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기다리기도 전에 이미 왔다
아침엔 가벼운 머플러라도 있어야 한기가 가신다
날씨도 어중간하고 생활도 그에 따르다 보니 미처 옷장 정리를 못한 상황
피곤하기도 하고 잘 보일 사람? 도 없고 하니
매일 그 옷이 그 옷이다
계절에 맞춰 새옷을 사는 것도 발품 파는 신경전이 예전 만큼 재밌지가 않다
나이 들면 편한 게 왜 최고가 되는지 절실히 느낀다
충격은 항상 그렇다
편하고 애매하게 물들어갈 때 내치기 한판으로 끝난다
막 입은 티가 나는 때가 있다
정성스럽고 세련된 누군가의 모습에 반사 되는 때라던지
의기소침한 마음이 옷보다 한꺼풀 나와 초라하게 바꿔버린다
괜찮은 옷이 없는 것도 아니다
쇼핑이라고 하긴 하는데 골라 집에 와 놓고 보면
익숙한 취향의 것들
분명 다르다 생각하고 신중히 고른 것임에도
어디선가 변형된 디자인에 지나지 않은 예전의 그런 조합들
톤 다운된 파스텔과 무채색의 만남은 너무 고요하고 준엄해서 답답하다
젊은 혈기가 장식이 되고 홍조가 빛이 돼 그런 우중중한 색감도
따뜻한 분위기로 소화하던 때는 지났다
친구도, 옷도, 신도...
늘 친숙한 것만 취한다
갈수록 더한다
옷에도 입었던 온기가 없으니 박제된 꽃같고
보기만 할 뿐 에이 나중에 라며 손이 안 간다
큰맘 먹고 외출하기 전 옷장 쑤셔가며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결국엔 시간에 쫓겨 익숙한 나를 입었다
가끔 급할 때 기발한 센스가 나오기도 한다
무심한 룩이라는 게 자다 깬 부수스한 자연스런 머리가
파리하지만 매끈한 민낯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다 주워담지 못한 미어터지는 옷장을 보니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지 싶다
옷장에 쳐박혀 몇 년을 빛도 못 보고 색이 바래져 가는 건 내가 빈곤해지는 일이다
정류장 앞에 주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다
지금 이 거리에서 상당히 튄다
근데 이쁘긴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