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씨할멈
박씨할멈은 1928년생으로 지금은 안산시가 되어버린 화성군 반월면(지금의 안산시 반월동~군포시 대야동 사이) 의 지주 딸로 태어났다. 1920년생의 한사람으로 일제시대의 문화와 질서에 대한 향수를 말할 때는
친일중독증 환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을 호평하는 반면에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운동에 빠져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존경으로 일관하는 등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너무 복잡한 인생역정을 가진 분이었다.
7살에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면사무소 옆 반월국민학교를 들어갔는데 1학년 첫교시부터 전부 수업이 전부 일본말이야. 우리는 국어(일본어) 뿐 아니라 산수나 과학, 도덕, 그때는 수신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음학, 미술 모든 교과목을 일본어로 하는거야. 집에서 조선말만 쓰다가 갑자기 학교에서는 일본말만 쓰니 알아듣지 못해서 처음에는 몹시 답답했어. 한 1년을 그러고 나니 누구한테나 일본말로 대화할 수 있었고, 2학년부턴 완전히 일본사람 다 되었지. 그때는 학교, 우체국, 면사무소, 은행, 정거장 철도원, 병원, 경찰서 등 모든 관공서나 큰 점포에서 전부 일본말로 묻고 설명하기 때문에 일본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 우리는 그 때 우리나라가 일본이고 일장기가 우리나라 국기인 줄로만 알았어. 비록 집에서는 조선말을 쓰고있었지만 일본이 곧 우리나라 라는 생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 일본인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이 우리를 가르쳐주었는데 정말 자상하게 사랑으로 가르쳤어. 어린학생들에게 야단치고 욕하고 모독을 주는...요즘보는 그런 행위는 전혀 없었어. 나는 왜 조선사람들이 일본과 일본을 욕하는 지 이해할 수 없어. 특히 해방후 지금까지도...국민학교 4년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갔어. 서울 옥인동에 있는 아버지 친인척의 집에서 다녔고 중학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진명학교로 진학했어. 기숙사 생활을 했지.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사회주의이념을 가진 조선인 선생님으로 부터 의식화교육을 받았어. 그러나 그때도 무슨 조선이 독립을 해야한다는 교육이 아니라 순수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교육이었어. 그 때 중학교는 4년제 였는데 3학년 다니던 중 해방이 됐지. 해방후 난 좌익학생운동의 선두에 섰어.보니까 당시 밖에 나갈때는 모두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네요.. 물론 집에서는 우리말 썼기는 썼는데, 저정도면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에 일본어 잘하는 사람 정말 많은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여러분 부모님이나, 시부모들 중에 일본어 잘하는 사람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