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런 글은 시간낭비라 생각하여 애초에는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각자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담아 얼마든지 비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저로서 누구의 비평을 다시 비판한다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허지웅의 이번 비평은 비평의 한계를 넘어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가미된 다분히 의도성이 있는 악의적 비평이라는 생각과 허지웅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노이즈 마켓팅의 느낌이 들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제가 허지웅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게 된 결정적 동기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 허지웅의 해명(네티즌들의 반박에 대한 허지웅의 재반박) 때문입니다.
이제 허지웅이 <국제시장>에 대해 어떻게 비평했으며, 자신의 말에 대해 비판하는 글에 대해 또 어떻게 공격했는지 알아보고, 이런 허지웅의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허지웅의 <국제시장> 비평 - 네티즌들의 반발 - 허지웅의 해명과 비난
허지웅은 지난 12월 25일 '진중권 허지웅 정유민의 2014 욕 나오는 사건·사고 총정리'라는 제목의 '한겨레신문' 좌담 자리에서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머리를 잘 썼어. 어른 세대가 공동의 반성이 없는 게 영화 '명량' 수준까지만 해도 괜찮아요. 근데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
그리고 12월 26일 다시 SNS에서 아래의 글을 올립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문제가 다뤄져야 할 시점에 '국제시장'의 등장은 반동으로 보인다", "우리가 얼마나 괴물 같은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지. 일종의 선동영화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허지웅의 발언에 대해 네티즌들은 강력 반발하고, TV조선도 허지웅의 비평기사를 다루고 비판하게 되죠.
12월 27일, 허지웅은 네티즌들의 비판과 TV 조선의 방송에 대해 재반박을 하면서 트위터에 자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명합니다.
"남조선 인민공화국 국영 방송 aka 티비조선이 오늘은 또 전파낭비의 어느 새 지평을 열었을까요. 아 오늘은 제가 하지도 않은 말에 제 사진을 붙였군요. 저게 티비조선에 해당되는 말이긴 하죠"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문제가 다뤄져야 할 시점이란 세월호 사고 이후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
"국제시장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이야기했고, 그 흥행 추이가 우리 사회 현주소를 말해줄 거라 했다", "저 구절이 어떻게 '토 나오는 영화'라는 말이 되느냐? 읽을 줄 알면 앞뒤를 봐라. 당신 같은 사람들의 정신승리가 토 나온다는 것"
“불행한 승냥이들의 이론, 하루종일 넷을 떠돌며 타인이 자신들보다 위선적이라 외친다. 좌절하고 무능한 자신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타인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에 급기야 난독과 행패로 중무장한 광인이 된다. 기도합시다.”
“쓰인 것과 달리 지 마음대로 읽고 나한테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우기면 뭐 합니까? 티비조선이나 시청자나 쿵짝이 잘 맞는군요.”
2.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토 나온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허지웅은 자신이 <토 나온다>고 한 것은 영화 <국제시장>이 아니라 “국제시장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이야기한 것이고 그 흥행 추이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것”이라면서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를 소비하는 현 사회에 토가 나온다고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 허지웅의 말은 솔직하지도 못하고 당당하지 못한 야비한 변명입니다. 그냥 영화 <국제시장>을 보니 <토가 나오더라>고 계속 주장했다면 야비하거나 비겁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지웅의 비평에 네티즌들이 <국제시장>을 만든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 영화를 본 관객들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난이 거세지자 화살을 영화에서 현 세태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가 나온다>고 수식한 주체는 뒤에 나오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에 영화 <국제시장>에 토가 나온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허지웅이 처음 한 말 그대로를 옮겨 보죠.
"머리를 잘 썼어. 어른 세대가 공동의 반성이 없는 게 영화 '명량' 수준까지만 해도 괜찮아요. 근데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
허지웅이 머리를 잘 썼다고 비아냥 댄 대상은 영화 <국제시장>이며, 제작사, 감독, 배우일 것이고, ‘공동의 반성이 없는 어른 세대‘는 영화의 주인공 덕수와 덕수의 세대인 소위 산업화 세대일 것입니다.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것은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는 덕수 세대와 그 덕수 세대에 공감하는 국민, 나아가 그런 정신 승리를 하게 만든 영화 <국제시장>을 포괄하는 것이죠. 즉, 영화 <국제시장>은 정신승리하는 이상한 사회로 만들었고, 결국 이런 사회에 대해 허지웅은 토가 나온다고 한 것이죠. 허지웅 본인은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토가 나온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위의 허지웅 비평을 보고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 될까요?
<국제시장>을 보고 감동하는 사회가 ‘토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관객들을 감동하게 만든 영화 <국제시장>은 도대체 허지웅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토가 나오는 것’ 이상으로 비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허지웅이 영화 <국제시장>을 일반 관객들이 감동한 이유나 시각과 달리 영화 <국제시장>에서 어떤 다른 함의를 발견했거나 일반 관객이 놓친 부분을 지적했다면 모를까 본인 스스로도 영화 <국제시장>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비판하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토가 나온다’고 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은 궤변이죠.
3. 세월호 참사가 덕수세대가 책임질 문제인가
허지웅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문제가 다뤄져야 할 시점’이라는 해명에서는 ‘세월호 이후 시점’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세월호 참사가 덕수세대의 책임이고 이를 해결하고 책임져야 할 세대가 덕수세대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세대가 누구일까요? 지금 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는 세대가 누구입니까? 70을 훌쩍 넘긴 덕수 세대입니까? 물론 덕수세대에는 압축성장의 부작용으로 비리와 인권유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런 영향이 현재까지 미친 것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산업화세대의 유산인 것처럼 자신들이 현재 지배하는 사회의 책임을 과거 세대에 책임 지우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요?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세대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소위 386, 486세대, 그리고 허지웅과 같이 70년대, 80년대 초에 태어나 경제적, 물질적으로 별로 어려움 없이 성장한 30대들이죠. 이들이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을 장악하다시피하고 있죠. 이들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책임져야 할 세대이고, <국제영화>의 덕수세대가 일군 나라를 보다 정상적 사회로 만들 책임이 있는 것이고, 오늘의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극을 일어나게 한 것에 대해 덕수세대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나 오늘의 문제점에 대한 책임을 덕수세대에 돌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요?
4. <국제시장>의 등장은 반동이고 선동영화라고?
우리 현대사에서 덕수세대의 산업화 시대가 반동인가요? 허지웅이 ‘반동’이라고 표현한 것은 ‘반역사적, 역사적 퇴행’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이 허지웅의 눈에는 반동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시대의 독재와 인권유린을 부각하면 부분적으로 반동적 현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시대가 저것이 전부는 아니었고, 저런 방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에 동원되지 않았다면 그 시대에 세계 유례없는 압축성장이 가능했을지는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산업화) 시대를 우리가 반동의 시대로 규정할 때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의 일상사 모두는 정치와 무관한 것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어떤 영화라도 그 정치적 함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감독이나 제작자의 정치적 의도를 읽어낼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어떤 영화라도 선동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동영화라고 부를 때는 영화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감독의 정치적 의도가 엿보일 경우입니다.
그런데 <국제시장>이 선동영화라구요? <국제시장>이 선동영화라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모든 영화들은 선동영화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변호인>은 <국제시장>보다 훨씬 선동적 영화이며, <26년>, <화려한 휴가>, <다이빙벨>의 선동성에 비해 <국제시장>은 안드로메다 보다 멀게 떨어져 있는 수준으로 정치성이 낮습니다.
저는 허지웅이 <국제시장>에서 정치적 함의를 찾아내는 그 상상력이 용(?)하고, 선동영화라고 단정하는 그 용기가 가상(?)할 뿐입니다.
5. 허지웅을 비판한 네티즌은 위선적이고 무능하며 난독과 행패로 무장한 광인이라고?
저는 사실 허지웅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JTBC 예능프로그램에 자주 출몰하여 예능인인줄 알았더니만 그 동안 영화 평론을 해 왔던 인물이더군요.
솔직히 저는 예술계, 특히 패션계나 영화평론계의 언어들의 난해성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저들이 자신들이 구사하는 단어들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탑재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글은 왜 그렇게 미사여구로 점철되어 있고 난해한지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수학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의 글을 보노라면 납득하기 힘들 뿐아니라 먼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았습니다. 법조인들의 언어, 판결문들이 어렵다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쓰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왜 그렇게 난해한 단어와 문장들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의사들이 자신들만의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효율성이라도 있으니 이해하지만 이들은 왜 일반인들이 자주 접하지 못하는 철학적 용어나 전문적 용어를 평론에 많이 사용하는지 저로서는 납득하지 못하겠더군요.
허지웅이 네티즌들에 대해 위선적이라 말하기 전에 자신의 평론에 대해 한번 돌아보고, 또 과거 자신이 10주간이나 남의 글을 도용하여 상업지에 실은 것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을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허지웅이 영화평론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그의 평론이 그 업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허지웅의 도발은 다분히 일종의 노이즈 마켓팅의 일환이라는 의심을 하게 만듭니다. 연예계, 특히 일본 연예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치부를 일부러 대중에게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허지웅도 <국제시장>을 악의적으로 비평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종편 예능프로그램에서 밥줄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허지웅은 자신의 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 네티즌에 대고 오히려 난독증 환자라고 몰아세우고, 변명과 궤변으로 일관하는 행패를 부리면서 자신이 광인 되고 있지 않는지 돌아 보길 바랍니다.
ps
어제 우연히 JTBC 썰전에서 진중권과 허지웅이 나와 썰을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부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았는데 그 중에 허지웅과 진중권이 우리나라 교육(부모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비판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진중권이 독일에서 유학 중에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수업에서 “둥글게 둥글게”라는 노래와 함께 5,4,3,2씩 숫자를 불러가며 친구들간 짝짓기 게임을 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4명이 남은 상태에서 셋(3)을 외치자 어린이들 4명이 모두 함께 모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3명이 모이지 않고 4명 모두 함께 있느냐고 했더니 어떻게 친구 1명을 떨구고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더랍니다. 이 때 진중권이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고 말하더군요. 똑같은 한국인이지만 독일사회에서 자란 어린이들은 저렇게 친구들을 배려해 1명을 떨궈내지 못하고 4명이 함께 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탄하더군요.
저는 솔직히 저 소리를 듣고 좀 웃었습니다. 일단 진중권의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다고 느껴지더군요. 마지막에 남은 4명은 그 동안의 게임에서 수없이 많은 친구들을 떨구면서(탈락시키면서) 생존했을 것입니다. 이 남은 마지막 생존자 4명은 그 동안 게임에서는 친구들을 무지막지하게 내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인간성이 회복되어 친구들을 챙겼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더 웃긴 것은 “둥글게 둥글게”라는 것은 말 그대로 게임이며 놀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게임과 놀이에는 협동과 배려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재미를 우선하는 것이 있을 수 있죠. ‘둥글게 둥글게“를 그냥 게임과 놀이로서 즐기면 될 것을 거기에서 어떤 정치사회경제적 함의를 억지로 도출하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저 ‘둥글게 둥글게’라는 게임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떤 모임에서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진중권의 말에 따라 저 놀이가 반사회적이니까 금지해야 할까요? 둥글게 둥글게’ 게임에서 친구를 배려해 제대로 놀지 못한 독일 사회 어린이들은 장차 커서 한국 사회의 사람들에 비해 덜 이기적이고 덜 반사회적 인간이 된 것일까요? 아직도 유럽보다는 한국 사회가 정이 있다는 것은 유교적 관념이 남은 덕수세대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둥글게 둥글게’는 반사회적 게임이라 부정적 생각을 가진 진중권이 정부의 ‘게임중독법’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반발했는지 의아합니다. (물론 저도 정부의 게임중독법은 무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중권이 ‘둥글게 둥글게’ 게임도 부정적이라면 청소년들이 죽고 죽이는 살벌한 내용들이 태반인 게임을 오래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당연히 찬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중권이라면 그 동안 일관성이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요즈음은 왜 그 일관성을 상실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게임을 게임으로, 놀이를 놀이로, 재미를 재미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진중권이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굳이 정치적 함의를 찾아 정치적 굴레를 덧 씌울려는 하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군요.
진중권의 ‘둥글게 둥글게’이야기가 끝나자 허지웅이 청소부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부모들의 교육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더군요.
청소부를 보면서 자식들에게 저런 청소부가 되지 않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와 저런 불쌍한 청소부들을 동정하고 제대로 대접받도록 앞으로 힘 쓸 수 있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의 사례를 들면서 둘 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허지웅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정확한 지적입니다만, 저는 허지웅의 말에 진정성이 묻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허지웅에게는 청소부도, 어린이도, 부모들도 모두 자신의 존재감을 위한 장치들일 뿐이 아닐까”, “대접받지 못하는 불쌍한 청소부는 항상 존재해야 하며 그들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 비뚤어진 교육관을 가진 부모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비판할 거리가 많아지고 내가 비판할 소재나 대상이 많아질수록 내가 썰로 밥벌이 하기 쉽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허지웅에 대한 제 자신의 편견과 의도적 주관이 많이 개입한 결과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여러분들이 관심법이라고 비판해도 달게 감수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