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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안의 소요산 단풍

꺾은붓 조회수 : 1,492
작성일 : 2014-07-25 18:43:45

 너무 정치적인 글만 올리면 이 사람 시위를 위한 시위만 하는 전문시위꾼으로 오해를 받을 까봐 오래 전에 썼던 어쭙잖은 수필 한 편을 올립니다.

 

                     전철안의 소요산 단풍


  2007. 11. 4

  친구들과 어울려 동두천 근교 소요산으로 등산을 갔다.

  소요산! 

  나에게는 조금은 아린 추억이 있는 산이다.

  온 나라가 가난으로 찌들었던 1950년대 서울변두리 왕십리(정확하게는 마장동)에 있는 동명초등학교에서 봄가을로 가는 단골 소풍지가 동구릉 서오릉 등 왕릉과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등 근교에 자리한 산들이었다.

  서울 강남 쪽에도 관악산 청계산과 같이 빼어난 산들이 많이 있었지만 오늘날 한강대교로 불리는 한강인도교만 달랑 하나 있었고 영등포역 주변에만 시가지가 조금 형성되어 있었던 그 시절 관악산이나 청계산은 한강건너로 바라만 보는 산이었지 쉽게 가 볼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물론 강북 쪽의 가까운 산들도 오늘날과 같이 도로망과 대중교통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가는 소풍은 꼭 버스를 대절해야만 갈 수가 있었다.


  몇 학년 때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해 가을 소풍은 좀 멀리 잡아 소요산으로 결정되었다. 조금은 먼 곳으로 가니 거리에 비례해서 소풍경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몇날며칠 끌탕을 하며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해 가을 소풍은 포기를 했었다. 그때 소풍 못가는 내심정이 맨살 찢어진 것 같이 아프고 쓰렸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때 어린 아들 소풍 못 보내는 어머니 심정은 째진 상처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뿌리고 비벼대는 아픔이셨을 것이다.

  아- 어머니!

  그 뒤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소요산은 내 기억에서 희미하게 지워졌었는데 수도권 전철이 소요산까지 연장되면서 까마득히 잊혔던 추억이 꿈틀대며 되 살아 났다.


  친구들과 어울려 매주 일요일 서울근교 대중교통이 닺는 산들을 골라 등산을 가니 웬만한 산들은 수십 번씩 가보았고, 전철길 따라 소요산도 우리들 등산 목적지 목록에 자연히 추가가 되었고 그날 소요산으로 가기로 의견들이 모아졌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에게야 매주 가는 그렇고 그런 등산이었겠지만 나는 가슴속에 50년간 쳐 두었던 신비의 장막을 걷어내는 가슴 설레는 등산이었고, 50년 묶고 가라앉은 앙금을 털어내는 각별한 의미가 담겨진 산행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가을소풍을 50년이 넘어 이제야 가고 있는 것이며, 꼭 가을소풍을 가는 초등학생의 들뜬 기분 그대로였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소문난 잔치에 젓가락 끌어당기는 접시웃기 별로 없다 듯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우선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 이건 등산이라기보다 차라리 출퇴근시간대의 시내버스나 전철안과 같았고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수십 번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앞 사람 등에 멘 배낭을 내 가슴으로 밀고 뒷사람 가슴에 내 잔등이에 멘 배낭 떠밀려 가는 아주 짜증나고 답답한 산행이었다.


  단풍이 절정기였고 서울 인근의 산들 중에는 소요산 단풍이 으뜸으로 소문나 있으니 서울근교 산을 오르던 주말산행 팀들이 새로 개통된 전철에 의지하여 대부분 소요산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산의 자태도 금강산이나 설악산을 쏙 빼닮은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 등에 익숙해진 순에 썩 차지를 않았고, 단풍은 이미 절정기를 지났기도 하였거니와 내장산 등과 같이 내 노라 하는 단풍의 화려함을 뽐내는 산들과는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쌀밥과 매끄러운 반찬에 길들여진 입에 절구통에다 겉껍데기만 짓이겨 벗겨낸 거친 보리밥에 약 오른 풋고추 깡 된장 찍어 입속에 우겨넣고 으적으적 씹어서 목구멍으로 억지로 밀어 넘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나마 하산 길 산 밑에 있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전설과도 같은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조그만 사찰과 바위굴이 그런대로 위안을 해 주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웠고 허탈했던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전철 안.

  소요산역이 전철이 출발하는 시점(종점)이련만 전철 안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등산객들로 채워져 있었고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경로석 앞에 서서가는 자리를 잡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비좁은 전철 안 경로석에 금강산 설악산보다도 더 아름다운 비경이, 내장산 단풍보다도 더 곱고 은은한 정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젊으셨을 때 힘깨나 자랑하셨을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의 80줄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아담한 체격에 호호백발 곱디곱게 늙으신 할머님 노부부가 자리를 잡고 앉으셨고, 그 옆자리에는 50대 후반쯤 되었을 화사한 빨간 등산복의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80줄로 보이는 호호백발 곱디고우신 할머님 손에 두툼한 책 한권이 들려져 있었고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 책을 천천히 읽고 계셨던 것이다.

  80대 노부부에게 등산은 무리였을 것이고 소요산 단풍구경을 왔다 돌아가시는 것이었을 것이다. 복장도 등산복 차림이 아닌 그런 간편한 나들이 복장이었다.

  전철 시내버스 수십 년 타고 다녔고 차안에서 읽을거리 읽는 사람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대개가 젊은이들이 공짜로 나누어 주는 신문을 읽어나 간혹 책을 읽는다 해도 만화책이나 무협소설, 그도 아니면 돈방석위에 올라앉는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무슨 테-크”라는 제목의 책이거나 직장에서 앞뒤사람 다 따돌리고 쏜살같이 출세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빠각빠각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나게 하거나 뇌세포에 경련이 일어나게 하는 책들뿐이었는데!

  아! 80줄 호호백발할머님께서 저런 책을 읽고 계시다니!

  어쩌면 사람이 저리 곱고도 아름답게 늙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저 연세에 어떻게 저토록 몸가짐이 깔끔하고 저리도 밝고 평화로우실 수가 있을까?


  차안에서 남이 책 읽으면 고개를 밑으로 꼬아 책 제목을 훔쳐보거나 그게 아니면 어깨너머로 몇 줄 흘겨 읽고 내가 읽어본 책인가 아닌가를 헤아려보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그 할머님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예쁜 꽃무늬 종이로 책을 싸서 책 제목은 아예 볼 수도 없었고 나는 서 있고 반대방향으로 앉아서 읽고 계시니 책 내용도 훔쳐서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할머님께 건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감히 그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을 깨트릴 배짱과 염치가 없었다.

  책의 두께나 글자의 크기나 글줄의 나열된 모습으로 보아 무슨 고전이거나 사려 깊은 작가의 문학작품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옆자리의 빨간 등산복 아주머니가 말문을 틔워 주었다.

  “할머님 글씨가 잘 보이세요?”

  “할머님께서 그런 두꺼운 책을 읽고 계시니 대단하시네요!”

  할머님께서 잠시 책읽기를 멈추고 그 빨간 등산복의 아주머니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이시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셨다.

  이때다 싶어 나도 용기를 얻어 할머님께 몇 마디를 던졌다.

  “할머님께서 그런 책을 읽고 계시니 참으로 아름다우시네요.”

  “소요산 단풍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할머님께서 이번에는 내게로 눈길을 돌리고 예의 그 은은하고 잔잔한 미소를 띠어 보이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다.

  어디 빨간 등산복아주머니와 나뿐이었겠는가? 그 할머님 책 읽는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가슴에 신선하고도 상큼한 충격과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을 것이다.


  미끄러져 가는 전철 차창 밖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지 한참 지난 늦가을 쓸쓸한 들판에 땅거미가 천천히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철 안이 만원이라 콩나물시루 같았고 뒷사람이 계속해서 내 등을 밀어대고 있었지만 나는 짐 올려놓는 가로지른 쇠막대기에 양팔을 짚고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뺄 수 있는데 까지 뒤로 빼어 할머님께서 책 읽으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그만 공간이라도 마련해 드리려고 애를 썼다.

  전철은 이미 의정부를 지나 서울경계로 접어들고 있었고 차장 밖은 완전히 어둠이 내려깔렸다.

  우리 일행은 등산 끝나고 갖는 뒤풀이를 하기 위해 창동역에서 내리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고 창동역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는 모르겠으니 할머님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등산을 마친 몸으로 배낭을 메고 서 있자니 다리도 아팠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빼어 뒷사람을 떠밀고 있자니 힘도 들었지만 할머님께서 책 편히 읽으시도록 자리를 지켜드리는 것이 그 시간 내게 주어진 사명 같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차가 창동역에 들어서자 할머님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할머님 노부부가 내리시는 그 역까지 자리지킴을 해 드리고도 싶었다.

  “할머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좋은 책 많이 읽으세요.”

  할머님께서도 눈웃음을 얹어 잘 가라고 인사를 하셨다.


  전철에서 내렸어도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다시 미끄러져 가는 전철을 바라보니 할머님께서 고개를 뒤로 돌리고 천천히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도 전철이 역사를 다 빠져나가도록 할머님이 보이건 안 보이건 손을 흔들어 이생에서는 다시 못 만날 작별을 했다.

  전등불빛이 밤안개에 부셔져 반짝이는 전철이 빠져나간 철길 위로 책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재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과 할머님의 모습이 겹쳐서 떠오른다.

  전철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입속으로 되뇐다.

  “할머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좋은 책 많이많이 읽으세요!”


  “야- 너 뭣하고 있는 거야?”

  인파에 부대끼다 전철에서 늦게야 내린 친구 녀석이 빨리 가자고 어깨를 철썩 때린다.

  구름 위 선계(仙界)를 넘나들다 확- 꿈이 깨어 아귀다툼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아- 하늘의 배려이련가?

  그때 어린 아들 소풍 못 보내 쓰라리셨던 어머님 영혼의 보살피심인가?

  50년 기다림 끝의 아쉽고 허탈함을 이렇게 아름답고 상큼하게 달래주시다니!


  곱디고우신 그 할머님 오늘도 어느 삭막한 전철 안 뭇사람들에게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아름다움과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에게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계실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늙어가야 한다!”고.


  (덧붙이는 군더더기)  

  그렇게 매주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근교 산으로 등산을 다녔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출현 하고 부터는 매주말 촛불 켜 들고 현대판 독립운동을 하느라 등산에 거의 나가지를 못하고, 친구들한테는 종북 좌빨/어리석은 놈/덜 떨어진 놈/세상물정 모르는 놈 등 못된 욕은 다 내 이름이 되었고, 어떤 친구 녀석은 아주 가끔 등산에 나가면 “어이 윤동무!”하고 부르고, 그러면 나는 “지금 막 평양에서 오는 길이다.”하고 응수를 하여 줍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습니다.

  둘 다 죽어야 그 병 고치지 살아서는 굳은 머리 고져질 병이 아닙니다.

IP : 119.149.xxx.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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