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고증은 제기준에서는 X나줘라 하는 영화긴하나(내용은 다 압니다)
배설장군은 실제 인물이라 너무했죠..
혹시 김용이라는 작가의 신조협려 라는 소설을 아신다면 거기에 윤지평이라는 도사가 나오는데 거기서 소용녀라는 극중인물을 강간합니다... 문제는 윤지평은 실존인물이고 후손들도 있고(물론 거기 나오는 실존인물들이 많지만 무고한 사람한테 강간은 너무했죠) 중국에서 소송 걸고난리가나서 나중에 바꾸죠.. 개인적으로 명량의 배설은.. 신조협려의 윤지평 급정도 된다고 봅니다.. 뭐 강간은 아니지만 이순신장군 살인미수라면 ㅎㄷㄷ한거아닌가요
하기한 내용은 엔하위키 자료입니다.. 여기서 실제와 크게 다른건 없는걸로 압니다..
裵楔 (1551~1599) : 임진왜란 당시의 경상우수사 ¶
조선의 무장. 칠천량 해전에서 12척의 배를 끌고 도망쳐 명량 해전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edit]
3.1. 일생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2]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3]로 임명된 상태였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4].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5]로 승진한 뒤였다.
1594년에 충청병사로 간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놀랍게도 사람 보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배설에 대한 불만을 그다지 표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어느 정도 유능한 장수였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6] 하기사 전임자보다야 당연히 나았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칠천량 해전 당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상관이었던 원균의 명령을 어기고 군함들을 이끌고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실록에 실린 실제 당시 정황을 살펴본 보고서에는 그런 거 없다. 실제로 칠천량 해전에서 적선 8척을 깨부수는 유일한 성과를 낸 사람도 배설이었고 적이 야습을 가할 때 김완과 함께 맞서려 한 것도 배설이었다. 원균이 제일 먼저 도망치고 최호와 이억기가 전사하자 도망치지 않고 남은 경상우수영 배 7척 가지고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배설이 보전한 병력들은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수군의 대부분이었다. 배설 말고도 남은 배들은 각자 알아서 잘만 돌아갔고, 심지어 임지첨사 홍견 같은 경우는 10척 넘게 데리고 돌아갔다가 명량해전 이후에야 수군에 복귀한 사례를 보면 배설이 비겁해서 도망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배가 없으면 천하의 이순신 장군도 어쩔 수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12척의 배를 남김으로써 이순신 장군에게 역전의 기회를 남겨준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이라 할 수 있으나, 문제는 칠천량 해전 이후 복귀한 다음이었는데 이순신이 복귀하자 이순신에게 막 개기고 급기야는 탈영을 해버린다.
난중일기를 보면[7] 이순신이 그가 육지로 가겠다고 하자 아무 제재 없이 보내준 점, 도망간 이후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난중일기 1597년 9월 2일자 기록)" 라고 짤막한 한 줄로 끝낸 점을 들어서 이해할 만한 어떤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저 기록만 따지고 보면 저런 추측을 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그 이전의 배설에 관한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렸으며, 한 번은 이순신이 나왔을 때 타고 올 배도 주지 않는 등 이순신이 이를 가는 대목이 많다. 그 전의 기록을 따져보면 배설은 PTSD가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나와있다. 상기의 "드러나지 않은 계책~"으로 해석한 부분이 온당하지는 않은 것이 배설이 자꾸 나약한 모습만 보이고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려 잠시 육지에 가겠다고 하자, 이순신은 한마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장수된 자로서 함부로 먼저 혼낼 수 없다는 논지의 기록이다. 이순신 자신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는 상선에서 내려서 육지 진영에서 머물고는 했다.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이순신의 심증과 들어맞게 배설은 도망간다…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며 배설에게 호통을 쳤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재밌는 점은 탈영루트가 후덜덜하다는 것. 왜군 점령지대를 거의 단신으로 돌파해버렸다.
즉 배설은 칠천량 해전때 활약하여 명량 해전의 기반을 만든 공로자였지만 명량 해전의 승산이 없다는 판단과 칠천량 해전에서의 PTSD 등이 그가 탈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전시 탈영이라 열받은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왜란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인 1599년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참 무서운 것이 보인다. 사람들을 모아 이상한 짓[8]을 꾸몄고 조정에서 배설의 부친과 형제를 붙잡아 인질로 잡은 후 배설을 체포해 처형했다. 당시 선조와 조정이 하는 짓에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 것인지, 공황장애인지 의견이 분분한 사람이다. 이래나 저래나 미스테리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