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남한에서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월북하심ㅠㅠ
최근 개봉된 영화 '암살'은 허구를 바탕으로 한 작품임에도 실존인물 2명의 존재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이 그들입니다. 특히 약산은 일제가 백범보다 많은 현상금을 걸 정도로 독립운동사에서 비중있는 인물이었음에도 해방 이후 행적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사례입니다. 박일훈 기자가 작년에 쓴 기사가 약산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이를 다시 게재 합니다. -편집자 말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액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인물. 그는 바로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약산(若山) 김원봉(1898년 9월 28일~1958년 11월) 선생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받고 있음에도,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기자는 약산 김원봉이 나고 자랐던 경상남도 밀양을 직접 찾아가 그의 삶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기로 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받고 있음에도,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기자는 약산 김원봉이 나고 자랐던 경상남도 밀양을 직접 찾아가 그의 삶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중략)
해방된 조국에서 겪은 수모, 월북 그리고 숙청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47년 2월에 김원봉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수모를 당한다.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하게 고문했던 노덕술. 그는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면서 뺨을 때리며 모욕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며 한탄했다.
그러다 같은 해 7월 19일에는 김원봉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움직이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여운형을 따르던 김원봉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좌우합작운동에 헌신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월북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