기구하네요..

  • 19. 뒤주에서 죽는건
    '15.8.5 6:12 PM (110.47.xxx.210)

    세자의 죽음으로는 적절치 않았어요.
    영조가 과연 사도세자를 죽일 목적으로 뒤주에 가뒀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 때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해 노력한건 어린 정조 뿐이었죠.
    사이 좋았던 혜경궁 홍씨는 어디로 갔던걸까요?

  • 20. ㅇㅇ
    '15.8.5 6:13 PM (121.173.xxx.87)

    근데 왜 영조는 자식을 단칼에 혹은 사약으로 죽이지 않고
    한여름에 뒤주속에 가둬서 거진 며칠을 말려 죽인걸까요?
    그만큼 자식에 대한 증오가 엄청났던 건지...
    아니면 사도세자의 평소 악행이 너무나 지독해서
    그렇게 처절한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도중에 누가 영조를 말린다고 해서 냉큼 아들을 꺼내줄 생각도
    없었던 거 같은데 말입니다.

  • 21. ///
    '15.8.5 6:15 PM (61.75.xxx.223)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를 살리기 위해 남편 사도세자를 내어준 게 아니라
    친정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내어주었습니다.
    아들 정조가 왕이 되었을때도 정조에게 힘을 보태어 주지 않고 오로지 친정을 위해
    아들 속 많이 뒤집은 엄마입니다.
    역대 군주의 엄마 중에서 최악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 22. ...
    '15.8.5 6:16 PM (39.121.xxx.103)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들었어요.
    죽은 내관의 머리를 들고다녔다하고..

  • 23. 사도세자의 악행 중 많은 부분은
    '15.8.5 6:17 PM (110.47.xxx.210)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기초합니다.

  • 24. 실제로
    '15.8.5 6:18 PM (183.100.xxx.240)

    광증이 있었겠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양반들은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으니
    사도를 죽이고 그사람에 대한 미담이 생기게 둘까요?

  • 25. 지니
    '15.8.5 6:19 PM (123.214.xxx.63) - 삭제된댓글

    제가 알고 있기로는 경종이 죽기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영조가 들고간 거라 경종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계속 받아서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도세자가 아기였을 때부터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이 기르게 했다고. 영조와 영빈이씨는 일부러 아들의 교육에 거의 동참하지 않아서 사도세자는 경종의 당파가 되었다고 했어요. 정신병은 옷을 입지 못해 맨날 찢었다는 것과 가끔 착란증세를 보였다는 것. 자신도 병을 인식해 부인과 장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배척당해 내가 너희와 당파가 달라 나에게 이러는 거냐 하며 통곡을 했다고도 하고요. 제가 읽은 책들이 실록이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가 들어간 것들이라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요.^^ 더 자세한 얘기 알고계신 분든 댓글 궁금합니다.

  • 26. 영조도
    '15.8.5 6:20 PM (110.70.xxx.115)

    서자 출신에 너무나 천한 생모의 신분 + 미심쩍은 경종의 죽음 + 적절치 못한 왕위계승...으로 인한 컴플렉스가 유일한 왕위계승자이자 자신의 아들을 망친 거죠. 선의왕후(영조의 형수, 경종의 계비)가 계획대로 소현세자의 후손을 양자로 들였다면 영조는 왕이 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왕권이 강력했고 조정을 거의 통솔했고... 능력이 상당했던 영조가 신하들의 꾐에 빠졌거나 해서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건 맞지 않고, 세자의 기행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 뒤주라는 잔인성으로 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버지 숙종도 굉장히 지랄맞은;; 성격의 왕이었으니까요... 성질 더럽고 호되게 갈구기 일쑤며 변덕이 죽끓듯했던 아버지가 절대권력자... 안타깝기 그지 없죠.

  • 27. 어저면 영조는
    '15.8.5 6:21 PM (110.47.xxx.210)

    사도세자를 핍박하며 몰아대는 무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세자가 저렇게 뒤주에 갖혀서 죽어가고 있다. 좋으냐? 응?"
    그런 질문이 담긴 뒤주행이 아니었을까 하네요.
    그러니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왕세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들에게 찍혀서 왕위계승이 자유롭지 못한 아들을 내주고 그의 아들인 손자를 대신해서 왕위를 계승시킨게 아닐지요.

  • 28. 실제로
    '15.8.5 6:21 PM (183.100.xxx.240)

    왕이 컴플렉스 덩어리고
    야망은 커서 많은 일을 이뤘지만
    끊임없이 경계하고 살아야하니
    아들을 정상적으로 편하게 뒀을까요?
    잘한다고 했을지는 몰라도
    세자가 정신병에 걸릴 환경이죠.
    그리고 세자가 미친놈이 되야지
    당파에 빠진 양반들의 당위성이 서는데요.

  • 29. ///
    '15.8.5 6:22 PM (61.75.xxx.223)

    혜경궁 홍씨의 친정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홍씨의 작은 아버지는 세손시절의 정조를 제거하려고 온갖짓을 다했고
    홍씨의 오빠는 즉위한 정조를 암살하려고 별별 짓을 다했어요
    결국 정조는 살아남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집안을 몰락하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사도세자가 처복이 없어도 더럽게 없는 경우죠.

  • 30. ㅇㅇㅇ
    '15.8.5 6:23 PM (219.240.xxx.37)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하는 강의를 들었는데,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여럿, 마음에 안 들면 궁녀고 신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해요.
    칼 수집가여서
    조선 최고의 칼 만드는 사람을 직접 궁에 불러들이기까지 했다고.
    그런데 그 장인도 자기가 직접 죽였대요.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수십 명이 된다죠? 거의 연쇄살인범.
    사도세자 본인도 스스로 광증에 대해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있다네요.

    뒤주속에 가둬 죽인 건,
    (오래전 강의라 정확한 기억은 아닙니다만)
    사도세자가
    약간 정신병 있지 않았나요?
    걸핏하면 땅을 파서 거기 들어가 자고 그랬대요.
    심리학 용어가 있다던데
    무덤같은 곳에 들어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성향이 있었다고 하고요.
    뒤주는 영조가 일부러 죽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사도세자가 그 전에도 뒤주에 자주 들어갔대요.
    결과적으로 잘 못 돌봐서 죽게 되었지만

    강의 들어보니
    사도세자를 누가 감당했을까 싶더라고요.
    거의 사이코패스잖아요.
    요즘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았겠지요.

  • 31.
    '15.8.5 6:25 PM (110.70.xxx.115)

    왜 형과 형수의 나인들로 하여금 마흔 넘어 본 귀한 아들의 시중을 들게 하였는가...(선왕의 나인들이 시자를 모시게 함으로써 권위를 세우려 한 것이라는데요) 그러한 영조의 결정이 사도세자=친소론이라는 논쟁을 지속시키고 있죠;;; 그 나인들이 세자를 모신 시기는 몹시 짧았고(쫓겨나서) 제가 본 기록에서는 세자가 친소론적 결정을 하거나 소론과 가까운 모습을 보인 적도 없습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싫어할테니까요. 대리청정할 때도 아버지가 소론에 가까우면 소론의 편을 들었고, 노론에 힘을 실어주려 하면 노론의 편을 들었습니다.

  • 32. ㅇㅇㅇ
    '15.8.5 6:25 PM (219.240.xxx.37)

    위에 장인은 칼 만드는 장인입니다.

  • 33. 어떤 기록에는
    '15.8.5 6:26 PM (118.46.xxx.78)

    동복 남매인 화완옹주랑 근친상간이어서, 그래서 친엄마인 영빈까지 완전히 돌아섰다는 설도 있어요.
    한중록에도 '밤새워 놀고 같이 자고..' 뭐 이런 구절이 있다고 들었네요.

  • 34. ㅇㅇ
    '15.8.5 6:28 PM (121.173.xxx.87)

    음, 평소에 뒤주에 들어가길 좋아했는데
    그날따라 문짝이라도 닫힌건가요?
    잘 못돌봐서 죽었다는 건 말이 안되죠.
    그럼 정조가 할아버지께 아버질 살려달라고
    빈 건 뭡니까. 다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걸
    아는데 꺼내질 못했다뇨.
    돌보질 못해서 죽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일 의도로
    아들을 뒤주에 밀어 넣은거겠죠.
    세자가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세자씩이나 되는 사람을
    왜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는가 당시 상황이 참 궁금하네요.

  • 35. 한중록의 탄생배경이 바로
    '15.8.5 6:28 PM (110.47.xxx.210)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위태로울 때였어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고 그때문에 사도세자의 정신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건 사실일지 몰라도 한중록이라는 책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과다하게 부풀린 것은 아닐까 의심스렀습니다.
    정조 역시 겉으로는 생일잔치도 크게 베풀어주며 효도를 하는듯 했지만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정작 모자관계가 그리 살갑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 36. 세자는
    '15.8.5 6:30 PM (110.70.xxx.115)

    폐소공포증이 의심될만큼 어둡고 좁은 곳을 무서워했다고 하는데... 아마 그때문에 뒤주에 가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당쟁의 희생자라면 왜 홍씨 가문 등 조정 세력들이 세자의 비행을 빨리 고변하지 않고 숨겼겠어요. 일흔이 가까운 늙은 왕이 후계자를 잃게되는 불안한 상황을 걱정한거죠. 그리고 신하들이 자신에게 숨겼다는 것도 영조의 빡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37. ㅋㅌㅊㅍ
    '15.8.5 6:32 PM (125.133.xxx.51)

    가장 미화된 인물 중 하나가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밝혀진것만 수십명이 넘고
    툭하면 살인 강간 폭행을 일삼은 희대의 싸이코패스에요

  • 38. 영조가
    '15.8.5 6:33 PM (110.70.xxx.115)

    편애가 심했다고 하는데 그건 한중록의 기록이고 + 실록에는 고루 사랑했다고 합니다. 싫어했다는 화협이나 화순옹주도 어여삐여겼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고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소생인 화평(사도의 누나)이나 화완(여동생)도 몹시 아꼈다고 하는데 희한한 건 영빈이 병이나자 세자와 화완이 문안을 왔는데 둘이 한 방에 있는 걸 보고 불같이 화를 내서 세자가 도망갔다는 기록... 친남매가 어미의 문안을 같이 한 걸 보고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서 훗날 남매 간의 근친상간 이야기가 픽션으로 돌게 되죠;;;;

  • 39. 춘양목
    '15.8.5 6:36 PM (110.47.xxx.210)

    영조가 유달리 아꼈던 화완옹주 등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일일이 고해 바친 것으로 압니다.
    한마디로 당시 사도세자 주변에는 자신을 보호해 줄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감추긴 누가 뭘 감춰주나요?

  • 40. 정신병
    '15.8.5 6:37 PM (175.223.xxx.80)

    편집증과 강박 장애가 아주 심했대요. 미화된 사람 중 하나. 영조도 편집증. 정신병의 유전 사례.

  • 41. ㅇㅇㅇ
    '15.8.5 6:38 PM (219.240.xxx.37)

    제가 강의도 듣고 ebs다큐멘터리도 보고 그랬는데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니까
    밥도 안 주고 신하고 왕이고 죽거나 말거나 방치한 거 같아요.

    그런데 이런 글 너무 좋아요.
    저는 다시 대학 진학할 수 있다면 사학과 가고 싶어요.
    잘 아는 분 더 댓글 부탁해용.

  • 42. 싸이코 패스로
    '15.8.5 6:39 PM (183.100.xxx.240)

    단정짓기엔 그시대가 어떤지도 봐야해요.
    신분제 사회였고 살인 강간 폭행의 기록이 정확하지도 않아요.
    허울뿐인 절대권력을 가졌지만 궁녀들이 거부했다는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승은을 입어서 자식을 낳는게
    더 해로울 상황이어서 일겁니다.
    그 시대에 취향이 별나고 무서워서 궁녀가 거부한다구요?
    말도 안되죠...

  • 43. 춘양목님///
    '15.8.5 6:40 PM (110.70.xxx.115)

    홍봉한이 세자를 감춘다고 반대파가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위에 적었는데요... 그리고 화완이 오빠를 몰고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올케인 혜경궁과는 나빴죠) 그녀의 시댁은 소론이었습니다... 한중록에도 정조 즉위 시기에 화완의 잘못을 묘사했지 세자의 죽음과 그녀를 연관시키진 않았어요

  • 44. 춘양목님///
    '15.8.5 6:41 PM (110.70.xxx.115)

    세자 주변에 비호 세력이 없던 건 사실이지만... 영조가 세자를 싫어하고 광증을 자꾸 일으키니 주변에 사람이 없을 수밖에요... 세자 곁엔 형수 현빈 조씨의 친척인 조재호와 장인 정도였죠.

  • 45. ..
    '15.8.5 6:41 PM (211.177.xxx.40)

    아버지의 사랑을 못받고 자라서 화가쌓인 아들이 그 분풀이로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죽인 미친놈이 사도세자입니다

  • 46.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와 있는 것만으로도
    '15.8.5 6:42 PM (110.47.xxx.210)

    불같이 화를 낸 것이 영조였는데, 만약 자신의 궁녀에게 손을 댔다고 하면 영조가 퍽이나 그 궁녀를 두고 보겠습니다.
    궁녀들은 사도세자가 아닌 영조가 무서워서 사도세자를 피해 다녔을 듯 하네요.

  • 47. ㅇㅇ
    '15.8.5 6:44 PM (121.173.xxx.87)

    당시 정치적 상황이고 당쟁이고를 떠나
    수십명을 죽일 정도였으면 그 자체로
    연쇄살인범 싸이코패스 맞죠, 뭐.

    암튼, 영조가 세자의 광증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돼요.
    궁만큼 소문이 빠르게 도는 곳도 없는데 왕권이 강하기로
    유명했던 영조 시대에 왕이 그 사실을 모른다뇨.
    이건 누가 감춘다고 감춰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죠.
    당쟁이 유별난 만큼 다른 파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없는 허물도 만들어 낼 판에 있는 사실을 왜 보고 안하겠어요.
    그것도 당장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끔찍한 악행들인데.

  • 48. 드라마나
    '15.8.5 6:45 PM (110.70.xxx.115)

    영화, 소설에서 노론의 책임인 것처럼 몰고 가서... 세자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정쟁의 희생자인 것처럼 많이들 알고 계시지만 90년대 실록이 완역되기 전에 + 드라마틱한 요소 때문이고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다르죠. 정조독살설도 마찬가지고요ㅜ (저도 사도세자의 고백 읽었습니다만 이게 다 이덕ㅇ 씨 때문...) 전문 사서가 어려우시다면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추천합니다...

  • 49. 그러니까 사도세자는
    '15.8.5 6:46 PM (110.47.xxx.210)

    세력가였던 처가의 비호조차 받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어요.
    그런 사실로 미루어 사도세자는 처가에 휘둘릴만큼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을 거라고 보네요.
    만약 처가에서 사도세자를 휘두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 50. 사도세자가
    '15.8.5 6:47 PM (221.143.xxx.203) - 삭제된댓글

    어릴때 매우 영특했지만 10살 이후로 공부를 싫어해서 영조와 틀어지기 시작했나봐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싫어해서 옷입기를 싫어하는 병이 생겼다던데 원인 제공자는 영조가 아닌가싶네요.

  • 51. ...
    '15.8.5 6:48 PM (39.121.xxx.103)

    희대의 폭군 연산군보다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은 인물이 훨씬 많은 인물이 사도세자죠.
    혜경궁 홍씨도 사도세자도 많이 미화된 인물이에요.
    그러니까..역사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극화된 인물들.

  • 52. 윗분 말씀 보고 생각난 것...
    '15.8.5 6:48 PM (110.70.xxx.115)

    빙애로 알려진 세자의 후궁 박씨가 인원왕후(숙종의 3비)의 나인이라 윗전 나인은 손대는 것이 아니던 당시 궁중 법도를 어겨 영조가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화내던 영조니까 알만하죠;;;; (숙종도 장렬왕후 나인이던 장희빈 건드렸는데...)

  • 53. 영조의 노여움이 무서웠던 사도세자는
    '15.8.5 6:50 PM (110.47.xxx.210)

    결국 빙애를 죽이는 것으로 아버지의 질책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거군요.

  • 54. ㅇㅇ님
    '15.8.5 6:53 PM (183.100.xxx.240)

    권력의 주변에 얼마나 아첨꾼들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술수가 난무했을까요?
    사도가 광증에 이르렀겠지만
    악행 자체가 승자의 덧칠이 많이 입혀진 거예요.

    요즘같은 사회에서도 박근혜 주변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고
    직언을 할 사람이 없을거 같은데요?
    그래서 지도자의 판단력이 중요한거죠.

  • 55. 빙애를
    '15.8.5 6:53 PM (110.70.xxx.115)

    죽이는 게 어떻게 아버지의 질책에서 벗어나는 길이죠.;;;;;; 왕손의 어미를 죽였다는 것도 세자의 관서행과 함께 죽음에 있어 중요한 죄목 중 하나였습니다...;;; 세자의 잘못을 간언하다 맞아죽었다고 하는데 광증의 발현이겠지요.

  • 56. 그런데
    '15.8.5 6:58 PM (110.47.xxx.210)

    참 신기하게도 혜경궁 홍씨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광증이란 것이 처첩을 가려서 발병하는 것인 모양이죠?

  • 57. 아무 일도 없다뇨;;
    '15.8.5 7:07 PM (110.70.xxx.115)

    원글에도 있듯 혜경궁한테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알이 빠질뻔했다는데 광증으로 인해 안 죽인 게 이상하단 말씀인가요;;

  • 58. 지나가다
    '15.8.5 7:15 PM (110.11.xxx.30)

    아~ 이런 글 넘 좋아요.
    82의 매력~

  • 59. 바둑판에 맞아 왼쪽 눈알이 빠질뻔 했을 정도라면
    '15.8.5 7:18 PM (110.47.xxx.210)

    혜경궁의 얼굴 왼쪽에는 큰 흉터가 남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혜경궁의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는 기록은 없더군요.
    예전의 바둑판은 요즘처럼 가볍게 접어가지고 다닐 수 있는 그런게 아닙니다.

  • 60. ㅇㅇ
    '15.8.5 7:35 PM (112.171.xxx.1)

    실록에 기록이 많이 남아있구요.
    사도세자가 미화된 건 정조가 영조에게 승정원 일기를 불태워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요.
    한중록도 실록과 교차비교해보고 연구해본 결과 어느정도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궁중에서 그 많은 것을 보고 산 사람의 기록입니다.
    한중록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도세자는 아플만 하죠. 그게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요.
    당파 어쩌고 하시는데 ㅋㅋㅋㅋㅋ 애초에 사도세자는 당파가 없었어요.
    늦둥이에다가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영조가 애지중지했죠. 실록에도 그런 팔불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건 쉽게 발하자면 사도세자가 공부를 안해서에요.
    군주로써 해야할 공부를 안했으니 점점 영조 눈밖에 난거죠.
    실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공부했다고 신하들이 기뻐하는 기록도 있답니다. ㅋ
    영조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아들을 어르다가도 핍박하고 아들은 가출하고 뭐 막장극이지요.
    그 와중에 광증도 발병한 거 같구요. 하지만 나름 제정신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당파건 뭐건 상식적으로 장성한 세자 편을 들겠습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 왕의 편을 들겠습니까?
    그래서 신하들이 세자의 비행을 많이 감췄습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침묵을 택한 건 영조의 의중을 신하들이 알았다고 봐야죠.
    이대로 가다가는 연산군보다 더한 폭군이 나와서 왕조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나중에 사도세자가 갇힌 후 그 패거리들이 백성들에게 갈취한 걸 알고 영조가 사과한 기록도 있어요.
    사과하고 재산을 잃은 만큼 돌려 주라고 했죠.
    사도세자 사건의 핵심은 신하들이 아니라 친모 영빈 이씨가 직접 영조를 찾아가서 고변했다는 겁니다.
    친모가 나설 정도면 어느정도인지 상상이 안되세요?
    신하들이 오히려 아녀자의 말만 듣고 세자를 구속하려고 하냐고 반대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영조는 저 말을 듣자마자 군사들을 이끌고 사도세자를 불러오게 했거든요.
    영빈 있는 평생 한탄하고 세손에게 잘해줬다 하지요. 오래 살진 못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아들에게 대처분을 내려달라고 할 심정이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게 아들과 며느리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죠.

    혜경궁 홍씨에 대해서는 그때 당시 조선이 연좌제였고, 폐세자의 가족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잘 생각해보시면 알겠습니다. 민회빈 강씨가 대표적이죠.
    그렇게 당파를 위해서 살 정도의 여자가 저걸 생각 못했으려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편이 미쳐 있으면 더 좋죠. 왕으로 올려서 뒤에서 권력 잡으면 되는데 뭐하려고 남편을 죽이려고 들겠나요.
    사도세자는 폐세자였고, 정조는 그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겁니다.
    혜경궁 홓씨도 대비 칭호를 못 받은 게 그것 때문이구요.
    당연히 혜경궁 홍씨와도 말년엔 사이가 안 좋았죠. 초창기 때나 좋았지.

    재미있는 거 한가지 알려드릴까요? 실제로 정조는 정순왕후랑 사이가 좋았습니다. 정순왕후의 오라버니도 김귀주도 드라마에서는 정조를 핍박한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조를 보호한 인물이었습니다. 영조 말년의 사건들은 양쪽 다 정조를 보호하면서 내가 우선이다라고 투닥거린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데 나는 진짜 정조님의 충실한 신하라는. 그런데 저쪽 편은 안 그렇다는. 이런 이야기에요
    홍일한 사건도 조선시대의 금기였던 대리청정..대리청정이 참 난감한 게 내가 세자에게 대리청정하겠노라 했는데 신하들이 찬성하면 반역죄, 반대하면 괘씸죄였거든요. 난 대리청정하겠다하면 신하들은 죽어라고 말리는 게 관례였습니다. 홍일한도 반대하다가 말을 좀 더 나갔죠. 그걸 정조는 효과적으로 처리합니다. 홍일한과과 화완옹주 일당을 대리청정 사건을 빌미로 제거해버리죠. 양쪽 세력을 제거해버리면서 정조는 무난하게 왕위에 앉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미화 작업. ㅋㅋㅋㅋ
    나중에 발견된 편지를 보면 노론의 핵심세력인 심환지랑도 잘 지냈다고 하죠.

    사도세자는 대리청정할 때도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늘 영조의 의견을 물어보고 안절부절......
    생각하는 만큼 성군이라던가, 비운의 세자는 아니었단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해요. ㅋ
    사도세자에 관련해서 역사에 충실했던 드라마는 대왕의 길일 겁니다.

    나중에 영조가 아들을 죽인 책임을 신하들에게 떠넘겼어요.
    정조는 내 아버지가 미친 놈이다라고 할 수 없으니 역시 신하들이 영조의 눈을 가려서 그런 거라고 주장을 했죠.
    왕이 내 아버지가 미친 놈이다라고 해봐요. 그 왕권 어떻게 되나. 어떻게든 비운의 세자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

  • 61. ...
    '15.8.5 7:41 PM (14.52.xxx.175)

    흥미진진한 주제에 대한 흥미진진한 논쟁들.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오늘 82 분위기 좋아요. ^^

  • 62. ..
    '15.8.5 8:11 PM (180.224.xxx.155)

    이게 다 이덕ㅇ때문이다...
    뒤주라는 방법을 택한것도 저놈 공부 안하고 나쁜짓하고 다녀 버릇 좀 고쳐주려 벌준건데 죽어버렸네...하는 사고 위장용이라네요
    정조가 왕이 되게끔 사도만 제거할 방법요
    이번에 송강호 주연의 사도가 개봉하는데 어찌 나올지 기대되요..이덕일이 망쳐놓은 이야기를 어찌 풀어낼지요

  • 63.
    '15.8.5 8:22 PM (117.111.xxx.56) - 삭제된댓글

    똘똘스머프같은 ㅇㅇ님 ㅋㅋㅋ
    이글의 수혜자?는 송강호로 마무리되겠네요 ㅎㅎㅎ
    영화가 궁금해짐

  • 64. 주류역사학에선
    '15.8.5 8:34 PM (223.62.xxx.117)

    이덕일이 잘 나가니..배가 아프기도 하겠죠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니..
    그만큼 우리 국민이 역사에 관심이 많고..
    특히 그동안 왜곡되어온 역사에 눈뜨게 해준 사람이라서
    이덕일 선생에게 감사하죠

  • 65. 82
    '15.8.5 8:58 PM (121.188.xxx.121)

    잘 읽었습니다~
    훗날 미래의 후손들은 우리의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라나??

  • 66. ㅋㅌㅊㅍ
    '15.8.5 9:59 PM (125.133.xxx.51)

    이덕일 근현대사 전공자입니다 조선 전공도 아니에요 심지엋고대사 책도 쓰던데 비전공자가 쓴 책은 소설입니다. 소설책 읽고 와서 이덕일 킹왕짱 외치면 참 없어보입니다

  • 67. 헐~
    '15.8.5 10:03 PM (222.108.xxx.202)

    사학 전공자는 다 모인거여요?
    댓글들이 더 놀랍네
    무슨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 68. ,,,,,,,,,,
    '15.8.5 10:05 PM (115.140.xxx.189)

    이덕일 책을 좋아합니다 윗분말씀처럼 주류?들의 배아픔
    여기서도 보이네요,

  • 69. ㅋㅌㅊㅍ
    '15.8.5 10:25 PM (125.133.xxx.51)

    비전공자 책 재밌게 읽으세요

    소설책을 믿는건 본인 자유죠 뭐

    근데 어디가서 그런 소리하면 무식하단 소리 듣습니다

    물리학자가 미술책 쓴거 가지고 이게 진리인냥 믿고 그러는 꼴인데 ㅎㅎ

  • 70. ㅋㅌㅊㅍ
    '15.8.5 10:31 PM (125.133.xxx.51)

    진짜 82에는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참 많은것같아요

    음모론이나 믿고

  • 71. ....
    '15.8.5 10:47 PM (183.86.xxx.152)

    맹목적이라... 우리나라 주류 사학계가 서울대 교수 이병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완용 후손이고 식민사학을 일제와 함께 퍼뜨리죠. 친일파에게 식민사학은 자신들 생존의 문제였으니까요.
    고조선 연구를 30년간 하신 단국대 윤내현 교수같은 분은 저런 학계 분위기에서 항상 왕따였고 핍박받았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고 항상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H. Carr 의 '역사란 무엇인가'읽어보시죠. 의견이 다르다고 무식하다 운운하는 님이 더 무식해보이는듯..
    힘과 왜곡된 논리에 의해 주류 사학이 된 그 따위 학설을 대중이 항상 따라야 하는 건 아니죠.

    중세시대에는 천동설이 주류 과학의 학설이었어요. 언제나 학문은 변화합니다.

  • 72. --
    '15.8.5 10:49 PM (1.238.xxx.173)

    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이 있는데 정조는 이책을 금서로 했어요.
    거기서 세자를 표현하는데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세자가 내시, 무수리,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쇠끝을 달구어 피해자의 피부를 지지는 등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 라고 해요.
    이런 아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는 아비가 자식 죽음을 계획한 것 같아요.

  • 73. ㅋㅌㅊㅍ
    '15.8.5 10:50 PM (125.133.xxx.51)

    모든 역사학자가 다 이병도 제자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건가요 하긴 모든게 다 노론탓이야 친일파도 다 노론이고 군사정권고 다 노론이야 라는 소설을 쓰는 분의 얘기를 믿는 분이라면 모든 역사학자는 이병도 제자고 다 친일파야 라는 얘기도 믿을수밖에 없겠군요 스트레스 안받으시겠어요 세상을 참 단순하게 생각하시나까요 ㅎㅎ

  • 74. ㅋㅌㅊㅍ
    '15.8.5 10:51 PM (125.133.xxx.51)

    비전공자 말 믿을 시간에 조선왕조실록이나 읽어보세요

    완역되어 인터넷으로도 열람가능합니다.

  • 75. ...
    '15.8.5 10:54 PM (183.86.xxx.152)

    난독증있으신가요? 모든 역사학자가 이병도 제자라고 비약논리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병도의 서울대 사학과가 주름잡은 식민사학파가 주류였고 여전히 학계에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론과 친일파. 군사정권의 역사적 책임론은 소설이 아니죠. 실제 팩트고요. 제가 보긴엔 그 모든 걸 음모론이야라고치부하는 님이 더 단순한듯..

    글 흐름을 보니 일베에서 오셨나보네요. 친숙한 동네에서 노시는게 나을듯.

  • 76. ㅋㅌㅊㅍ
    '15.8.5 10:56 PM (125.133.xxx.51)

    참고로 주류 역사학계는 뉴라이트의 교학사 교과서 등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맹아론, 당쟁을 '붕당정치'로 재해석 등을 교과서에 실은 세력입니다 뭘좀 알고 떠드세요

    내 의견이랑 다르면 일베입니까?
    님이야말로 일베에요? 음모론이나 믿고 있게 ㅎㅎ

  • 77. ㅋㅌㅊㅍ
    '15.8.5 10:57 PM (125.133.xxx.51)

    노론=친일차=군사정권 이게 팩트라니 ㅋㅋㅋ
    크게 웃고 갑니다 역사의 역자도 모르는 분과 시간낭비했네요

    앞으로도 소설책 많이 읽으시고 힘내세요

  • 78. ...
    '15.8.5 10:59 PM (183.86.xxx.152)

    덧붙여.. 노론이 친일파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덕일씨만 지적한게 아니죠. 신영복 교수님도 담론이란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친일파가 해방이후 기득권 세력이 되신 것은 아실테고..

    저 식민사학파 일부가 지금은 뉴라이트와도 연계되어 국사 교과서 가지고 난리 부르시지요. 요즈음..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03309.html?_fr=mt2

  • 79. ...
    '15.8.5 11:01 PM (119.64.xxx.197)

    저도 주워들은 얘기로는..
    정치에서 사람을 쳐낼때는 명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근데 사도세자를 죽여야 하는데 명분이 명확치 않고, 기존사례도 없고, 역사로 남을 길이긴 한데, 사형에 대해 정확히 분류할만한 카테고리가 없어서.죽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수 없는 방법(오묘한 방법..기존에 없던 방법)으로 죽음으로 몰고갔다고 한거 같아요...

  • 80. ㅋㅌㅊㅍ
    '15.8.5 11:02 PM (125.133.xxx.51)

    아 신영복이 언제부터 역사학자였나요

    그리고 아까는 주류사학계가 식민사학이라면서
    지금은 식민사학이 뉴라이트와 연결되어있다고 하시네요 본인이 얘기하고도 본인이 까먹으셨나요?

    다시한번 말하지만 주류사학계는 뉴라이트 게열, 교학사 계열을 가열차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역사학계 성명 발표한거 기사 많이 나왔었는데 모르시는군요

  • 81. ...
    '15.8.5 11:05 PM (183.86.xxx.152)

    125.133 님의 역사와 제 역사의 개념이 다른 가봅니다.
    댁의 역사는 歷史 가 아니고 力史 인듯.. (힘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

    본인만 전문가실테지요.

  • 82. ㅋㅌㅊㅍ
    '15.8.5 11:07 PM (125.133.xxx.51)

    조선사 전공한 오항녕교수의 조선의 힘이라는 책 읽어보세요 비전공자가 쓴 소설은 그만 읽으시구요

  • 83. ㅋㅌㅊㅍ
    '15.8.5 11:12 PM (125.133.xxx.51)

    주류사학계가 식민사학이라는 님의 주장은 스스로 번복하셨으니 그만 인정하시고 가서 주무시길 바래요 아니면 일베나 하시던지요 일베랑 논리가 비슷하신것 같아서요

  • 84. 정조가
    '15.8.5 11:12 PM (175.120.xxx.27) - 삭제된댓글

    그 당시 신하들이랑 나눈 편지가 공개된적이 있죠? 이덕일씨 주장이 허구가 많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정조는 실제 노론측과 나쁘게 지내지 않았다네요 성격은 엄청 다혈질에 괴팍했다고 하고요

  • 85. 뒤늦게..
    '15.8.5 11:12 PM (59.6.xxx.224) - 삭제된댓글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를 살리기 위해 남편 사도세자를 내어준 게 아니라
    친정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내어주었습니다.22222

  • 86. ㅋㅌㅊㅍ
    '15.8.5 11:14 PM (125.133.xxx.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8&aid=0002244386&s...

    보수·진보 망라 7개 역사학회 공동성명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중단하라”


    주류학계는 뉴라이트를 비판해온 입장입니다. 근데 뭔 식민사학 타령이세요 뭔가 주장을 하려면 근거를 대시길 바랍니다. 하긴 소설책만 읽으시니 객관적 증거를 대실수가 없으시겠죠

  • 87. ㅋㅌㅊㅍ
    '15.8.5 11:15 PM (125.133.xxx.51)

    이덕x 씨가 주장한 정조 독살설도 학계에선 파기된거 아시죠? 비전공자의 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 좀 아시길 바랍니다. 근대사 전공자가 쓴 고대사 고려사 조선사 책들은 읽지마세요 물리학자가 미술책 쓴거와 같은 이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 88. ...
    '15.8.5 11:19 PM (183.86.xxx.152)

    125.133님은 남의 글을 제대로 읽지를 않고 쓰시는군요. 남의 글의 논리를 단순화해서 마구잡이로 비난하는군요. 뭘 알고나 떠들라고요? 당신이나 알고나 떠드세요. 제대로 읽고나 쓰던지.

    서울대 이병도 교수가 식민사학을 시작했고.. 그들이 주류였고.. 여전히 힘이 있다고 썼어요. 일부가 지금 뉴라이트와 연결되어 있고... 중간을 다 잘라먹고. 제멋대로 남의 주장을 아무렇게나 왜곡하고.. 역사 운운하기전에 국어공부부터 하세요.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2/04/20150204003649.html?OutUrl=daum
    여기 최근 신문기사에도 그렇게 나와요.

    뭘 얼마나 역사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대중들 관심이 많은 분야라 상당히 공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 89. .....
    '15.8.5 11:22 PM (39.7.xxx.201)

    사도세자에 대한 역사이야기
    이런 진지한 역사이야기 82에서 오랜만에 보니 좋군요

  • 90. 정조편지
    '15.8.5 11:23 PM (175.120.xxx.27) - 삭제된댓글

    편지를 나눈 신하가 노론의 대부인데 편지 내용이 의외로 사적인 신뢰가 있는 사이였다죠.
    이덕일씨 책의 내용과 상반된 내용으로 이 편지가 나오고 나서 이덕일씨 주장하는 근거가 많이 힘을 잃었어요
    저고 무릎을 치면서 읽은 책인데 다시 보니 소설도 그런 소설이ㅎㅎ

  • 91. ㅋㅌㅊㅍ
    '15.8.5 11:23 PM (125.133.xxx.51)

    주류사학은 뉴라이트를 거품물도록 비판하고 있는데 무슨 주류사학계가 뉴라이트와 연결되어있다는거에요? 주류의 뜻 모르세오? 참 대화가 안되는 분이네요 자기 얘기만 맞다고 주장하실거면 그냥 일기장에 쓰세요 뭐하러 커뮤니티에 글을 쓰십니까

  • 92. ㅋㅌㅊㅍ
    '15.8.5 11:26 PM (125.133.xxx.51)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 숫자가 수십에서 수백명입이다 살인 강간을 일삼던 사이코패스였고 정신분열증세도 있었어요. 유교국가에서 오죽하면 아들을 죽였을까 생각해보시면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이 그런 연유로 폐위되었는데 영조도 그런점이 걸렸을거고 그래서 직접 사형보다는 뒤주라는 간접 방법을 택한겁니다

  • 93. ㅋㅌㅊㅍ
    '15.8.5 11:35 PM (125.133.xxx.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6678573&s... 역사학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성명 발표


    한국사 7단체 "'교학사 구하기' 정부, 국정화? 퇴행"

  • 94. ㅋㅌㅊㅍ
    '15.8.5 11:36 PM (125.133.xxx.51)

    멀쩡한 사람들 친일파로 몰지마시고 소설 그만 쓰기길 바랍니다

  • 95. 방법
    '15.8.5 11:37 PM (211.206.xxx.224)

    사도세자가 가진 특이한 기록은
    결국 자신도 특이한 기록을 남기고 죽었다는것.

  • 96. ㅋㅌㅊㅍ
    '15.8.5 11:43 PM (125.133.xxx.51)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처음에 효장세자가 이미 훙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었다.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임금이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두 궁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 문안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을 위해 근심하였다.

    또한 한중록에는

    "당번내관 김한채라 하는 것을 먼저 상하오셔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사람의 머리 버힌 것을 보앗으니... "

    조선왕조실록 영조 91권, 34년(1758 무인 / 청 건륭(乾隆) 23년) 3월 6일(임진) 2번째기사

    세자는 관의합에 나가 앉아 좌의정, 우의정을 불러 하령하기를, "승지는 글로 쓰라. 근래에 기가 올라가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작년 가을의 사건이 있었는데, 이제 성상께서 하교하신처지에 삼가 감읍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 김한채등에게 해조로 하여금 휼전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라고 합니다.

  • 97. ..
    '15.8.5 11:59 PM (49.1.xxx.197)

    저장합니다.

  • 98. 댓글
    '15.8.6 12:00 AM (14.52.xxx.28)

    진행되는거 보니 정말 사학전공자들이 이덕x 책 좀 읽지말란 하소연이 실감나네요
    영정조 찬양하고 당파싸움 몰아세우 며 사도세자를 음모의 희생자로 몰고가기 마세요
    거기다 신영복은 왜 낍니까....
    정말 그놈의 음모는 참 시도때도 없어요

  • 99. 원글은 사실무근
    '15.8.6 12:12 AM (49.175.xxx.23) - 삭제된댓글

    조선을 비하하기위해 역사를 왜곡한 일본과 뉴라이트의 터무니없는 허구

    어릴 때부터 영특한 사도세자 ~정실의 자식이 아닌 영조가 왕이 된 것도 다
    노론의 뜻이었음~노론의 압박에 나이 엄청 많은 왕 영조는 사도세자의 정치개혁(탕평책도 사도세자의 머리에서 나옴)
    이런 사도세자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당 독재 노론에 맞서기 위한 정책이 나오니
    노론이 없는 사실로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것임

    혜경궁홍씨는 정조의 목숨을 위해서 침묵했던 것이고,,,

  • 100. ...
    '15.8.6 12:19 AM (223.62.xxx.3)

    재미있네요. 이덕일씨 주장도 논란이 많지만 대립각을 세웠던 오항녕 교수 주장도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https://namu.wiki/w/%EC%98%A4%ED%95%AD%EB%85%95
    어떤이는 오항녕 교수를 닥치고 서인 옹호자라고도 하지요. 이분의 기본 스탠스가 뭔지를 봐야 하는데 이분은 또 조선 성리학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치우쳐있지요. 김용옥 교수에게 영향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 101. ㅇㅇ
    '15.8.6 12:39 AM (115.143.xxx.23)

    한중록 끝까지 다 읽었어요.
    뒤로 갈수록 혜경궁 홍씨는 남편, 아들은 뒷전이었구나..
    오로지 친정만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사도세자의 사이코 같은 행위들을 과장되게 적은 것 같고
    그것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쓴 것 같고요..

    그리고 노론 친일파 군사정권의 흐름이 결코 말이 안되지 않는다고 봐요.
    인조반정 때 중전은 노론에서만 뽑아라... 라고 왕과 노론 신하들 사이에서
    협약을 맺었다고 들었어요.

  • 102. ㅋㅌㅊㅍ
    '15.8.6 12:47 AM (125.133.xxx.51)

    인조반정으로부터 조선멸망이 거의 250년정되 되는데 서인=친일파 구도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세도정치기 집권세력은 노력이 아니라 근기 세력이라 불리는 서울양반세력입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중에는 중간계층이라 불리는 중인들이 대거 포함되어있습니다.

  • 103. 뉴라이트 기원 여기에 있음
    '15.8.6 12:47 AM (49.175.xxx.23) - 삭제된댓글

    1990년 중반에 뉴라이트 창단하지만
    86~87년 일본 도요타자동차회사가
    서울대 교수에게 제안함

    https://www.youtube.com/watch?v=ZEryNm7XLzI

  • 104. ㅋㅌㅊㅍ
    '15.8.6 12:47 AM (125.133.xxx.51)

    노론=친일파 를 주장하시려면 근거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근거 없이 그냥 주장만 제가하니 댓글이 많아지네요

  • 105. ㅋㅌㅊㅍ
    '15.8.6 12:53 AM (125.133.xxx.51)

    서인=노론=친일파 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런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대동법을 반대했다는 점, 서인 정권이 대동법과 신분제 개혁을 주도했다는 점, 남인이 신분제 개혁 노비종모법 등에 반대했다는 점 등등이요.

    선입관을 갖고 과거를 바라보지마세요 서인=악, 남인=선 이라는 도식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역사를 반쪽자리로 보는 행위입니다.

  • 106. ㅋㅌㅊㅍ
    '15.8.6 12:55 AM (125.133.xxx.51)

    뉴라이트와 교학사 교과서에는 역사전공자들은 소수고 대부분 경제학자들이 주류입니다. 그 소수 역사전공자들은 이미 학계에서 왕따신세이고요.. 역사학계 주류가 뉴라이트와 교학사와 연결되어있다는 얘기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제발 어디가서 그런 무식한 소리좀 하지마세요

  • 107. ㅋㅌㅊㅍ
    '15.8.6 1:02 AM (125.133.xxx.51)

    중상주의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핵심인물인 박지원도 노론입니다. 노론=사회악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면 박지원은 뭐가 됩니까?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였지만 신분제 개혁에 깊이 공감하고 신분과 관계없이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서인에서 노론이 갈라져나온것은 사실이지만 18세기 탕평기에는 시파와 벽파로 정계가 양분되어 노론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모호해졌고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서울양반연합세력인 근기세력이 정권을 잡습니다. 어떻게 노론이 친일파로 몇백년뒤에 짠하고 다시 나온답니까. 어떤 주장을 할때는 제발 근거를 제시하셔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 108. ㅋㅌㅊㅍ
    '15.8.6 1:37 AM (125.133.xxx.51)

    댓글 안읽으시는구나

    조선 멸망할때는 노론이 아니라 근기세력이었다니까요 몇번을 얘기해야되나 도대체

  • 109. ..
    '15.8.6 1:40 AM (223.62.xxx.3)

    통일 신라가 망하고 지방 호족 세력인 왕건이 고려를 세웁니다. 지배세력이 바뀝니다. 고려말기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와 함꼐 조선을 건국합니다. 지배세력이 바뀝니다. 이것도 따지면 말이 많겠지만, 비교의 일례입니다. 친일파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 집안은 대대로 노론 명문가였습니다. 노론 전체가 친일파로 옮겨졌다 이런 의미가 아니고 그 지배층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해방이후 친일파가 청산되었나요? 독립운동하시던 분들이 정권잡았나요? 예를 들어 초대 육군 참모총장 이응준 - 일본 육사출신입니다. 이건 일례고 일제시대 고위 한인관리들이 다 해방후 그대로 고위관리가 됩니다. 군대도 일본육사출신들이 계속 참모총장하거나 합니다. 이들이 군사정권으로 이어지지요. 박정희부터가 일본 육사출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속 이어져 온다는 것입니다.

  • 110. ㅋㅌㅊㅍ
    '15.8.6 1:47 AM (125.133.xxx.51)

    참고로 위정척사파 대부분이 노론 세력이었습니다

    근거를 이렇게 많이 제시해도 본인 생각이 옳다고 믿는 분들과는 더이상 얘기 안하고 싶습니다 그냥 믿고 싶은대로 믿으시길 자래요

  • 111. ㅋㅌㅊㅍ
    '15.8.6 2:01 AM (125.133.xxx.51)

    자기 의견이랑 다르다고 일베하냐고 하는 분이 있는데 저라고 말이 좋게 나오겠습니까 ㅎㅎ

  • 112. .
    '15.8.6 2:22 AM (87.146.xxx.120)

    사도세자.

  • 113. 잠이 안와
    '15.8.6 2:58 AM (112.214.xxx.67)

    시작은 ㅋㅌ님이 하셨어요.
    무식이니 없어보인다느니, 님이 먼저
    비아냥거렸어요.
    본인부터 반성을..

  • 114. Rrrrrr
    '15.8.6 3:20 AM (1.247.xxx.247)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

    御製誌文
    어제 묘지문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思悼世子諱愃字允寬臨御十一年歲
    사도세자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11년
    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卽暎嬪所誕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也生而穎悟及其長也文理亦通其有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朝鮮庶幾之望嗚呼不學聖人反學太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甲慾敗縱敗之事嗚呼訓諭自省編心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噫自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

    古無道之君何限而於世子時若此者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는
    予所未聞其本生於豐豫不能攝心流 
    나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於狂也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終至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於萬古所無之事使白首之父作萬古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所無之事乎嗚呼所惜者其姿所歎者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述編嗚呼是誰之愆卽予不能敎導之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그를 옳게 가르칠 수
    致於爾何有嗚呼十三日之事豈予樂
    없어 이런 일까지 이르니 어찌 하리오. 슬프다 13일의 일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爲豈予樂爲爾若早歸豈有此諡講書
    했으리오. 즐거워서 했으리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 있으리.

    院多日相守者何爲 宗社也爲斯民
    세손 강서원에서 여러날 서로 지키는 것이 어찌 종사를 위하며 백성을 위한
    也思之此良及欲無聞逮至九日聞不
    것 아닐까. 이것이 잘되기를 바라고 소식 없기를 바랬는데 9일만에 숨길 수
    諱之報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는 어찌 칠십 애비가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했느냐
    至此不忍呼寫歲玄黓敦牂月夏五閏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노라. 해를 적으면 임오년이오 여름 윤오월하고
    而卽二十一日也乃復舊號特賜諡曰
    이십 일일이라. 이에 도로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내리니
    思悼嗚呼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
    사도라. 슬프다. 근 30년 아비로 은의를 베푼다는 것이 이것에 불과하구나.
    此矣此豈爲爾嗚呼辛丑血脈之 敎
    이것이 모두 너를 위한 것이구나. 슬프다 신축년 혈맥의 가르침에
    今只有世孫寔爲 宗國之意也七月
    다만 세손 식(정조)이 나라를 받들어라는 뜻이 있구나. 7월

    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嗚
    23일 양주 중랑포 유향(서쪽) 들판에 장사지냈다. 슬프다
    呼無他施惠賜嬪號曰惠嬪於斯盡矣
    다른 시혜없이 세자빈의 호를 혜로 내려주었다. 이것이 빈에게는 전부였다.
    此非詞臣代撰者故臥而呼寫表予三
    이것은 신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다. 누워 불러서 내뜻을 옮겼다.
    十年之義嗚呼思悼將此文而無憾于
    삼심년의 의리다. 슬프다 사도여. 이에 글지으니 나에게 원한 품지 말아라
    予矣壬戌入學癸亥行冠禮甲子行嘉
    임술년(1742) 입학하고 계해년(1743) 관례를 하고 갑자년(1744) 가례를 하는데
    禮娶豐山洪氏卽領議政鳳漢之女永
    풍산홍씨를 취했는데 영의정 봉한의 여식이었다.
    安尉柱元五代孫嬪誕二男二女一懿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다. 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하나는 의소세손이고
    昭世孫一則世孫嘉禮于淸風金氏卽
    하나는 현재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김씨 즉

    參判時默女府院君五代孫也長女淸
    참판 시묵의 딸과 했다. 부원군의 5대손이다. 장녀는 청연군주이고
    衍郡主次女淸璿郡主側室亦有三男
    차녀는 청선군주이다. 측실 역시 3남
    一女矣
    1녀다.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 日
    숭정기원후 135년(1762년) 임오 칠월 일

  • 115. Rrrrrr
    '15.8.6 3:32 AM (1.247.xxx.247)

    헛된 드라마와 역사소설, 상상력을 가미한 역사책들이 픽션을 논픽션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위에 적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를 위한 묘비문을 읽으면서 픽션을 팩션으로 미화하는 상상력 발휘는 상상력일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노론이. 친일파로 변신할수도 있었을테고 독립군으로 변신할수도 있었을테죠.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듯 노론이든 서인이든 벽파든 시파든 악인도 있도 선인도 있고 그들중 누구는 친일파가 되기도 하고 개화파가 되기도 하고 수구파가되기도하고 나라를 팔아먹기도 하고 전재산을 팔아 독립군을 양성하고는 굶어죽기도 했읍니다. 어떤 양반은 공산당이 되어 농민해방을 꿈꾸기도 했고 어떤 노비는 공산당이 되어 양반을 다 죽이기를 꿈꾸기도 했듯이 말입니다,

  • 116. ㅋㅌㅊㅍ?
    '15.8.6 3:34 AM (175.223.xxx.72)

    진짜 한번 물어보고 싶어서 그런데
    ㅋㅌㅊㅍ님 왜 이렇게 빈정거리세요?
    첫 댓글부터 시작해서....
    평소 사람 만날때도 그러세요?

  • 117. Rrrrrr
    '15.8.6 3:47 AM (1.247.xxx.247)

    슬프다 13일의 일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했으리오. 즐거워서 했으리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 있으리.


    영조가 어찌 이론 시호가 있으리오하며 애닮아하는 지은 시호 사도의 뜻은 애달프게 생각한다 라는 뜻으로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에게 원망하죠 왜 만고에 없을 죄를 지어 아비인 자기에게 만고에 없을 죄를 짓게만들었냐고 사도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도를 용서하고자했으나 용서한지 9일만에 만고에 없을 죄를 지은 사도를 어쩔수 없이 죽게만들도록 한 사도를 원망하고 있습

    니다. 30년간 키워온 아들에 대한 회한과 미련, 임금이 되도록 놔두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 아들을 결국 죽일수 밖에 없음을 절규하듯 말하죠.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영조의 변명이라고도 하지만, 분명히 영조 자신의 의지로 사도를 죽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였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게 어떻게 변명입니까? 변명하려면 남들을 탓하는 비문을 적었겠죠.

    어릴때 영특하고 재기넘치던 사도를 그리워 하는 아비의 마음과 만고에 없을 죄를 지은 아들과 아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 118. Rrrrrr
    '15.8.6 3:58 AM (1.247.xxx.247)

    방송사에서는 프로젝트가 크면 기획점검회의를 연다. 참가자들은 모두 약간씩 긴장한다.
    누구도 프로그램의 성패를 자신할 수 없고, 실패한다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순제작비 15억에 달하는 ‘3D입체복원 조선왕조의궤’ 회의 도중의 일이다.
    작가가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했던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배경을 설명해나갔다.


    “친모마저 당쟁에 휘말려 자식을 죽이자고 이야기하는...”


    사도세자가 죽게 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이유를 당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늘 있어왔던 설명방식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도 당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당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목숨과 맞바꿀 당파적 이익이 과연 존재했을까? 작가에게 질문했다.



    “잠깐! 그 친모는 자식을 죽이면 어떤 이익을 얻게 되죠?”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 영조에게 친자식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그녀는 노론, 소론 어느 편에 가담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역시 질문에도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 약간씩 난감해 하고 회의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니 원문을 다시 확인해보세요’라고 말하면서 회의는 정리되고 말았다.



    ‘당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250년을 줄기차게 이어온 이 생각은 진정 올바른 것일까?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다. 학자 중에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세자의 살인에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관대하다.
    사도세자의 살인은 살펴볼수록 심각하며 그 살인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이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 『한중록』-


    일부의 주장처럼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이 사건은 실록에서도 드러난다.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타이틀을 ‘『천유록(闡幽錄)』’에서 ‘『대천록(待闡錄)』’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였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때리다 말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죽였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영조는 ‘박살’이라고 했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 아닌가.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행위가 극에 달했음에도 모두 쉬쉬했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때려죽인 수준에서 벗어나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건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頃日往彼闕幾乎被殺 僅以身免]”


    이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을 직접 살해하고 친모의 내인을 죽인 자가 왕이 될 수는 없다.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제선왕(齊宣王)의 질문에,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일 뿐이었다.
    영조조차 이렇게 친제 묘지문에서 말한다.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噫 自古無道之君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세자의 이런 패악은 일찍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전라도 용안(익산)현감이던 이정(李瀞)은 그 소문을 상소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백성들은 수군거리고 희생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신하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그의 습관적 살인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세자는 죄책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고한 백성을 더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병에 의한 것일 뿐이며 기본적으로 세자의 자질은 훌륭했다고 설명한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다. 당시 신하들의 태도도 문제가 많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 (삭제된 승정원일기(영조 38년(1762) 5월 29일 기사)



    왜 세자의 살인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을까? 그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는 유독 너덜너덜하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현륭원지』를 읽은 사람이 어찌 사도세자가 흉악한 연쇄살인범임을 알겠는가?
    게다가 영남학자들은 만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까지 했으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을 효심 가득한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시중 서점에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효심 가득한 정조가 저지른 역사조작, 250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성공적인가?

    출처 : http://www.itkc.or.kr/itkc/post/PostServiceDetail.jsp?menuId=M0445&clonId=POS...

  • 119. Rrrrrr
    '15.8.6 4:16 AM (1.247.xxx.247)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를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진다.’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 ‘참혹한 슬픔’이라고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조선 왕실에서는 그런 고통스러운 슬픔을 스스로 실행한 임금이 있다.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 즉 ‘애달프게 생각한다.’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곤 손자 정조에게 ‘금등(金縢)’이라는 친필 비밀문서를 주어 세자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죄를 입었다고 자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기록에는 세자가 좁은 뒤주 속에 갇혀 허기와 기갈에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이 비정한 아버지가 어떤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세자의 비행을 신고한 생모 영빈 이씨의 불가피한 상황과 아버지의 냉혹한 처결 과정만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진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혜경궁 홍씨의 을 통해 전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세인들에게 권력의 비정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출중했던 어린 시절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1735년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영조는 82세까지 살았고 왕위에 52년 동안 머물렀던 조선 왕실의 기록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정비 정성황후와 계비 정순왕후가 있고,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후궁 문씨 등 4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는 후궁에게만 2남 12녀를 얻었는데, 그 중에 5녀는 요절했다.
    영조는 즉위 이전에 정빈 이씨에게서 첫 아들 효장세자를 얻었지만 1719년(숙종 45년) 2월 15일에 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고, 사도세자는 그로부터 9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늦은 나이에 후사를 보게 된 영조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늙은 아버지 영조의 기쁨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원자로 정호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초고속 후계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런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두 살 때 왕(王)이란 글자를 보고 영조를 가리켰으며 ‘세자(世子)’라는 글자를 보고 자기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이런 세자가 책봉례를 올릴 때 조현명은 영조를 배알하면서 ‘세자가 효종대왕을 닮았으니 종사의 끝없는 복’이라고 경하했다.
    1737년(영조 13년) 2월 14일에는 세자가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신료들이 앞 다투어 가져가려고 했다. 같은 해 윤 9월 22일에는 종이 12장에 두 글자씩 써서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여러 대신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불안한 세자의 자리
    영조는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퍼져있던 자신의 경종 독살설을 불식시키려는 듯 경종 비 선의왕후 어씨가 살았던 저승전에 세자의 거처를 정해주었다. 게다가 과거 경종의 나인이었던 한상궁과 이상궁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겼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세자는 평소 학문에 열중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상궁들과 전쟁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한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엄하게 추궁한 다음, 자식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는 이유로 두 상궁에게 혹형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어린 세자는 이런 영조의 처사에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꼈다.
    훗날 혜경궁 홍씨는 을 통하여 이런 극적인 상황이 세자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불안한 시기에 세자를 지켜준 사람은 영조의 편애를 받던 누나 화평옹주였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성격의 영조와 하나뿐인 남동생 사이에서 동분서주하면서 화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출산 도중 숨지고 영조의 사랑이 막내인 화완옹주에게 기울어지면서 세자에 대한 영조의 압박도 가중되었다.
    그렇듯 세자에 대한 영조의 질책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보위를 향한 궐내의 암투도 심화된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와 문성국 남매, 계비 정순왕후 등이 수시로 세자의 잘못을 고해바쳤다. 조정에서는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 중진과 외척인 김한구, 김귀주 등이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혼례, 혜경궁 홍씨와의 만남
    세자는 1743년(영조 19년) 1월 3월, 관례를 치른 다음, 11월 13일, 성균관 장의로 정9품직의 세마(洗馬)에 불과했던 홍봉한의 둘째 딸 홍씨와 혼인식을 치렀다. 그렇게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가인 풍산 조씨 가문은 노론의 대표적인 가문이었지만 장인 홍봉한은 그때까지 수차례 문과에서 떨어진 낙방거사에 불과했다. 왕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노론의 후원을 받았던 영조로서는 노론 가문과의 혼인이 불가피했지만 기왕이면 좀 무기력한 사돈을 맞아 쥐락펴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이 되자마자 문과에 급제하더니 도승지, 어영대장을 거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와 혼인한 뒤 성인이 된 15세 때 비로소 합방을 했고, 1750년, 첫 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 정(琔)을 낳았다. 영조는 늘그막에 얻은 손자를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세손은 1750년(영조 26년) 8월 27일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홍씨는 같은 해 9월 22일 둘째 아들 산(祘)을 낳음으로써 첫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영재
    일찍이 조현명이 꿰뚫어보았듯이 사도세자는 무재가 출중한 인물이었다. 훗날 아들 정조가 백발백중의 주몽이었음을 보아도 그의 핏속에는 태조 이성계의 야성과 웅혼이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남긴 에 따르면 세자는 평소 군복을 즐겨 입었으며, 홍역에 걸렸을 때도 세자빈에게 제갈량의 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의 무골을 감지한 영조는 1743년(영조 19년) 형조판서 이종성을 세자시강원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보필해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성이 차지 않은 듯 세자가 13세 때 어전으로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문제가 훌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를 속이려 하느냐? 네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구절이 있어 기가 매우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대화 속에서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1744년(영조 20) 11월 4일, 영조는 세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영조는 세자의 말이 진실하니 마음이 흡족하다고 말했지만 본심은 달랐다. 그는 세자가 일찍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예나 술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755년(영조 31년) 9월 10일에 이렇게 세자를 다그쳤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했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관(講官)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 장면은 마치 변호사가 된 아버지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법전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이런 부당한 처사에 생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영조와 세자는 수시로 부딪쳤고, 그런 갈등이 깊어지면서 부자간에 보이지 않는 금성철벽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학문과 더불어 무예에 심취하여 15세 무렵에는 효종대왕이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궁술과 승마에도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24세 때인 1759년(영조 35년)에 이라는 무예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의 와 선조 때 한교가 편찬한 를 저본으로 곤봉, 장창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 월도, 쌍검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무예서이다. 이 책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정조 때 간행된 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대리청정으로 더욱 깊어진 갈등
    영조는 세자가 15세 때인 1749년(영조 25년)에 대리청정을 명했다. 세자에게 정치적 경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민감한 사안은 자신이 판단해 결정할 것이었다. 그해 2월 16일,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기본지침을 제시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을 ‘그렇게 하라(依爲之)’는 세 글자로 미봉적으로 대답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헤아린 뒤에 결정하라.”
    그때부터 세자는 부왕의 폭언과 질책 속에서도 대리청정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세자는 여러 지역의 환곡을 조정하고, 현지의 형편에 따라 세금을 증감하는 등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 군역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을 괴롭히던 대전(代錢)과 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이런 선정에 접한 백성들은 몹시 기뻐했다. 그리하여 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자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소론의 정치적 입장에 기울었다고 여긴 집권 노론 일파에서는 세자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계기는 나주벽서사건의 처리 과정이었다. 1755년(영조 31) 2월, 나주 객사에 ‘간선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범인은 영조 초기에 숙청된 소론 윤취상의 아들 윤지였다.
    당시 대리청정에 임하고 있던 세자는 그 일로 사직을 청하는 소론의 지도자 이종성을 만류하고, 유배된 소론 인물을 극형에 처하거나 처벌을 확대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을 외면했다. 아울러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배향과 김창집의 석실서원 배향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탕평책을 추구하던 영조의 뜻이었다. 실제로 세자는 조정에서 노론이 소론을 공격할 때마다 부왕의 뜻을 물은 다음 처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자를 의심했고, 영조 역시 세자를 믿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고, 시시때때 양위선언을 통하여 그를 괴롭혔다. 봉건시대에 건강한 군주의 양위선언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자극적인 시도이다. 임금이 양위를 선언하면 당사자인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장차 불충으로 규정되어 어떤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임금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지만 당하는 세자나 신하들은 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리청정 이전에도 영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양위 선언을 했다. 어린 세자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결정의 철회를 애원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에도 세 차례나 양위를 선언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부왕의 변덕이 그렇게 재발할 때마다 세자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리청정 3년째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가 양위선언이 떨어지자 세자는 야반삼경에 뜰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2년 뒤인 1754년(영조 3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사간 신위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때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인 다음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며 다그치며 양위 선언을 하여 세자를 괴롭혔다.
    2년 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변덕에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신이 불초하고 불민한 사람이라며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더욱 학문에 몰두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겠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바쳤다. 한데 승정원을 통해 그 글을 읽은 영조는 또 다시 양위파동을 일으켰다. 보다 못한 홍봉한과 유척기 등의 중신들이 세자를 변호했을 정도였다.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홍봉한은 동궁이 평소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한다며 임금을 달랬다. 과연 이날 밤에도 세자는 눈물로 결정의 유보를 통촉하더니,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버렸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당시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쯤 되면 부자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 없었다. 지쳐버린 세자는 1757년 7월부터 11월까지 넉 달 동안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이후에도 4년여나 계속되었다.
    정신질환의 심화
    사서에 전하는 세자의 정신질환은 1755년(영조 3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18세 무렵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원래 내게 울화증이 있는데, 최근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미칠 듯이 답답합니다. 이런 증세를 어찌 의관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비방을 알고 있다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십시오.’
    그해 4월 28일 영조를 배알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다음과 같이 세자의 증세를 아뢨다.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답니다.”
    그 무렵 혜경궁 홍씨는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중록]에서 밝혔다. 그것은 물론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정신질환이 발작했고,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는 몹시 후회했다. 한데 그때마다 부왕이 엄히 책망하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리청정을 놓지 않았던 세자는 홍봉한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한데 이런 세자의 관심은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 노론 당료와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 왕실 세력의 무고로 인해 영조의 비위만 뒤틀리게 했다.
    그렇듯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는 광증에 걸린 천재들이 그렇듯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1760년경부터 그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761년에는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른다. 그쯤 되니 생모인 영빈 이씨나 아내 혜경궁 홍씨는 도저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의 전개
    세자의 극심한 병증은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 일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수시로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빌미로 소론과 남인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노쇠한 영조의 후사조차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바꾸려 획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적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1761년(영조 37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세자는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넉 달 후 영조가 그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잘못을 빌었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세자의 행동이 소론 잔존세력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노론에서는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나경언이라는 자를 내세워 영조에게 그간 떠돌던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고발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영조는 입시해 있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의 과실을 알게 했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비로소 세자가 그 동안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그를 죽임으로써 궁중은 물론 정계의 모든 불화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 이틀 뒤인 5월 24일,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 어찌 아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번민하던 영조는 며칠 뒤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운 영조는 새벽 나절 드디어 단안을 내리고 영의정과 우의정을 불렀다. 부리나케 입궐한 신료들은 세자가 뉘우치고 있다고 위로했지만 영조는 세자에게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바른 말을 고한 나경언은 역적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아울러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여러 당이 생겼으니 모두가 역적이라고 꾸짖었다.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가두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 뒤주의 빈 틈으로 죽과 물을 넣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았다. 결국 8일 뒤인 윤5월 21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4일에는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 여승 가선 등이 처형되었다.
    사도세자
    사도세자
    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영조는 일상적인 국무를 처리했다. 그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고 문을 지키는 군사를 위로했으며, 주강에 참석하고 인사를 처리했다.
    윤5월 21일, 이윽고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7월 23일에는 장례를 치르고, 시신은 양주군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에 안장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그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했다. 8월 1일에는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 실로 냉철한 뒤처리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갑신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아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훗날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효자였던 아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집권 노론 대신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이런 정조의 애타는 소망은 고종 때 이루어졌다.
    1899년(광무 3년), 고종황제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고, 1901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높였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비극의 실상
    사도세자의 비극을 몰고온 심리적 갈등은 기실 아버지 영조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소론의 거센 공세 속에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경종의 강력한 비호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위 내내 소론 일파로부터 경종 독살설의 당사자로 거론되었고,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한 무수리였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등극했지만 곧 급진적인 소론 일파인 준소가 남인과 함께 일으킨 이인좌의 난, 소위 무신란으로 인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불의의 반란은 다행이 소론 온건파인 완소의 도움으로 수습했지만, 준소의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2년 뒤인 경술년에 영조는 남인과 소론일파가 궁녀와 무당을 동원하여 창덕궁의 양화당과 세자궁, 빈궁의 침실 근처에 사람의 뼈가루와 저주물을 묻어놓은 매흉(埋兇)과 세자, 옹주에게 타 먹이는 화흉(和凶)을 당했다.
    그로 인해 영조는 맏아들인 효장세자를 잃었다고 믿게 되었고, 소론이나 남인에 대한 경계심과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소론 정파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붕괴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탕평의 기준은 무너지고 영조 재위 내내 노론 일파가 앙앙불락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영조는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과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에게 맡김으로써 이미지 쇄신을 노렸지만, 오히려 스스로 자식이 소론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재위 초기부터 정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아버지 영조에게 뿌리내린 깊은 트라우마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수시로 제기되는 부왕의 의심과 질책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출처정보
    이상각 시인, 작가.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대한민국항공회 항공역사서 저자 겸 항공역사서 편찬 자문위원. 오랫동안 동서고금의 고전을 재해석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교양서 집필에 몰두해 왔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항공역사서를 집필하였고,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과 같은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교양역사서를 다수 저술했다. 저서로 , , , , , , , , , , , 등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 120. ㅇㅇ
    '15.8.6 6:11 AM (223.62.xxx.119)

    토론하다보면 격해질 수 있는건데
    반론이나 비판이 아닌
    밥맛 떨어지네 말투가 재수없네
    이런 지극히 개인 감상같은 인신공격이야말로 좋은 글에 찬물을 끼얹네요
    좋은 글과 댓글 잘 읽었습니다.

  • 121. ㅋㅊㅍㅎ님.
    '15.8.6 6:51 AM (208.54.xxx.186)

    전공자이신거 같은데 덕분에 깊이있고 균형있는 사실 잘 접했습니다. 전공자의 힘이 느껴지는 훌륭한 댓글이었습니다.
    제 3자로서 님의 글이 특히 감정적 이라고는 못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 122. 사도세자 얘기하니
    '15.8.6 6:58 AM (223.62.xxx.109)

    뜬금없이 모든게 이덕일 때문이라니..
    기승전 이덕일인가?
    간만에 이덕일 책 좀 사서 봐야겠군요~

  • 123. 뜬금
    '15.8.6 9:02 AM (211.253.xxx.73)

    몇년 전에 정조와 심환지의 비밀 편지가 공개되서 큰 반향이 있었죠. 관심이 있었던차라 기사를 꼼꼼히 읽었었는데...정조를 독살했다고 지목되었던 심환지와 노론이 실은 정조 시대 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아주 다르다구요.

  • 124. ...
    '15.8.6 9:17 AM (103.10.xxx.90)

    노론 세력이 친일파 가 되었다 .. 라기 보다

    당시의 세력집단 이었던 노론세력의 상당수가, 또는 대다수가 친일파가 되었다
    이건 사실 인것 같음
    결과론적으로 보면 친일파의 대다수는 노론세력 이라는 결론

  • 125. 에잇!
    '15.8.6 9:40 AM (218.234.xxx.133)

    초반 댓글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기분 잡치게 하네!

  • 126. ...
    '15.8.6 9:49 AM (106.245.xxx.176)

    정말 몇몇 기분나쁜 댓글때문에 짜증나요......

  • 127. 샤라라
    '15.8.6 9:50 AM (1.254.xxx.88)

    ㅋㅌㅊㅍ'15.8.6 2:01 AM (125.133.xxx.51

    이사람 정말 친일파 같네요....와 무섭다.

    노론이 그대로 친일파에 지금의 한나라당, 세누리가 되어있다.
    이완용이 노론파 였군...아하.

    뉴라이트 또한 이것에 준한다....도요타자동차가 뉴라이트 만들고 한국 교학사 교과서까지 개입...@@

  • 128. 정조는
    '15.8.6 10:09 AM (14.52.xxx.28)

    효심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미치광이의 아들이어선 안되니 저리 포장을 한거죠
    영정조를 무슨 성군의 태평성대로 아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그렇게 해석하가엔 무리도 많아요
    댓글들 읽다보니 사극을 만들때도 너무 팩트에서 벗어나는 설정은 상당히 위험하단 생걱이 드네요

  • 129. .....
    '15.8.6 10:17 AM (203.255.xxx.108)

    역사드라마와 역사소설의 폐해를 보는 듯...
    픽션과 논픽션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듯...

  • 130. ...
    '15.8.6 10:22 AM (61.74.xxx.243)

    사도세자 비극이네요.

  • 131. 소중한인생
    '15.8.6 10:34 AM (121.88.xxx.19)

    재밌어요.사도세자 이야기

  • 132. 지금
    '15.8.6 10:53 AM (183.100.xxx.240)

    http://tvcast.naver.com/v/480254
    이 이야기로 드라마를 하려나봐요.

  • 133. ..
    '15.8.6 11:07 AM (121.124.xxx.7) - 삭제된댓글

    노론...친일파
    오늘 또하나 배우네요

  • 134. ..
    '15.8.6 11:19 AM (222.97.xxx.187)

    저두 배우고 갑니다.

  • 135. 아쉽습니다.
    '15.8.6 12:30 PM (1.226.xxx.250)

    ㅋㅌㅊㅍ님.. 좀더 부드러우셨으면...
    느껴지는 님의 학식은 존중합니다.
    다만 좀더 부드럽게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누구의 잘잘못은 모르겠고 간만에 올라오신 고수님께 나올 덧글이 더 많을텐데 이리 소모적인 논쟁으로 정지되는거 같아 아쉬워서요.

    이곳에 여러가지로 메여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있는 분들이 많으신가봐요.
    어쨌든 리플 주신님들 감사드려요.
    주장이 서로 어긋나지만 그를 실마리로 우리가 찾아 판단해야죠. 픽션과 넌픽션 제대로 구분해가면서요.

  • 136. 아 미치겠다
    '15.8.6 2:12 PM (203.142.xxx.145)

    사료를 써줘도 안 읽는 사람은 안읽으니 저도 음모론 하나 쓰겠습니다.

    1. 노론 음모론의 출발
    노론들한테 밀려나 조선조에 할 일 없어진 남인 소론 사람들이 '노론이 조선말기까지 정권을 장악하며 말아먹었다'고 여기저기서 쓴다. 이해한다.

    2. 노론 음모론의 리모델링
    근현대사에서 영남지방의 보수우파,노론이 진보 근대화를 반대했다고 주장.

    친일파-광복후도 집권세력-산업화의 과실을 따먹음.

    영남노론 이라는 황당한 소리도 등장.

    3.
    기초상식: 노론은 경기도/충청도 그룹임.
    영남지방은 남인,출세길 막힌 이황의 제자들이 벼슬 못하니 고향에 남아 유교문화를 지역화했다고 볼 수도.
    경상도 보수를 까고싶어 기득권-경상도-노론벽파....이야기하니까 사학과 3학년만 되어도 미칠거 같음.(2학년까지는 조선시대 안배우는 경우가 많아서.고대사부터 배우니까.ㅎㅎㅎ)

    4.솔직히 노론음모론/노론만악론=남인 진보개혁론 대중화의 출발은 이인화/이문열임
    남인의 후예라 자인하는 경상도 유림(자칭 양반가)들 사이에는 계속 내려오던 이야기를 대놓고 활자화함.
    노론은 기득권-남인은 가난하지만 개혁적/똑똑하기 까지 함.

    5.노론가지고 친일파라 그러는데 일본에 넘겨준 친일파는 명성황후라 칭송하는 민씨 친정,안동김씨 기타등등임.노론핵심에게 휘둘리기 싫어서 마이너리티를 며느리 삼았는데 비주류가 들어오더니 더 설치고 나섬.(최익현 매천야록 읽어보면 민씨 욕을 엄청나게 해놓음)

    노론중에 식민지시기 잘먹고 잘 산 사람 많음. 그러나 의병운동/해외 독립운동한 사람중에도 노론 핵심세력이 많음.왜냐? 돈없이 사람모아 싸울 수 없음.식민초기 친일을 하건 항일을 하건 노론 지식인들을 끼울 수 밖에 없음. 한쪽만 지적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워버리니 욕을 먹는 것임.

    6.이것이 포인트임.
    식민지기 친일파를 너무 단순하게 보면 곤란함.
    식민지 친일파는 부자지주만 나오는게 아니라 박정희같은 빈농의 아들도 나옴.
    박정희 그룹의 마인드는 '조선양반=노론=지주부패세력''박정희그룹=남인=빈농의 아들=근대화개혁세력'
    그래서 지가 하는 일이 '조국근대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음.

    그런데 이 맥락,익숙하지 않음?
    이인화 이문열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고 경상도에서 계속 내려오는 지역전설이며 자긍심의 본산임....이인화가 박정희 좋아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쓴게 우연이 아님.
    노론 망국론의 출발은 서울과 충청도 기득권이 나라를 망쳐서 우리 경상도가 집권해야됨....에서 출발한 것임.박정희 예찬론자들이.

    7.서울대라고 한꺼번에 묶는데 뉴라이트 출발과 관련된 이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안병직과 이영훈 교수임.
    서울대 국사과랑 엄청 사이 나쁘고 이병도한테 배우거나 학위받거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임.
    안병직 이영훈의 제자들 중에 사학과에서 시간강의라도 받은 사람있는가 찾아보기 바람...역사학회쪽에서 발표도 안함(학계 전체랑 싸워야해서)

    8.이@일씨 국회의원 내세워서 거액 연구비 내놓으라고 압력넣었는데 못받은 후에 뿔나서 갑자기 고대사한다고 난리치고,'친일파'들이라서 자기 연구비 못받았다고 징징거리다가 책쓰고 있음.

    이인화/이문열 주장을 가져다 부풀려 (박정희 이야기는 쏙 빼고)좋은 문장력으로 책 써서 많이 파는 것까지는 좋은데,돈을 벌고싶으면 그냥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큰돈 욕심내지 말고 그냥 남들받는 정도의 연구비만 신청하셔서 연구를 하심이 좋을 듯.(연구소 세울 돈까지 나라에 요구하지말고)

  • 137. 푸헤헤
    '15.8.6 2:31 PM (99.224.xxx.22)

    사도세자 관련 댓글들
    역사 이야기
    찬찬히 보고싶어서 저장할래요

  • 138. 난도 저장
    '15.8.6 2:42 PM (211.108.xxx.86)

    잼나는 얘기 딸아이 보여줄려고 저장합니다...

  • 139. 집단지성...
    '15.8.6 3:02 PM (39.115.xxx.183)

    사도세자 관련 얘기들 감사해요. 저장합니다.

  • 140. 우와
    '15.8.6 4:12 PM (119.206.xxx.188) - 삭제된댓글

    대단하시네요. 82님들..

  • 141. 호호호
    '15.8.6 4:55 PM (211.114.xxx.146)

    재미짐^^ 사도세자 무서움!

  • 142.
    '15.8.6 5:10 PM (223.62.xxx.86)

    우와ᆢ 감탄!

  • 143. 딜라이라
    '15.8.6 9:38 PM (218.235.xxx.161)

    사도세자와 노론..친일파까지 배운게 많아요.

  • 144. 와~
    '15.8.7 10:38 AM (223.62.xxx.11)

    정말 어떤 사극 보다 재밌게 읽었어요!!!!!!!!!!!!!!!!!!!!!!

  • 145. ...
    '15.8.7 5:23 PM (182.229.xxx.114)

    사도세자 너무 나갔네요. 그런데, 아들은 어찌 그렇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는지...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470559 실제상황 기막힌 이야기 7 2015/08/06 6,354
470558 집에 벌레가 갑자기 생겼는데 한번 봐주세요 ㅠ 10 벌레출몰 2015/08/06 4,643
470557 요새 왜 이래요? 벌레들이 몰려왔나요? 6 참내 2015/08/06 1,819
470556 해시브라운이랑 고로케랑 비슷한건가요? 4 .. 2015/08/06 1,264
470555 푹푹찌는 날씨.. 요즘 뭐 만들어서 드시나요?? 밥상 메뉴&a.. 2 12345 2015/08/06 1,207
470554 송파구에 방산 중.고등학교 학군은 어떤지요..? 4 궁금이 2015/08/06 3,537
470553 3인용쇼파 궁금 2015/08/06 932
470552 홍대건축비전 8 고삼맘 2015/08/06 2,673
470551 아이폰관련 조언좀구할게요~ 10 제비꽃 2015/08/06 1,777
470550 좋은 컵(도기그릇)은 원래 이렇다는데.. 11 2015/08/06 3,005
470549 맨체스터 대학 10 영국 2015/08/06 1,564
470548 세월호478일) 아홉분외 미수습자님들이 가족과 꼭 만나시기를! 9 bluebe.. 2015/08/06 531
470547 이 더위에.. 3 파란 2015/08/06 945
470546 한식대첩 심사위원에 최쉪은 왜 있는거에요? 10 근데 2015/08/06 5,455
470545 하고싶은일하며 사는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8 2015/08/06 2,090
470544 장마 끝나니 더 더워졌지만 살만하네요 2 ㅇㅇㅇ 2015/08/06 1,597
470543 이래서 보고 자라는게 무서운건가봐요 43 아들 2015/08/06 24,155
470542 닭이 읽는 글 써주는 사람은 그 맛이 아주 짜릿하겠어요..ㅎ 2 ㅇㅇ 2015/08/06 1,482
470541 수도권에서 아웃백 맛있는 지점 있나요?? 4 ... 2015/08/06 1,777
470540 한국말대신 영어로 나오는 네비게이션이 한국에도 있나요? 3 nomad 2015/08/06 3,199
470539 동요 어플 괜찮은 추천해드립니다^^ 오리 2015/08/06 427
470538 KBS2 보세요 ㅎㅎㅎ 4 우왕~ 2015/08/06 2,336
470537 서래마을에 요리 배우는 곳 있을까요?? 3 처음본순간 2015/08/06 1,112
470536 전 해외여행이 안 맞나봅니다. 78 새벽2 2015/08/06 22,113
470535 평수 줄여 이사가신분들 만족하시나요? 4 집한칸마련하.. 2015/08/06 2,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