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초기의 참모 박상길이 묘사한 박정희와 또 달리 그는 다면체다.
깐깐한 박정희와 그렇지 않은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정치 9단의 정보정치 달인에서 원칙주의자 박정희까지
하지만 가장 그다운 모습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보다 눈물의 사나이였다. 한마디로 박정희를 정의하자면 눈물 많은 남자.
그게 맞다. 눈물 없이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대통령직 수행과 삶의 고비에서 눈물을 쏟는 일이 너무 잦았고
때문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서 울부짖는 통곡까지를 살펴야 진면목이 보인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1964년 서독의 파독 광부, 간호사와 함께 흘린 눈물이다.
당시 서독을 공식 방문한 다음날 그는 루르 지방의 함보른탄광회사로 향했다.
광부 수백 명이 검은 탄가루를 씻어내고 몰려나와 태극기를 흔들었고 에센간호학교에 근무하는 파독 간호사 수백 명도 한복차림으로 나왔다. 강당에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할 때부터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던 박정희는 연단의 원고를 밀어낸 뒤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더 이상의 연설은 불가능했다. 그도 눈물지었고, 서울에서는 넥타이를 매던 엘리트 출신의 신사 광부들도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그들 손에 파고다 담배 500갑을 대통령의 선물이라며 쥐어주고, 그런 처지가 가슴 아파 돌아가는 차에서도 눈물을 지었다.
오죽했으면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줘야 했을까.
그 전날 박정희는 단독회담을 했던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차관을 제공해 달라고 호소했다.
“사실 우리가 서독을 방문한 목적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발전상을 배우기 위한 것도 있지만, 돈을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빌려만 주시면 그것을 국가 재건에 쓰겠습니다.
우리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세계를 몰랐고 기회를 놓쳤습니다.”
예정된 회담을 30분 연장해 호소했고 그 결과 차관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날 정상회담에서 박정희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에 가까웠다.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에 따르면, 박정희의 혼신을 다한 발언에 민망하기조차 했다.
그는 미처 몰랐다. 당시 한국의 처참한 상황을·······
그 전 해 경제지표가 낙제점이고, 외환위기 조짐까지 있었다.
1962년 경제성장률은 2,2퍼센트였고 보유한 외환은 줄어갔다.
서독 방문 전해 기준으로는 채 1억 달러가 안 돼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집권 직후 그는 “내가 혁명을 잘못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서독 땅 눈물은, 유명한 그의 말처럼 ‘도둑맞은 폐가(廢家)’ 꼴이던 나라의 살림을 책임진 자의 자탄이 아니었을까?
보통 때도 그는 눈물바람을 자주했다.
1970년대 초반 그가 경남 마산의 한일 합섬 공장을 시찰했다.
기능공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이었다.
그가 유달리 기분 좋을 때는 공장 기공식 참석인데, 한일합섬 참석 때도 그랬다.
그날 시찰을 하던 박정희는 10대 어린 여공에게 다가가 소원을 물었다.
“저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영어를 잘 모르니까 감독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임금을 올려달라든가, 근무 여건을 개선해 달라는 요청과 전혀 달랐다.
순간적으로 대통령이 울컥했다. 그게 보였다. 수행했던 관계자들이 그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표정부터 그랬지만 말끝이 갈라지고 흔들리더니 이내 눈에 이슬이 맺혔다.
자신이 자란 환경과 삶을 생각했을 것이고, 아직도 어렵게 살며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하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처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체면에 잠시 고개를 젖히는 등 애써 눈물을 숨기려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랜 뒤 대통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옆에 있는 김한수 사장에게 “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하고 하소연하듯이 물었고, 사장은 “ 곧 야간학교를 만들겠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김한수 사장은 경남 김해에서 중학교를 세웠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