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달라, 제발 살려달라
혐오의 폭력은 미쳐 날뛰고 인권의 가치는 무너지고 법은 목숨을 배신하고…
2014년, 마지막 희망마저 꺾인 이 땅 곳곳에서 여전히 안녕하지 못하다는 절규
안녕들 못하셨습니까?
2013년 마지막 인사가 ‘안녕들 하셨습니까?’였다면, 2014년의 마지막 인사는 ‘안녕들 못하셨습니까?’일지 모른다. 그만큼 좋았던 기억이 없는 해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아니 살아남은 자의 치욕만큼 올해에 어울리는 말도 없다.
농담을 하곤 했다. “그래도 한국엔 좋은 점이 딱 2개는 있지.” 98개가 나빠도 2개는 나쁘지 않았다. 농담의 첫째는 “담뱃값이 싸다”, 둘째는 “혐오폭력은 없잖아”였다. 동방예의지국의 유구한 전통은, 그러나 무너졌다. 담뱃값이 2배로 뛰듯 혐오가 미쳐 날뛴다. 혐오의 수치도 폭력의 수준도 폭등했고, 인권의 가치는 무너졌다. 이제는 ‘아베의 일본’이 아니라 ‘푸틴의 러시아’로 치닫지 않을지 걱정만 쌓인다.
사법제도는 갈수록 목숨을 배신했고, 고장난 정치는 오작동만 반복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가 위임한 권력으로 마지막 희망마저 꺾는가?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해고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은 통곡의 벽을 세우는 것과 같았다. 회사는 정당성의 증명서를 얻었다. 이제 제도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정치는 없다.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남은 희망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인지상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지금도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욱·이창근은 미친 겨울의 한파 속에 공장의 70m 굴뚝에 올랐다. 먹먹한 그들의 결단 앞에 우리는 지금 천천히 운다. 얼지 마, 얼지 마, 얼지 마. 그저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살려달라, 살려달라, 제발 살려달라.”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다. 목숨이 백척간두라 한 발만 내디디면 절벽일 것 같아서 무서운 사람은 당연히 “살려달라”고 외친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애원이 아니다. 이창근 쌍용차 노동조합 정책실장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굴뚝에 오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라왔다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애원으로 들린다면, 이 말이 비참하다면, 당신이 절실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70m 고공에서 울리는 간절한 고백의 기도가 들린다. 법적 구제, 제도적 해결의 한순간이 마감된 자리에서, 가장 진솔한 인간으로 그들은 굴뚝에 올랐다. 호소하기 위해서다. “식도를 슬로프 삼아 따뜻한 밥알이 내려갑니다. 회사와 공장 안 기업노조의 배려와 도움 탓입니다. 우린 지금 회사와 공장 안 동료들과 이곳 굴뚝에서 따뜻한 밥을 나눕니다. 이렇게 밥 나누면 곧 마음도 풀리겠죠.” 오직 고드름만이 자라는 고공에서 이창근은 김정욱과 뭇국과 콩밥을 넘기며 그렇게 썼다.
일찍이 시인은 노래하고 촌장은 반주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시인과 촌장 <풍경>) 쌍용, 밀양, 강정…. 노동자는 굴뚝에서 공장으로 돌아가고, 할매들은 농성장에서 밭으로 돌아가고, 제주의 어부는 다시 바다로 나가고. 이들은 다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나약한 난쟁이들의 70m 굴뚝은 가장 낮은 곳이 되었다. 지금, 두 노동자가 위험하다. 그들을 살리지 못하면 우리는 어떠한 세계도 살리지 못한다.
날아오는 소식마다 비보다. 저성장의 흉흉한 소문은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고, 그나마 남은 안정된 일자리를 위협하는 뉴스는 날마다 날아든다. 청와대발, 여의도발 뉴스가 목숨들을 위협한다. 우리는 천천히 한 명씩 70m 굴뚝에 올라가는 존재가 되리란 공포에 젖는다. 저성장의 예감은 우리 안의 악마를 깨웠다. 그래서 묻는다. 이런 비루한 삶마저 지속 가능한가? 이제 누가 저항할 힘이 남았나? 저항마저 지속 불가능한 사회는 오는가? 제발 틀렸다고 말해달라. 제발 틀렸다고.
마치 번복되지 않을 판정을 기다리는 선수처럼 우리들은 하염없다. 공정하지 못한 오심으로 시합은 패배로 끝났다. 판정은 번복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끝을 내지 못한다. 그것은 다음이 없는 목숨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쌍용차 노동자, 코오롱 해고자, 밀양 할매들의 얘기가 아니다.
2014년, 마지막 희망마저 꺾인 이 땅 곳곳에서 여전히 안녕하지 못하다는 절규
안녕들 못하셨습니까?
2013년 마지막 인사가 ‘안녕들 하셨습니까?’였다면, 2014년의 마지막 인사는 ‘안녕들 못하셨습니까?’일지 모른다. 그만큼 좋았던 기억이 없는 해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아니 살아남은 자의 치욕만큼 올해에 어울리는 말도 없다.
농담을 하곤 했다. “그래도 한국엔 좋은 점이 딱 2개는 있지.” 98개가 나빠도 2개는 나쁘지 않았다. 농담의 첫째는 “담뱃값이 싸다”, 둘째는 “혐오폭력은 없잖아”였다. 동방예의지국의 유구한 전통은, 그러나 무너졌다. 담뱃값이 2배로 뛰듯 혐오가 미쳐 날뛴다. 혐오의 수치도 폭력의 수준도 폭등했고, 인권의 가치는 무너졌다. 이제는 ‘아베의 일본’이 아니라 ‘푸틴의 러시아’로 치닫지 않을지 걱정만 쌓인다.
사법제도는 갈수록 목숨을 배신했고, 고장난 정치는 오작동만 반복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가 위임한 권력으로 마지막 희망마저 꺾는가?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해고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은 통곡의 벽을 세우는 것과 같았다. 회사는 정당성의 증명서를 얻었다. 이제 제도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정치는 없다.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남은 희망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인지상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지금도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욱·이창근은 미친 겨울의 한파 속에 공장의 70m 굴뚝에 올랐다. 먹먹한 그들의 결단 앞에 우리는 지금 천천히 운다. 얼지 마, 얼지 마, 얼지 마. 그저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살려달라, 살려달라, 제발 살려달라.”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다. 목숨이 백척간두라 한 발만 내디디면 절벽일 것 같아서 무서운 사람은 당연히 “살려달라”고 외친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애원이 아니다. 이창근 쌍용차 노동조합 정책실장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굴뚝에 오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라왔다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애원으로 들린다면, 이 말이 비참하다면, 당신이 절실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70m 고공에서 울리는 간절한 고백의 기도가 들린다. 법적 구제, 제도적 해결의 한순간이 마감된 자리에서, 가장 진솔한 인간으로 그들은 굴뚝에 올랐다. 호소하기 위해서다. “식도를 슬로프 삼아 따뜻한 밥알이 내려갑니다. 회사와 공장 안 기업노조의 배려와 도움 탓입니다. 우린 지금 회사와 공장 안 동료들과 이곳 굴뚝에서 따뜻한 밥을 나눕니다. 이렇게 밥 나누면 곧 마음도 풀리겠죠.” 오직 고드름만이 자라는 고공에서 이창근은 김정욱과 뭇국과 콩밥을 넘기며 그렇게 썼다.
일찍이 시인은 노래하고 촌장은 반주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시인과 촌장 <풍경>) 쌍용, 밀양, 강정…. 노동자는 굴뚝에서 공장으로 돌아가고, 할매들은 농성장에서 밭으로 돌아가고, 제주의 어부는 다시 바다로 나가고. 이들은 다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나약한 난쟁이들의 70m 굴뚝은 가장 낮은 곳이 되었다. 지금, 두 노동자가 위험하다. 그들을 살리지 못하면 우리는 어떠한 세계도 살리지 못한다.
날아오는 소식마다 비보다. 저성장의 흉흉한 소문은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고, 그나마 남은 안정된 일자리를 위협하는 뉴스는 날마다 날아든다. 청와대발, 여의도발 뉴스가 목숨들을 위협한다. 우리는 천천히 한 명씩 70m 굴뚝에 올라가는 존재가 되리란 공포에 젖는다. 저성장의 예감은 우리 안의 악마를 깨웠다. 그래서 묻는다. 이런 비루한 삶마저 지속 가능한가? 이제 누가 저항할 힘이 남았나? 저항마저 지속 불가능한 사회는 오는가? 제발 틀렸다고 말해달라. 제발 틀렸다고.
마치 번복되지 않을 판정을 기다리는 선수처럼 우리들은 하염없다. 공정하지 못한 오심으로 시합은 패배로 끝났다. 판정은 번복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끝을 내지 못한다. 그것은 다음이 없는 목숨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쌍용차 노동자, 코오롱 해고자, 밀양 할매들의 얘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