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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어느 알콜중독자의 항변(?)

....... 조회수 : 3,561
작성일 : 2014-10-01 00:19:39
아이가 잠든 밤에 한 잔 하면서 쓰네요.
아무도 제가 알콜 중독인 줄 몰라요.
저는 남들(가족까지 포함해서) 보기엔 너무도 멀쩡하게 살고 있거든요.
여기서 심심하면 입방아에 오르는 전업이구요.
중, 고생 아이들이 있지요.

전업을 서글프게 하는 건 일의 끊임없는 반복성에 있는 듯해요.
시지프의 돌에 이보다 더 적절한 예가 있을까 싶을 정도죠.
직장이라고 다를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업의 일은 정말 너무도 똑같고 똑같아요.
식사 메뉴가 달라지는 차이가 있을까.
전업의 좋은 점은 여유로움이죠.
전업이 힘들고 일이 끝이 없다는 분들도 계시지만(아마도 아이들이 어릴 경우 아닌가 싶어요)
저처럼 연식이 꽤 되면 근무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죠.
저 꽤 부지런한 전업인데요, 오전 두 시간이면 청소는 다 끝나요.
집안에 먼지 없이 매일 청소해요(선반들은 물론 장식장 위 물건들, 액자들까지 거의 매일 닦아요).
저녁 두어 시간이면 아이들에게 반찬 여러 개 새로 해서 맛있는 밥 먹일 수 있구요.
빨래는 하루 걸러 한 번씩 해요. 날 잡아서 다림질 깨끗하게 하구요.
그러니까 시간이 남아돈답니다.

그 남아도는 시간이 너무 공허해요.
욕하셔도 돼요.
자기계발, 이런 거 관심 없어진 지 오래구요(그동안 계발 많이 해서 할 줄 아는 건 정말 많아요).
책이 안 읽혀요. 
네, 무식한 아줌마예요. 그치만 책이 재미가 없어요.
한때 내가 그토록 책에 코를 박고 살던 책벌레였던 적이 있었다는 게 꿈결같이 멀게 느껴져요.
지금은 모든 책들이 시시해요.

친구도 하나도 없어요.
원래 사교성도 없고 친구도 몇 없었는데
그나마 제가 연락 안 하니까 어느새 아무도 옆에 없네요.
연락하고 지내는 아이 친구엄마들도 아무도 없어요.
아이들 학교 모임에 나가는 게 제일 싫어요.
아이들을 생각해서 가끔식 나가곤 하는데, 귀를 막고 있고 싶을 정도에요.
남편이 제일 친한 친구인데
너무 바빠서 얼굴 볼 틈이 없어요.
그래서 술이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네요.

아이들 잠든 밤에 거의 매일 술을 마셔요(싸구려 와인이요).
저는 부지런하니까 안주도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마셔요.
맛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지금은 소고기 찹쌀구이해서 먹고 있어요.
(한우는 너무 비싸서 호주산 부채살로 해먹는데 찹쌀구이의 특징은 고기 본연의 맛을 없애준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싼 고기도 상관없죠)
먹다가 남으면 내일 아이들 구워줄 거예요.
제 안주가 아이들 반찬이 되곤 하죠.

다행인 건 한 번도 필름이 끊긴 적이 없다는 것,
와인 두 잔이 거의 최대 주량이고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단계 이상으로 더 마시고 싶지는 않다는 것.

조금 후 제가 잠들고 나면 남편이 들어오겠지만
옆방에 가서 자겠죠.
자기 코고는 소리에 제가 깰까봐, 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가 예민해서 자다가 서로 부딪치면 번번히 깨고 한 번 깨면 다시 잠드는 게 힘든 악순환이 싫어서, 라는 걸 알고 있죠.
그치만 술냄새 풍기는 걸 안 들킬 수 있어서 저도 다행이에요.

별 일 없는 나날들이구요.
아이들도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주어 고맙구요.
노후가 조금 걱정되지만 남편이 보험 들어놓은 게 있어서 
입에 풀칠은 할 것 같고....
저의 인생은 이렇게 똑같이 되풀이되다 어느 순간 끝이 나겠죠.
이런 인생에서 제가 알콜 중독인게 문제가 되는 걸까요?
깨어 있는 동안 멀쩡하게 살고 있는데요...
아, 건강이 나빠져서 암 같은 게 걸릴 수 있겠죠, 아니면 알콜성 치매....
그런 건 별로 두렵지가 않아요. 아직 현실이 아니어서겠죠.
그럼에도, 제가 알콜 중독일 거라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느껴져요. 
왜 그래야 되는 걸까,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내 일 열심히 하며 살고 있는데...
저 알콜 중독이면 안 되는 건가요?

면죄부를 받고 싶은, 
아니면 뜨끔한 일갈이 필요한,
아무도 모르는 알콜 중독자의 넋두리였습니다.











IP : 112.152.xxx.133
1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한때중독
    '14.10.1 12:26 AM (121.141.xxx.27)

    와인 두잔은 알코올중독이 아니랍니다. 건강하다는 프랑스인들은 하루에 그보다 더 많은 와인을 마실걸요.ㄱ그러니 스스로를 그렇게 가치저하적으로 레벨링하지 마셔요. 와인 두잔 좋습니다. 단, 소주나 다른 나쁜 술로 발전하지 않도록 조절하시면 돼요. 힘내시길

  • 2.
    '14.10.1 12:27 AM (218.147.xxx.56)

    이글 .. 나중에 5천년 후에 파피루스 처럼 고대주부의 알콜의존증 이라고 교과서에 소개될것 같아요. 5000년전이나 지금이나 가사육아부담은 여자몫이었다고요.

  • 3.
    '14.10.1 12:28 AM (218.147.xxx.56)

    원글님 책벌레 였던것처럼 글을매끄럽게 참 잘쓰시네요. 거창한 수식어 하나 안쓰고 내용이 명확하네요...

  • 4. 바라바
    '14.10.1 12:34 AM (116.39.xxx.169)

    글 참 잘쓰시네요ㅡ
    외로움이 느껴져 맘이 아프네요.
    하지만 위로하기엔 저도 마찬가지삶이라 감히 위로는못드리구요,
    와인 두잔에 죄책감을 느끼실 이유는 전혀 없을것 같아요.
    술이 떡이 되어 온갖 손해와 폐만 끼치는 저희남편도 절대 안갖는 죄책감. 원글님같이 완벽하인분이 가질 이유가 없죠^^ 와인친구 할 딱한명만 옆에 있어준다면 원글님의 삶이 더할나위 없이 부럽네요ㅡ

  • 5. 저와 비슷
    '14.10.1 12:41 AM (218.48.xxx.252)

    저도 맥주 거의매일 마셔요.
    스스로 겁이나요.저는 운동다녀온후 컴터하면서 마실때가 많아요.
    아이들이 없을때요.손이빨라 청소.요리 다 잘하구요.전 친구도 많은데 요즘은 혼자있는시간이
    너무 좋아요.
    아르바이트로 아이도 가르치고 만약 제가 맥주마시는 시간이 없다면 훨씬 더 많은일들을 하겠지만 전 그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멈추지는 못하지만 매일 금주를 계획해요

  • 6. carry1981
    '14.10.1 12:46 AM (119.200.xxx.219)

    정말 오랜만에 로그인해서 댓글 써요.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 정말 오랜만에 공감이 가는 글이예요. 댓글도 멋지게 달아드리고 싶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지만 역부족이네요... 늘 캄캄한 방, 침대 끝자리에 모로 누워 82글 읽는데, 처음이네요. 계속 반복해서 읽는 글은...그리고 와인 2잔에 알콜중독을 논할 정도는 아닌 듯해요. 이정도의 느슨함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정도로 생각하시고~고민없이 즐기세요!

  • 7. 키친드렁커
    '14.10.1 12:48 AM (58.141.xxx.58)

    저랑 아주 비슷하시네요..하루에 와인이면 한두잔, 샤워하고 맥주면 500 한잔
    저도 중고딩 엄마, 남편회사인간, 주부 노릇 충실히 하며 끊임없이 돌덩이 굴려 올리고 있어요..ㅎㅎ
    약한 알콜 의존으로 우리 삶에 이런 위안이 있는게 나쁘지 않지 않나요?^^

  • 8. 굿
    '14.10.1 12:48 AM (203.226.xxx.254)

    와인두잔 좋은데요 어쩜 어떤친구보다 원글님
    일상에 와인두잔이더 행복을줄수도 있겠네요

    전 맥주 한캔이 어떤친구보다더 제게행복과
    위안을줍니다 가벼운음주는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된다는데 괜찮지않을까요

  • 9. 브낰
    '14.10.1 12:49 AM (74.76.xxx.95)

    저도 일 (혹은 일과 운동) 마치고 음식하면서 맥주나 와인 한 두잔씩 마시는게 낙인데요.
    일주일에 3-4번 운동하구요.
    알코홀릭이라고 생각해 본적 없어요. 즐기세요.

  • 10. 저도 겁나는데,
    '14.10.1 1:04 AM (223.62.xxx.32)

    운동후에 마시는 맥주가 너무좋아서

    안마시려 자제력을 발휘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래도 힘들게 운동 한거 생각해서

    참아요. 계속 잘 참아야하는데..

  • 11. 와중에
    '14.10.1 7:27 AM (174.239.xxx.252)

    소고기 찹쌀 구이는 어떻게 해야 맛있나요?
    저는 와인 선물할 일이 있어 한참 와인 사이트를 뒤졌더니 와인이 땡겨서 이따 한병 딸려구요.
    소고기 찹쌀구이는 남편이랑 강아지 반찬으로 해주고 싶고요, 저는 안주는 안먹는지라.
    원글님 알콜 중독 아니예요. 우울해 하지 마세요.

  • 12. 블레이크
    '14.10.1 7:51 AM (112.154.xxx.180)

    알콜중독이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공허함과 가끔 자괴감에 빠지는게 문제인것 아닌가요?
    저도 알콜중독이었는데 식구들을 힘들게 하고 특히 남편
    제가 필름 끊겨서 매번 자괴감 느끼는걸 깨닫고
    한번에 끊었거든요
    문제는 그 뒤에 뭐가 있느냐죠.
    사는게 뭔지 욕망이 뭔지 괴로움이 뭔지
    마음 공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중이네요
    내가 중독되어 있던 의지하고 있던 것들이 보여요
    욕망하는 것들 열등감 우월감 얽히고설킨 것들이...

  • 13. ........
    '14.10.1 8:43 AM (112.152.xxx.133)

    써놓고 바로 먹은 거 정리하고 자러 갔어요.
    댓글들 보는 게 좀 두려워서요. 저 이런 익명 게시판에도 거의 글을 안 쓰거든요.
    저랑 비슷한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 위안을 삼아요.
    블레이크 님 말씀대로 삶의 공허함이 저를 지배하는 걸 견디기가 힘든 것 같아요.
    '성취하는 삶'의 물결에서 멀어져 있다 보니까
    그런 삶에 뛰어들고 싶지도 않고 뛰어들 수도 없네요. 열등감은 느끼죠....
    저들은 저렇게 노력해서 성취하는데, 나는 왜 이 일만 무한반복하고 있는가, 이런...
    근데, 그렇게 성취해서 얻는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에 의해 도로 옥죄이고 있는 삶들을 지켜보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가 변명이 되기도 하고....
    아무튼, 죄책감에서 벗어나도 되나, 살짝 안심이 되기도 하네요.
    아, 저 운동도 열심히 해요. 시간 많은 여자니까요. 주로 밤에 달리죠. 우리 동네에는 죄다 걷는 분들뿐이라
    야밤에 아무렇게나 걸쳐입고 달리는 늙은 여자 보이면 그게 저예요.

    와중에 님, 찹쌀구이는 얇게 썬 지방 적은 부위 소고기를 사용하시면 되구요. 간장, 설탕, 마늘 등 불고기 양념을 물이랑 섞어 간을 약하게 해서 차곡차곡 양념한 다음 하나씩 찹쌀을 묻혀 기름에 구워내면 돼요. 양파 초절임하고 깻잎도 썰어서 같이 먹으면 좋구요. 강아지 반찬으로는 너무 거한 거 아닐까요?^^

  • 14. 와중에
    '14.10.1 10:18 AM (174.239.xxx.252)

    그러게요. 양념이 되어 있으면 강아지는 주지 못하겠네요 ㅎㅎ
    술안주로 그렇게 어려운 음식을 해서 혼자 드시다니, 게으르고 손도 느린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글도 잘쓰고 재능이 많은 분인듯 합니다.
    그리고 술을 즐길 줄 아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횟수를 좀 줄이고 그 즐거운 느낌을 확인해 보시길요.

  • 15. 동네 술친구
    '14.10.1 10:20 AM (220.73.xxx.243) - 삭제된댓글

    저도 퇴근하고 집에서 한잔 할 때가 제일!
    동네 술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서로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자기 술 알아서 홀짝홀짝 마시고 안녕~ 하고 헤어지는 ㅋㅋ

  • 16. 중독은 무슨ㅋㅋ
    '14.10.1 2:54 PM (211.59.xxx.111)

    사회생활만 좀 하시면 될거 같아요 모임같은거요
    저도 그런거 싫어서 안나가는데
    다행히 비생산적인 것도 싫어해서 뭐라도 할려구요
    장기적으로라도 돈벌수 있는거요

    저도 맥주 한두캔 매일 마셨는데 이제 혼자 마시는 술은 끊었어요. 운동하고 탄산수 마셔요.
    술이 심심해서 마시는거더라구요. 안심심하면 안마시게 되요

  • 17. --
    '14.10.1 7:32 PM (203.226.xxx.32)

    와 단편소설 읽는줄 알았어요. 문장이 착착붙는데다가 리듬감이 있어서 잘 읽히네요. 글을 좀 써보시면 어떨까요. 계속 읽고 싶어요

  • 18. 오수정이다
    '14.10.1 8:04 PM (112.149.xxx.187)

    계속 읽고 싶어서...흔적 남겨요^^,,,비슷한 고민에...

  • 19. ...
    '21.2.2 1:08 PM (69.181.xxx.131)

    다음에도 읽고 친구에게도 알려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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