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선풍기 바람이 차다
그래도 정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방 한 켠에 있다
여름 내내 쉬지 않고 돌았다
돌릴 줄만 알았지 선풍기 날개 사이사이 먼지가 낀 것도 몰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던 아이의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것처럼 꾀죄죄하다
웃기지만 가끔 사물에 표정이 보이는 때가 있다
내가 늘 쓰고 조물락거린 체취와 방향이 묻어난다
컵은 늘 그자리 내 오른손을 향해 있고
가족들이 함께 쓰는 공동 물품도 유독 내 손때가 묻은 것에 정이 간다
노상 만지는 쪽으로 색이 바래지고 모양도 약간 뒤틀림이 있다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도 내 방에서라면 느낌이 다르다
함께 한 선풍기는 날개에 낀 먼지 뿐만 아니라 자기 전 타이머 조작으로 그 부위
센서가 심히 눌려 다시 한번 꾹 눌러줘야 한다
가장 약한 바람인 미풍은 망가졌고
약풍이 미풍처럼 돈다
바람세기가 다 약해져있다
덜덜거리는 소리도 나지만 소음으로 거슬린 적이 없다
오히려 약간 선풍기 앓는 소리가 잠을 돋운다
수리해서 몇 계절 더 써야지 싶은데
코드 비닐도 벗겨지고 아무래도 더 못 버틸 것 같다
문 열다 부딪히고 발로 밀어놓다 넘어지고 회전이 안 된다고
탁탁 때리다 목이 반쯤은 꺾였고 ...
망가졌나 싶으면 또 돌고..
모양은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거 같은데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7년 이상 쓴 노트북이 어느 날 갑자기 아웃된 적이 있다
조심조심 곱게 썼다 했는데 자료가 다 날아갈까 응급실 뛰어가듯
혼비백산 AS센터로 달려간 기억...
기사님은 수명이 다했고 수리하느니 새로 사는 게 낫다고 한다
상술인가 싶어 다른 곳에 가니 같은 말...
기계치인 사람은 안다
손에 익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사람 사귀는 것과 비슷하다
새신이 내것이 되려면 뒤꿈치가 까지고 난 후다
마지막이라도 깨끗하게 만져줘야 겠다
물건을 버릴 때 주의해야 함을 아무렇게나 버려진 모양을 보며 생각한다
그 주인의 얼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