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누구나 한번쯤 다 좋아한 기억이 있잖아요.
성곽길 따라 걷다가 내려오니 거기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인상적이더군요.
윤동주 시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고향집과 일본에 있는 하숙집의 유품들은
다 소실되어 자료가 많지 않은데, 적은 자료로 심플하고 임팩트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그 건물이 원래 있던 가압장 수도 시설을 재활용했다고 하더라고요.
건축가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윤동주 고향집 마당에 있는 우물이 이 건축의 포인트입니다.
자료 속 사진 속의 윤동주 시인-참 단아하고 지적이고 기품있게 잘생겼습니다.
요새 태어났으면 배우해도 될 얼굴인데, 배우 중에 저런 기품있는 얼굴은 드문 듯...
특히 동영상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원래 이런 기념관이나 문학관에 있는 동영상이
화질이나 음향이 썩 좋진 않긴 해요. 하지만 동영상 보는 장소가 닫힌 우물이라고 해서
꼭 감옥 안 같아서 더욱 울컥한 마음으로 동영상이 와 닿았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윤동주를 좋아했고 독립운동가들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차가운 감옥 안에서 20대의 젊음으로 생체실험 주사를 맞아 스러진 그 광경이 떠올라
눈물이 나더군요....
윤동주를 흔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유약한 지식인으로 학교 때 배웠는데,
잘못 알려진 듯해요. 그 당시 금지된 언어인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의 하나였고, 일본 유학 당시 독립운동에 가담해 무언가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죠. 20대의 건강한 젊은이였던 그는 감옥에서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고 같이 끌려간 사촌 송몽규도 마찬가지로 그 주사 때문에 사망합니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발표하지 못한 유작 시들이 살아남아 빛을 발하면서
윤동주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으니, 문학의 힘은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서촌에 윤동주가 하숙하던 김송 선생 집터도 있습니다.
거기서 연희전문대를 다니면서 인왕산에 올라가 아침이면 세수하고 산책하고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와 아침 먹고 방 정리, 청소하고 학교를 갔다고 하더군요.
그 집터는 전에 올린 우당기념관과 같은 동네에 있습니다.
그는 꼼꼼하고 섬세하면서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한 고집과 올곧음이 남달랐던 젊은이였습니다.
그 젊음을 지켜주지 못한 그 시대가 떠오르면서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도 사랑받는 그의 시는
요즘처럼 혼탁한 시절에 더욱 맑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