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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조금 짧은 소설을 또 한번 써보았습니다.

고띠에르 조회수 : 1,405
작성일 : 2014-12-28 01:41:42

제목 : 라니아케아 크리스탈

글쓴이 : 고띠에르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즈음 아버지의 별명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심성이 착한 분이셨다. 어머니에게도 우리에게도 정말 자상하신 분이었다.

요즘은 워낙 착한 아버지가 많은 시대라 착한 가장이라는 것이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내가 어렸을 땐 마누라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줘야 된다는 농담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시절이었고 동네에서 남편에게 매맞고 사는 여자들을 보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나도 연탄 집게에 맞는 아줌마도 보았고 심하게는 다듬이 방망이로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아줌마도 본 적이 있다.길거리에서 자기 남편에게 맞고 있는 여자를 보아도 그러지 말라고 뜯어 말리기는 해도 경찰서에 신고한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그 당시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그렇게 학대하고 고생시키는 게 당연하게 인정받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아버지만은 달랐다.

그런 아버지가 변하기 시작한 건 아버지 나이가 40줄에 접어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부터였다. 요즘은 사무직이 대세고 육체 노동같은 건 외국인 노동자들이 담당하는 추세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노동으로 집안을 꾸려가는 가장들이 많았고 중동에 건설노동 가는 아저씨들을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힘든 육체 노동으로 돈을 버셨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노동이 점점 힘에 부치고 고생스러워서 아버지의 성정이 변하기 시작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가 변하면서 밝았던 집안 분위기에도 점점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날도 늘어났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날이면 나는 잽싸게 버스정류장에 미리 나가 퇴근하시던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집에 와 있다고 조심하라고 당부하고는 했었다. 아버지가 집에 온 날은 온 집안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했고 그렇게 변한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 나에게 자상하게 대해주던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기억해내며 현재의 아버지를 용서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나에게 많이 미안하다 말씀하시면서 잘 간직하고 있으라며 수정을 하나 선물해주셨다. 지금은 장신구로 그런 수정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그 당시는 수정을 장신구처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땐 어렸을 때라 그게 굉장히 비싼 것인줄 알고 소중히 간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저 그런 싸구려 수정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근근히 노동으로 버티며 가족들을 부양해갔지만 집에도 드문드문 들어오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고 그런 나날이 계속되면서 가족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는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았다. 동생과 나는 그런 아버지를 지킬과 하이드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온몸으로 감당해내며 집안을 꾸려나가던 어머니의 스트레스와 히스테리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날이 늘어나면서 어느 해는 집에 들어오시는 날보다 안 들어오시는 날들이 더 많았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을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도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일하는 고충 보다는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집으로 끌고 와야 하는 고충이 더 컸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서윤이 아빠 어디에 누워 있더라 알려주면 나는 어머니와 같이 나가 술 취한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고생스럽기만 했다. 자연 아버지의 술주정을 받는 내 목소리도 점점 더 커져만갔다. 도대체 어렸을 적 그 천사같던 아버지가 왜 이렇게 변했는 지 도통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어느 겨울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한겨울 어느 길거리 가로수 옆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영면한 얼굴에서 어렸을 적 우리에게 천사와 같던 아버지의 표정이 느껴지자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아빠! 도대체 왜 그랬어? 왜?'

그렇게 아버지를 가슴 한켠에 묻었지만 아버지의 남은 흔적들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 가게가 자리잡고 있던 숭인동으로 향했다. 가게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온갖 잡동사니들을 치워야 주인이 월세 계약을 해지해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둘이서 가게를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남자 하나 없이 여자 둘이 무거운 물건들을 옮기고 치우고 하다보니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잠시 쉬었다 하자며 슈퍼에 가서 마실 거나 좀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고 나는 가까운 슈퍼를 찾아 반지하 가게를 빠져나왔다.

10년째 재개발을 기다리는 좁은 골목 골목을 그렇게 걸어나가다가 술에 취해 길에 앉아 철푸덕 앉아 있던 김씨 아저씨를 만났다. 김씨 아저씨는 아버지와는 수십년 동안 친하게 지내신 분이었는데 거의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위인이었다. 어머니 말로 저치만 없었어도 아버지가 그렇게 술독에 빠지진 않았을 거라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에게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가끔씩 나에게 용돈을 주시곤 하던 아저씨라 그냥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지나가려 했다.

"서윤아! 잠깐만 잠깐만 이리와보련?"

술에 절어 쓰러져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김씨 아저씨가 갑자기 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비록, 지금은 폐인이 된 모습이지만 어렸을 적 한때는 내가 이상형으로 꼽았을 만큼 미남형이었던 김씨 아저씨였다. 그런 김씨 아저씨가 이렇게 결혼도 못한 채로 거의 노숙자처럼 늙어갈 것이라고는 동네 사람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별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해서 무릎을 끌어 모으며 김씨 아저씨 곁에 나란히 앉았다.

"서윤이는 아저씨 싫지? 아빠도 싫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무 대답 없이 김씨 아저씨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저씨도 이젠 떠날 때가 되었어. 그래서 말인데... 네 아빠는 너를 정말 사랑했단다. 원래 이런 얘기를 하는 건 규정에 어긋나지만... 그리고, 네가 내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해도 이해해."

그렇게 운을 떼고 시작한 아저씨의 말씀은 그 당시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황당무계한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은하계가 속한 라니아케아 슈퍼클러스터란 초은하단을 맡고 있는 지역 사령관으로써 우리 지구가 속한 은하계를 방어하기 위해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더이상 지구에서의 영혼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 지구에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고 자신도 이제 곧 아버지를 따라 떠날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들이 필요하고 지구는 그렇게 우주 전쟁에 필요한 순수한 영혼들의 공급을 맡고 있는 일종의 병기창이라며 아버지는 너를 위해 네 가족을 위해 이 지구를 위해 그리고 우주 평화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쳐 싸우고 있는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더니 갑자기 예의 그 술에 쩔은 표정으로 돌아가 사실은 농담이라며 크게 웃어제끼셨다.

가족을 돌보지도 않고 술에 쩔어서 살다 한겨울 동사한 아버지가 사실은 우주 평화를 위해 싸운 사람이었다니... 나로서는 헛웃음만 나왔다. 그때는 그저 알콜 중독이 김씨 아저씨의 머리를 이상하게 만든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슈퍼에 들러 어머니가 시킨 음료수를 사오면서 보니 그 잠깐 사이 김씨 아저씨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며칠 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니 어렸을 적 썼던 일기장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일기장이 아니라 일기장을 넣어둔 나무함이 생각났다. 어렸을 적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다쓴 일기장은 열쇠가 달린 나무함에 넣어두었는데 나무함에는 일기장 말고도 내 나름대로는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물건들도 보관했는데 어렸을 적 아버지가 나에게 잘 간직해두라며 선물해주셨던 수정도 그중 하나였다.

옷장 위 깊숙한 곳에 두었던 나무함은 몇년 동안 먼지가 쌓인 채로 언젠가 내가 다시 찾아줄 것을 굳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다시 찾아주어서 고마와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먼지를 닦아내고 나무함을 열어보니 마치 어제 넣어둔 일기장처럼 일기장 종이들이 전혀 바래지 않고 새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무함 한켠에는 아버지가 선물해주었던 수정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빠..."

수정을 집어드니 아버지가 선물했던 그날 아버지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빠... 라니아케아 은하단 사령관님? 아빠가 우주함대 사령관이었든 술주정뱅이 폐인이었든 서윤이는 아빠 사랑해요..."

- 끝 -

IP : 122.34.xxx.31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콩콩이큰언니
    '14.12.28 2:07 AM (219.255.xxx.208)

    재밌네요, 슬프기도 하고요.
    며칠 전 장례식장에 다녀 왔는데...그 분도 아버지셨죠.
    어릴때부터 뵙 던 분이였는데...슬프기 보단 허하네요.

  • 2. 고띠에르
    '14.12.28 2:10 AM (122.34.xxx.31)

    이번에 쓴 건 제가 생각하기에도 스토리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다들 이게 대체 뭥미하면서 아무도 답글 안달아주실 줄 알았는데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3. 콩콩이큰언니
    '14.12.28 2:23 AM (219.255.xxx.208)

    전에 쓰신 글도 있나 싶어 찾아 봤는데, 재밌었어요 ㅎ
    가끔 글로 뵙길 바래요.
    그리고 사주는 저도 재밌어 하는 학문이라, 알진 못하지만 ㅎ
    잠시간 읽는 즐거움을 주셔서 고마워요,

  • 4. ㅇㅇ
    '14.12.28 2:27 AM (121.130.xxx.145)

    짧지만 짠하네요. ㅜ ㅜ

  • 5. 고띠에르
    '14.12.28 2:40 AM (122.34.xxx.31)

    사주 얘기하시니 뜨끔하네요...^^ 그런데, 이제 사주는 안보려구요...--

    소설은 아직은 습작단계인데 앞으로도 며칠에 한편씩은 써보려고 합니다.
    긴 건 지루하니 짧게 짧게 쓰려구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6. 콩콩이큰언니
    '14.12.28 2:42 AM (219.255.xxx.208)

    네 원글님 공개 게시판에서 사주는 안봐주시는게 서로 좋아요 ㅎ
    근데 글은 짧게 짧게 쓰시다 보면 긴 글 쓰기가 힘들어져요.
    가끔은 긴 글도 올려 주세요.
    전 긴 글도 다 읽습니다 ㅎ
    요즘 82를 뜸하게 와서 그렇지 읽는거 좋아해요.
    그럼 편한 밤이 되시길 바랄께요.
    다음에 또 뵙길.

  • 7. ㅎㅎ
    '14.12.28 4:19 AM (122.40.xxx.36)

    뒷부분이 으잉? 싶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아직은~ 습작 단계라시니...
    그럼 등단하고픈 소망이나 계획도 있는 건가요? ^^ 궁금하네요.

  • 8. 고띠에르
    '14.12.28 10:36 AM (122.34.xxx.31)

    당연히 등단하고 싶죠.
    하지만, 등단보다는 영화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문과 출신도 아니고 정식으로 글쓰기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는지라 신춘문예같은 전통적인 등용문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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